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쓰 유적 분포도(김인희 연구위원 제공)
타오쓰(陶寺) 유적은 요임금의 도읍지?
중국은 문명의 기원과 초기국가 형성의 근거로 청동기, 문자, 성터, 대형 종교의식 건축물 등을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 그런데 타오쓰 유적에서 관련 유물이 모두 발견되면서 중국 학계는 타오쓰 유적과 요임금의 도읍지가 관련 있다고 보았고, 이를 통해 요임금은 전설시대를 넘어 신사시대信史時代로 전환되고 있다.
《수경주水經注》의 기록 중 “요임금이 평양平陽에 도읍을 정하였다.”에서 ‘평양’은 지금의 산시성山西省 린펀臨汾으로 추정되며, 이를 근거로 대다수 중국 학자들은 타오쓰 유적지가 요임금의 도읍지라고 한다. 중국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장 왕웨이王巍는 “타오쓰 유적의 존재 시기, 지리적 위치, 유물의 내용과 규모 등을 고찰해보면 요임금의 도읍지와 상당히 일치한다. 따라서 타오쓰 유적은 요임금의 도읍지이자 최초의 ‘중국’으로, 이미 이 시기에 문명 단계에 접어들었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왕전중王震中은 “타오쓰 유적의 도읍지로서의 특성이 요임금 도당씨陶唐氏와 부합하므로 요임금의 도읍지이다.”라고 하였다.
중국 학계에는 타오쓰 유적에 대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대표적 견해가 있다. 저명한 고고학자 쑤빙치蘇秉琦는 “타오쓰 문화는 ‘초기국가’의 형태를 띠고, 시기적으로는 요순堯舜의 전설시대에 해당하며, 최초의 ‘중국’이자 화하華夏 문명의 바탕을 확립하였다.”라고 하였고, 베이징대 고고학과 교수 리보첸李伯謙은 “타오쓰 문화는 초기국가-왕국-제국의 중국 문명 발전 단계에서 ‘왕국단계’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타오쓰 유적 관상대(김인희 연구위원 제공)
타오쓰 유적의 고고학적 의미
최근 타오쓰 유적에 대한 탄소14 연대 측정뿐 아니라 환경 고고학, 동물 고고학, 식물 고고학, 유골 및 DNA 분석, 천문학 등 과학 기술을 동원한 결과 타오쓰 유적은 기원전 2300년에서 기원전 1900년 사이의 것임이 밝혀졌다. 이 유적은 1978년 산시성山西省 샹펀현襄汾縣 타오쓰촌陶寺村 남쪽에서 발견되었다. 유적지는 동서로 약 2,000m, 남북으로 약 1,500m에 달하며, 면적은 280만 제곱미터이다. 이곳은 황하 중류의 중원 지역에서 발견된 룽산문화龍山文化 타오쓰 유형 유적지 중 규모가 가장 큰 유적지로, 화하 문명의 원류 중 하나로 추정된다. 이외에도 산시성山西省 남쪽의 펀허汾河 하류와 훼이허澮河 유역에서도 70여 곳 발견되어, 신석기시대 후기 사회의 성질 및 국가 발생의 역사와 하나라 연구에 있어 중요한 학술 가치를 지니고 있음이 증명되었다.
중원지역 최초의 용 토템(좌)과 타오쓰문화 문자(우)
타오쓰 유적은 최초의 ‘중국’
타오쓰 유적지의 대표적 유물은 최초의 해시계 천문 관측 시스템, 유적지에서 발굴된 최초의 문자,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악기, 중원 지역 최초의 용 토템, 세계 최초의 평기와 건축 재료, 황하 중류 지역 최대의 선사시대 고분군, 선사시대 중앙아시아 지역의 최대 성터, 영국의 스톤헨지보다 500년 빠르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관상대觀象臺 등 여덟 가지로 정리된다.
타오쓰 유적에 궁전구, 수공업구 등이 분포하고 왕릉과 궁성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미 ‘왕권사회’를 형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계급 분화가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각종 예기와 악기에 반영된 ‘예제문명’ 및 최초의 ‘동기군銅器群’이 출토되었으니 초기국가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특징으로 보아 타오쓰에는 초기 부락의 구조와 제도가 형성되어 있었고, 초기국가 출현에 근접하거나 제후국의 형태를 띤 사회 형태였다고 본다. 이러한 이유로 중국 학계는 타오쓰 유적지를 최초의 ‘중국’이자 화하 문명의 바탕을 확립한 것으로 주장한다.
일부로 전체를 설명하다
사마천의 《사기》 중 〈오제본기〉에 등장하는 제왕들의 생존 시기는 엄밀한 의미에서 전설시대에 속한다. 요임금에 관한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 《상서尙書》 〈요전堯典〉에는 도읍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또한 중국 학자들이 요임금의 도읍지를 추정할 때 참고하는 《수경주》는 남북조 시대의 역도원酈道元, 466~527이 주해한 문헌인데, 이는 타오쓰 유적보다 상당히 후대이기 때문에 요임금 관련 기록에 대해 연구자들이 신뢰하지 않는다. 유적과 유물을 근거로 초기국가 단계에 진입했음을 인정할 수는 있으나 후대 기록을 통해 요임금의 도읍지라고 하는 것은 문제다. 이를 증명하려면 단편적인 문자 부호가 아니라 출토 문헌 등의 증거가 필요하다. 일부의 사실로 전체를 설명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사료된다.
중국 학자들은 타오쓰 유적이 전설시대 제왕인 요순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나, 외국 학계에서는 중국 학계의 고고학적 결론에 대해 깊은 회의를 표명한다. 타오쓰 유적이 요임금의 도읍지가 되기 위해서는 아직도 풀어야 할 과제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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