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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한일 관계 연구의 선구자 최서면
  • 심규선, 서울대 일본연구소 객원연구원(전 동아일보 대기자)

심규선, 서울대 일본연구소 객원연구원(전 동아일보 대기자)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

(1928~2020)

 

20205월 서울에서 발행하는 거의 모든 신문이 한 인물의 별세를 부음기사로 다뤘다. 부음기사는 향년 92세로 타계한 그를 예외 없이 한일관계 연구의 권위자’, ‘한일 외교의 막후 원로’, ‘안중근 의사와 독도 문제를 비롯한 근현대사 연구의 권위자라고 했다. 지금도 한일관계를 연구하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별세했을 때 그와 같은 평가를 들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는 누구인가. ()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이다.

 

망명지 일본에서 한일관계 연구의 초석을 놓다


최 원장은 업적도 많지만, 인생 자체도 극적이다. 1928년 강원 원주에서 태어나 연희전문학교 학생으로 해방을 맞으며 김구 선생을 지지하는 대한학생연맹(한국독립당) 위원장에 올라 신탁통치반대운동을 벌였고, 소련군이 점령한 북한으로 가서 조만식 조선민주당위원장에게 신탁통치반대운동을 함께 하자는 김구 선생의 편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1947년에는 장덕수 암살사건에 연루돼 미 군정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다 풀려났다. 형무소를 나와서는 이시영李始榮 선생(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제 정치는 그만두고 공부에 힘쓰라면서 지어준 서면書勉으로 이름을 바꾼다. 그는 한국전쟁 중 피란지 부산에서 고아원을 운영한 미담이 알려지며 가톨릭 총무원 사무국장으로 일하게 된다. 이때 사무총장이었던 장면張勉의 최측근이 됐는데, 이후 이승만 정권이 정적제거 차원에서 장면 그룹을 체포하려 하자 1957년 급히 일본으로 망명한다.


29살의 청년 최서면에게 일본은 의지할 데 없는 무인도였다. 그런데 그를 내친 무인도에 조국에 대한 사료가 지천이었다. 그는 임시체류허가라는 불안을 누르고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 파묻혀 한국 관계 자료를 읽고 또 읽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안중근 의사의 옥중자서전 안응칠역사, 이봉창 의사의 최고재판소기록, 조선이 만든 동양 최고最古의 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광개토대왕 탁본 등을 발굴해 한국에 소개했고, 야스쿠니신사에 방치된 북관대첩비의 국내 반환 길을 텄으며, 안중근 의사의 유묵(보물로 지정된 國家安危勞心焦思」 「爲國獻身軍人本分)과 추사 김정희 선생의 화첩을 가져왔다. 1969년 동경한국연구원을 설립하고 기관지 을 발간해 한국 논문을 일본어로 번역해 소개하는 한편, 일본의 한국 관련 논문도 게재하여 한일 간 학문적 교류의 초석을 놓았다. 이어 국제관계공동연구소, 국제한국연구기관협의회도 설립해 한국학의 세계화에 기여하고 김옥균연구회’, ‘안중근연구회도 만들어 일본에서 이들을 긍정적으로 재평가하는 데 이바지했다.


최 원장은 한일관계사료 20만 점을 수집하여 1988년 영구 귀국 시 국립외교원, 외교부, 연세대 등에 기증했다. 또한 일본 외무성의 한일관계자료 5만여 점을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 소장 한국관계사료 목록 18751945(국사편찬위원회, 2003)로 펴내어 연구자들이 쉽게 활용하게 했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안중근 전문가인 동시에 독도 연구 1인자였다. 영토주권을 수호하기 위해 고지도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수집을 통해 독도 영유권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했다. 그는 공로를 인정받아 2010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독도 영유권과 관련한 첫 국민훈장이다.

 

일본 체류 시절 후쿠다 다케오 총리와 이야기를 나누는 최서면 원장

 

박정희 대통령과 일본 정계 사이의 숨은 메신저


최 원장은 가나야마 마사히데金山政英 주한 일본대사 소개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난 뒤 가끔 독대를 할 정도로 돈독한 관계였으며,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총리 등 일본 거물들과의 네트워크도 각별했다. 그는 한일국교정상화 교섭, 7·4남북공동성명에 대한 일본의 불안 무마, 김대중 납치 사건 이후 최악의 한일 관계 타개를 위해 막후에서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의 공적은 일본에서도 주목한다. 고하리 스스무小針進 시즈오카현립대 교수 등은 일본 정부의 예산으로 20114월부터 20181월까지 17(70여 시간)에 걸쳐 최 원장을 인터뷰했다. 한국에서는 이 책을 지난해 4월 필자가 한일관계 막후 60; 최서면에게 듣다(1·2, 나남출판사)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해 최 원장의 지인과 연구자들에게 배포했다(비매품).

 

일본 체류 시절 후쿠다 다케오 총리와 이야기를 나누는 최서면 원장

일본 체류 시절 후쿠다 다케오 총리와 이야기를 나누는 최서면 원장

 

 

더 큰 업적은 학문하는 자세와 한일관계를 보는 태도


최 원장과 자주 만났던 필자의 입장에서는 그를 업적이 아니라 태도로 평가하고 싶다. 그는 한국과 일본이 모두 의견을 듣고 싶어 하는 거의 유일한 한일문제 전문가였다. 한일 간의 현안과 해법, 일본을 보는 시각이 다른 사람과 달랐기 때문이다.


최 원장은 어떤 주장을 할 때는 반드시 근거를 댔고, 비판이 두려워 시류에 영합하지 않았으며, 언제나 공부하는 자세를 보여줬고, 유머 감각을 잃지 않았다. 어떤 이는 사실史實에 대한 경외’ ‘상대에 대한 경의’ ‘아프지만 따뜻한 경고’ ‘자만과 폭주에 대한 경계‘4이 몸에 뱄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태도가 그의 입을 거치며 비판은 하되 상대방의 시각도 고려해야 한다.”, “근거는 풍부하게 대고 해석은 최소한으로 한다.”, “일본은 사과한 것만 기억하고, 한국은 사과를 부인한 것만 기억한다.”, “독도가 일본 것이 아니라는 것이 곧 한국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등으로 표현된 것 같다. 그래서 그의 비판은 세다’, ‘약하다가 아니라 아프다는 말을 들었고, 그의 지적은 맞다’, ‘틀리다가 아니라 새롭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정도의 업적이 있다면 유혹도 많았을 터인데, 그는 정계와 공직 진출, 금전적 유혹을 뿌리쳤다. 상사로 모셨던 장면이 정권을 잡고 이런저런 자리를 약속했지만 귀국하지 않았고, 박정희 대통령이 동경한국연구원의 운영비로 뒷돈을 주려고 하자 국회를 통과한 예산으로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1988년 귀국 이후 그가 대외적으로 사용한 직함은 국제한국연구원장이 유일하다. 유명 인사는 업적보다는 감투가 긴 것이 보통인데, 최 원장은 필자가 본 이력서 중 감투보다 업적이 긴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를 너무 미화한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일문제만 나오면 양국 모두에서 강성 발언이 판치는 요즘 그의 유연한 태도가 돋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필자는 최서면에게 듣다라는 번역본의 서문에 나는 이 책을 읽는 독자나 연구자들이 한국과 일본 양국을 평생의 연구 필드로 삼았던 최서면 원장을 편협한 애국자내셔널리즘의 시각에서 재단할 것이 아니라 양국의 공존을 지향했던 교양인인터내셔널리즘의 시각에서 평가하기를 기대한다.”고 썼다. 그의 업적을 미화한다고 뭐라 할 것이 아니라, 미화를 해주고 싶을 만큼의 업적과 태도가 훌륭한 후학이 없는 것이 더 문제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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