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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사진역사학의 제창: 잊혀진 기록, 대륙의 독립운동가 역사 속에서 부활하다
  • 박 환, 수원대학교 사학과 교수

 

박 환, 수원대학교 사학과 교수


서강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만주, 러시아 등 대륙에서의 한인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으며, 자료적인 측면에서 사진과 영상 등으로 인식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1986년부터 수원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논저로는 사진으로 보는 3·1운동 현장과 혁명의 기억과 공간, 사진으로 보는 러시아 지역 한인의 삶과 기억의 공간, 사진으로 보는 만주 지역 한인의 삶과 기억의 공간, 페치카 최재형, 만주 한인민족운동의 재발견, 만주한인민족운동사연구, 민족의 영웅, 시대의 빛 안중근등이 있다.

 

 

사진은 사건 당시를 생동감 있게 전한다는 측면에서, 역사의 현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 역사를 보다 입체적이고 심도 있게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좋은 재료가 되기도 한다.

전 세계에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조선의 자주독립을 주창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한 연해주 등 대륙 지역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은 그 중요성에 비해 그동안 잘 밝혀지지 않았다. 사진, 영상과 같은 다양한 시청각 자료를 깊이 있게 소개하며 잊혀진 역사의 벅찬 감동을 전하는 역사학자 박환 교수를 만나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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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항일독립운동사 연구에 매진해 오고 계십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만주, 연해주 등 대륙에서 일어난 민족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A. 일차적으로는 만주, 시베리아에 대한 호기심, 열망이 작용한 것 같습니다. 이강훈, 이규창 등 생존 애국지사들께 들은 대륙의 자연, 생활, 마적 등에 대한 생동감 넘치는 말씀들이 저를 대륙으로 향하도록 했구요. 또 러시아 지역의 민족운동은 그 중요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데다, 그곳에서 전개된 무장투쟁 역시 저평가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특히 작고하신 선친 박영석 교수께서 이 분야를 전공한 학자이기 때문에 이에 관한 말씀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이런 배경들이 제가 대륙의 민족운동에 관심을 가지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Q. 역사학계는 문헌 자료나 생존자의 구술 및 기록 등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사를 연구해왔습니다. 교수님께서 2019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발간하신 사진 자료집은 3·1운동 당시를 생동감 있게 전달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역사학계 혹은 일반 대중이 사진에 대해 가지는 인식은 어느 정도인가요?

A. 조금 낯선 표현이지만 저는 사진역사학을 제창하는 사람입니다. 사진을 역사학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분석하자는 것이지요. 역사학을 연구하다 보면 역사의 현장들을 찾아다니게 됩니다. 그런데 역사의 정확한 지점 및 현장을 밝히는 작업은 매우 어렵습니다. 어느 한 시점을 올바로 복원하기 위한 자료들을 찾아보면 문헌 자료 외에는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사진 자료는 역사적 사실을 연구하는 데 있어 많은 영감을 제시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사진은 촬영자의 의도가 담겨있을 수 있으니 이 또한 해석에 있어서 주의해야겠지요. 한편으로는 우리 역사학계가 사진을 사료로써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특히 도서나 방송에서 사용하는 자료 사진 등에 잘못된 설명들이 실리고 송출되는 것을 보면 정말 안타깝습니다. 이제 역사학은 정통 역사학, 전문 역사학의 범주를 넘어 다양한 콘텐츠와 융합하여 발전하는 방향으로 변화해야 할 것 같습니다.

     

     

Q. 최근 들어 역사 속 함성과 기억을 되새겨주는 다양한 사진 자료들을 많이 소개하셨는데 3·1운동 당시 연해주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A. 러시아 연해주에서는 1919317일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등의 지역을 중심으로 3·1운동을 활발히 전개했지만 그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살아있는 자료는 없습니다. 그런데 19203·1운동 1주년을 기념하여 독립운동의 성지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전개한 활동 사진은 다수 남아있어 우리를 전율케 합니다. 태극기를 앞세우며 신한촌 언덕 위를 행진하는 수많은 동포들, 언덕 위에 나무로 만들어 세운 독립문 등. 최근에는 1923년 우수리스크에서 행해진 3·1운동 기념식 사진이 발굴되어 기뻤습니다. 이는 연해주 한인들이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했던 강한 의지가 드러난 귀중한 자료로, 태극기와 붉은 적기가 함께 게양되어 있어 그 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Q. 그동안 자료나 사진이 발굴되지 않아 그 중요성을 입증하거나, 활동 내용 등을 조명하지 못하는 지역이 많았습니다. 앞으로 역사 분야에서 사진을 포함한 시각 자료들이 더 많이 발굴되고 연구된다면 대중도 독립운동의 역사와 독립의 과정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A. 오늘날은 역사 소비 시대입니다. 많은 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역사를 읽고 듣고 보고 즐깁니다. 특히 대중은 전문성에 기반을 두고 쓰여진 어려운 문헌보다는 시청각 자료에 관심이 많습니다. 대중이 역사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방식을 알기 위해서는, 또한 역사를 일상 속에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서는 사진, 영상, 음원 등과 같은 다양한 콘텐츠의 발굴이 시급하다고 봅니다.

다만, 이들 자료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해석 등 기초 작업들이 우선되어야겠지요. 그러므로 이제는 사진 자료 등에 대해 정확한 설명을 부가하는 작업에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중과 함께 하는 역사학, 중과 함께 호흡하는 역사학이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한 시점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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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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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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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사진 등의 자료에 정확한 설명을 부가하는 작업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우리에게 잘못 알려진 자료가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A. 청산리 전투 100주년을 맞아 이에 한정하여 몇 가지만 말씀드리면 대한 독립군 섬멸을 위해 도문강을 건너 청산리로 진군하는 나남 제19사단 산하 일본군 여단으로 알려진 사진은 실제 19053월 러일전쟁 시 찍은 사진입니다. 또한 청산리 전투에서 부상병을 실어나르는 일본군’(사진 1)으로 알려진 사진은 19399월 화중華中 전선에서 촬영된 사진입니다.

이외에도 피해당한 간도 지방의 한국인 농가사진(사진 2)가옥과 함께 남편과 아이를 잃은 부녀자들사진(사진 3) 등은 1938년 두만강 유역에서 일어난 장고봉 사건당시의 사진들입니다. 그 외에도 3·1운동과 관련된 사진들도 여러 건 있습니다. 이처럼 잘못 알려진 자료가 여과 없이 소개되는 것에 역사가의 한 사람으로서 송구한 마음이 듭니다.

     

     

Q. ‘안중근 의거를 가능하게 한 후원자이자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로 불리는 최재형 선생의 업적이 본격적으로 조명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A. 외교 관계, 시대적 상황, 학계의 연구 분위기 등과도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한국과 러시아가 국교 수교를 시작한 1990년 전까지 양국 간에는 교류가 없어 자료 발굴도, 현장 답사도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립운동의 주요 현장이라고 할 수 있는 러시아 연해주 항일 투쟁사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번듯한 기념물마저 없었습니다.

1992년에 제가 처음으로 연해주 현장을 답사하고 1995년에 최재형의 세 딸인 최 올가(러시아 모스크바), 최 류드밀라(키르키즈스탄 까라골), 최 엘리자벳다(카자흐스탄 알마티) 등을 면담하면서부터 관련 자료의 수집과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 후 문헌 자료와 사진 자료 수집 및 고증, 러시아 연해주 및 중앙아시아 지역으로의 답사 등으로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결과 2018페치카 최재형이라는 연구서를 간행할수 있게 되었지요. 연구자로서 새로운 역사적 인물을 무대에 올린 것은 큰 기쁨이었습니다. 최재형을 발굴하고 연구하여 오늘날의 최재형을 탄생시켰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Q. 최재형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에 임명됐음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와 별다른 관련을 맺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와 함께, 연해주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 간의 관계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A. 최재형은 19194월부터 동년 6월까지 임시정부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는 다만 자신의 기반이 되어준 동포들이 있는 연해주 독립운동 현장을 지키고자 임시정부가 위치한 상해로 가지 않은 것입니다.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는 상호 협력 관계였다고 보여집니다. 임시정부가 상해에 조직되었을 때 문창범, 최재형 등 연해주 독립운동가들이 여러 사람 참여합니다 아울러 연해주에는 독립운동의 물적, 인적 자원들이 다수 존재했기 때문에 상해 임정을 외각에서 도울 수 있었지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호 간에 일정한 갈등도 있었구요.

     

     

Q. 그렇다면 최재형 선생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게 된 결정적 계기를 무엇으로 보시는지요?

A. 러일전쟁 시 간도관리사였던 이범윤과의 만남이 당시 군납업자였던 최재형에게 민족적 정체성을 갖도록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러시아에 귀화한 한국계 러시아인으로서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의 승리를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패전 후에도 일본과 계속 싸우는 것이 러시아를 위한 일이고, 자신의 사업상 이득을 위해서도 좋은 것이라 판단했을 겁니다. 그 과정에서 점차 이범윤과의 대화 등을 통해 민족의식을 가지고 항일투쟁의 대열에 서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Q. 조선 독립, 연해주 한인, 러시아에 망명한 의병을 위해 전 재산을 아낌없이 헌납한 최재형 선생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있을까요?

A. 가진 자의 희생과 봉사라고나 할까요. 최재형 선생은 노비 출신으로 자수성가하여 러시아 연해주의 대표적 거부가 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정치와 유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관파천 시 조선 조정의 부름을 거부한 비정치적 인물입니다. 아울러 연해주에 남아 투쟁하다 일제에 총살당한 현장의 지도자입니다. 또한, 수많은 학교를 만들어 동포들의 교육에 공헌한 교육자입니다. 그는 모든 이들에게 사랑을 베푼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난로라는 뜻의 러시아어 페치카(пе́чка)’로 불렀습니다. 그가 주는 메시지는 바로 따뜻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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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2020년은 한·러 수교 30주년의 해입니다. 3·1운동 정신을 계승하려 한 만주와 연해주 한인들의 역사적 사실 발굴에 애쓰고 계신 학자로서, 앞으로 우리나라가 러시아와 어떤 관계를 맺어 나갈 것이라고 보시는지요?

A. 저는 한국과 러시아, 러시아와 한국의 상호 친선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러시아는 우리가 어려웠던 시절, 우리의 항일독립운동을 도와준 따뜻한 친구입니다. 최재형과 같은 시기에 한인들과 더불어 혁명운동을 전개하다 순국한 러시아 혁명가 세르게이 라조를 기억합시다. 역사적 사실을 통해 러시아인들에게 우리도 그들의 친구였음을 인지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은 바로 한국과 러시아 양국이 갈구하던 공동의 평화를 위함이었음을 알려야 합니다.

     

     

Q. 독립정신의 계승과 발전, 독립운동사 연구를 위한 재단의 역할에 관하여 제언 부탁드립니다.

A. 동북아역사재단의 성격상 독립운동사를 직접적으로 다룰 필요성은 적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한국사적 시각을 넘어 거시적 차원에서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지역적으로 보면 일본과 중국을 비롯하여 몽고, 러시아, 미국까지 폭넓게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아울러 비교사적 관점에서 영국, 프랑스 등 서양 국가의 아시아, 아프리카 진출 등 입체적 연구도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합니다. 또한, 문헌 자료의 번역과 더불어 사진, 영상, 음원 등에 대한 관심 또한 가져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