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리 암각화 도면
대곡리 현장 조사 후 폴리에틸렌으로 채록한 형상 모두를
컬러 유성펜으로 트레이싱 페이퍼 위에 옮겨 그린 뒤,
하나하나의 낱장들을 연결하여
대곡리 암각화의 전체 도면을 완성시켰다.
울산 대곡리 암각화 발견 당시 (왼쪽부터 김정배, 이융조, 문명대)
제공: 김정배
50년 전 발견된 세계 최고의 고래 도감과 선단식 포경도
2021년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산 999-1번지에 있는 국보 제285호 대곡리 암각화가 발견된 지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 암각화는 1971년 12월 25일 김정배, 문명대, 이융조 등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바로 한 해 전에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에서 발견된 국보 제147호 천전리 암각화와 함께 한국 선사시대 암각화의 대명사가 되었다. 대곡리 암각화는 마름모와 동심원 등 기하학적 형상 위주의 천전리 암각화와는 달리 사람, 고래, 거북, 배, 그물, 사슴, 호랑이, 멧돼지 등 250여 점의 자연주의적인 형상들이 그려져 있어서 국내는 물론 해외의 전문가로부터 크게 주목받았다.
그간의 조사와 연구를 통해 이 암각화는 네 차례 이상의 덧그리기가 이루어진 점, 두 척의 배가 협동하여 고래를 잡는 장면, 잡은 고래를 끌고 가는 장면 등 포경과 관련된 그림이 제일 먼저 그려진 점, 이빨고래와 수염고래 등 11종 이상 고래의 종별 몸통 구조와 생태적 특성이 변별 가능하게 형상화되어 있는 점, 그물과 작살 등의 포경 용구가 함께 그려진 점 등이 밝혀졌다. 이와 같은 형상 위에 호랑이, 사슴, 멧돼지 등의 육지 동물들이 덧그려져 있는데, 이로써 첫 그림부터 시기별 문화 주인공들의 관심사와 주요 생업, 동물의 서식 상황 등을 살필 수 있다.
대곡리 암각화를 통해 이 유적에 처음으로 그림을 남긴 사람들은 식량을 채집하거나 동물을 사냥하면서 살던 사람이 아니라, 바다로 나가서 고래를 잡았던 사람이었음이 드러났다. 그들이 목격하였던 것은 귀신고래뿐이 아니었다. 북방긴수염고래, 참고래, 밍크고래, 브라이드고래, 대왕고래, 혹등고래 등의 수염고래, 향고래와 범고래, 부리고래 그리고 낫돌고래와 같은 이빨고래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암각화를 남긴 사람들은 고래를 잡기 위해 포경선과 작살, 그물을 만들었고, 바다로 나가서 고래를 향해 작살을 던지고 사투를 벌이다 고래를 잡아서 끌고 오는 모습을 분명히 그려놓았다.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전경
사료 속에서도 살필 수 없던 옛 한국인의 문화 풍속도
이 암각화는 『삼국유사』 속에도 기술되지 않았고, 신화나 전설로도 전해지지 않는 선사시대 한반도 선주민들과 그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울산만과 동해를 거점으로 고래를 잡으며 살았던 옛 한국인의 생활상에 관한 것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언제 배를 만들고 고래를 잡았는지 그 상한上限을 확언하기는 쉽지 않으나, 그림의 제재와 주제, 물질문화의 흔적, 포경 관련 간접 자료, 그림의 조형 양식 등을 종합해 볼 때 그 하한下限은 지금부터 5천 년 전의 어느 시기, 즉 신석기 시대 중기 이전으로 소급된다는 것이 최근의 연구 경향이다. 제작 시기를 밝힐 객관적인 증거나 편년編年의 절대적인 기준이 없는 선사시대의 조형 예술품들이 발견 초기에 위작설과 진정성 시비에 휘말렸던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유명한 알타미라 동굴벽화이다. 이 동굴벽화 속의 들소를 비롯한 동물 형상들이 너무나 생동감 있고 색채 또한 금방 칠한 것처럼 선명한 점, 그것들이 입구가 아니라 동굴 속 깊은 곳에 그려졌다는 점 등은 그때까지의 학계가 지니고 있던 일반적인 통념과는 상반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발견자인 알타미라의 영주 마르셀리노 산즈 데 사우투올라Marcelino Sanz de Sautuola(1831~1888) 후작은 에밀 카르타이야크Émile Cartailhac(1845~1921)를 비롯한 당대의 지성들로부터 ‘알타미라의 미치광이’라는 세찬 비난과 심지어는 위작僞作이라는 매도를 받고 화병으로 죽는다.
무엇이든 처음 발견되거나 만들어진 일 혹은 제기된 주장 등은 의구심의 대상이며, 냉엄한 검증을 피할 길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몰이해, 무지, 편견에 의해 내려진 독단적인 판단은 새로운 사례, 과학적 검증 등으로 평가받게 된다. 이들 동굴벽화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빙하기와 함께 멸절된 동물들, 즉 들소나 매머드, 야생마 등은 그것을 보지 못한 사람이 그릴 수 없다. 이 점에서 빙하기의 사냥꾼이 남긴 조형 예술품들이 비로소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미술품들은 매장유물 가운데 유사한 실물 또는 도상圖像이 발굴됨에 따라 보다 분명한 지지를 받기에 이른다.
대곡리 암각화 속의 고래와 배, 작살잡이, 제작 시기와 문화층 등에 관한 초기의 연구에도 불편한 오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밝혔듯이 이 암각화 속에는 모두 11종 이상의 고래와 거북, 물개 등의 해양성 동물이 그려져 있는데, 이들은 추상적이거나 도식적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 지적 사실주의로 그려져 있다. 이는 반복적으로 보고 경험하여 미세한 차이를 구분 가능한 이들만이 표현할 수 있는 내용(사실)들이 형상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암각화 속 형상들은 즉자적卽自的이고, 육감적이며, 사실감으로 충만하다. 이러한 점은 원망願望 혹은 이데아를 그린 것이 아니라 생활의 실상을 그린 것임을 말해준다. 이 ‘포경’이라는 현장성이 세계 최고의 고래 도감을 만들었고, 또 뱃머리에 서 있는 작살잡이는 전 세계 포경도 속 포수의 전형으로 자리 잡았다.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 주술사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 선단식 포경도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 '선단식 포경도'의 도면
형태 해석의 완전성과 조형의 독창성
바위그림(암채화와 암각화를 하나로 아우르는 말) 또는 암각화는 선사시대 인류의 보편적 문화 현상 중 하나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바위그림이 발견되지 않은 대륙이 없고, 그림을 남기지 않은 종족이 없는 듯하다. 아프리카 대륙의 칼라하리 사막에도, 호주의 노던 테리토리에도, 노르웨이의 북부 지역을 비롯한 스칸디나비아 반도에도, 시베리아의 타이가 지대나 중국의 칭장고원, 그리고 최근에 보도된 바 있는 콜롬비아의 아마존 열대 우림 지역에도 지구상에서 모습을 감춘 동물을 비롯한 다양한 형상들이 그려져 있다. 물론 그 가운데는 빙하시대라고 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이른 시기에 남겨진 것도 있고, 무無 문자 시대나 혹은 역사시대歷史時代에 남겨진 것들도 있다.
그러나 고래와 포경도 등 표현 대상물의 형태 해석과 동물 형상들의 조형 양식을 볼 때, 대곡리 암각화는 다른 지역에 그려진 유사 주제의 그림들 가운데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완전성과 독창성을 띠고 있다. 베링 해협 북쪽의 페크트이멜 유적이나 러시아 서북쪽 끝 카렐리야의 잘라부르가 유적, 그리고 스칸디나비아의 피오르드 지역 등지의 그것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우선 핵심 제재인 고래의 종류가 다양한 점, 생태적 특징이 표현된 점, 고래잡이 광경의 사실성과 시간의 경과를 살피게 하는 장면 묘사가 이루어진 점, 형태 해석의 객관성과 탁월한 조형성을 띠고 있는 점 등이 그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점 때문에 영국 옥스퍼드가 발간하는 아키오프레스Archaeopress나 이코모스ICOMOS가 발간하는 학술지 등은 울산 대곡리 암각화의 탁월한 연구 성과를 소개하였고, 지금도 많은 해외 석학이 우리 암각화 속 고래와 포경도 등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런 세계 선사학계의 기류 때문에 울산광역시와 문화재청은 이 암각화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힘을 쏟고 있다. 유네스코는 세계문화유산의 등재 조건 가운데 하나로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꼽는다. 분명한 것은 대곡리 암각화가 세계적인 탁월성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간의 원형 보존이라는 문제, 즉 아래에 세워진 댐으로 인하여 유적지 주변 경관의 현상이 변질되었다는 아쉬움도 있다.
물에 완전히 잠긴 반구대 암각화
(2020.7.28) ⓒ연합뉴스
대곡리 암각화는 그림 문자로 기록한 한민족 최고의 문화 경전
만약 울산에서 대곡리, 천전리 암각화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가정이지만, 울산의 도시 풍광은 지금과 사뭇 달랐을 것이다. 암각화박물관과 고래박물관 등이 없을 것이고, 남구 고래축제도 없을 것이며, 온 도시를 장식한 고래 조형물과 암각화 속 형상을 차용한 각종 장식 문양들도 없을 것이다. 암각화로 인한 물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대곡댐도 세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대곡박물관도 건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은 국제포경위원회IWC에 가입하지 않았을 것이고, 울산은 국제포경위원회를 개최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지금과 같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등재를 위한 갖가지 퍼포먼스도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대곡리 암각화는 울산의 도시 경관을 바꾸고, 도시의 품격을 수직 상승시킨 촉매제였다. 게다가 고래, 포경, 선사미술 등 각계 전문가가 주목하는 것을 보면, 국제사회에 내어놓아도 경쟁력 있는 문화유산임에 틀림없다. 세계 어디서도 살필 수 없고, 오직 한반도 울산에만 있는 세계 최고의 고래도감과 선단식 포경도, 조형 언어로 번역한 고래잡이 부족의 포경 예찬가 등의 진가를 울산과 대한민국은 아직도 잘 모르는 듯하다. 돌이켜 보면, 이 암각화가 발견되고 50년이 지나는 동안 우리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의 격에 맞는 대접을 한 적이 없었다. 물 부족과 보존을 핑계로 극심한 집단 이기주의가 발생하였고, 주변 경관 현상을 변경시키려는 해괴한 개발 지상주의자들이 몰려들어 문제의 핵심을 호도하였다. 그러는 사이 암각화는 물에 잠기기를 반복하였다. 그러한 상황은 현재진행형이며 이것이 우리 대한민국의 문화재를 관리하는 현주소이고 또 우리들의 민낯이다. 국격이 높아졌다고들 하지만, 문화유산을 대하는 국가의 정책이나 시민사회의 극단적인 이기주의는 여전히 후진국 수준을 면치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대곡리 암각화는 이제라도 우리의 국격에 맞게 대접해야 한다. 관계 당국은 말로, 슬로건으로, 구호로, 공약으로만 내 걸지 말고, 당장 댐의 수위부터 낮추고 그다음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한국 민족문화의 원형질을 밝히는 일에 연구 역량을 결집해야 한다. 국립암각화연구소 내지는 선사미술문화연구소 설립을 통하여 연구와 보존, 새로운 부가가치 창출에 진력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이 암각화는 무 문자 시대의 한국 문화를 그림 문자로 기록한 한민족 최고의 문화 경전이기 때문이다. 이는 『삼국유사』보다 천 배, 만 배 더 값지고 생동감 있는 조상들의 육필의 기록 유산이자 조형 예술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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