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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와 질투의 여인들 - 가죽주머니에 사람을 담아 물에 던지다
  • 한영화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

무릅을 꿇고 남자 앞에 공손히 앉아 있는 고구려 여인(각저총 벽화)

무릎을 꿇고 남자 앞에 공손히 앉아 있는 고구려 여인(각저총 벽화)

 

고구려 사회에서 가장 큰 범죄는 모반죄였다. 반란을 꾀한 자에 대한 처벌은 많은 사람들을 모아 횃불로 지지게 하고, 온몸이 짓무른 뒤에 참수할 뿐만 아니라 그 가속은 모두 노비로 삼는 것이었다. 적에게 항복하거나 전쟁에서 패배한 자, 살인이나 겁탈을 저지른 자 역시 중죄로 목을 베는 참형에 처하였지만, 참형에 처하기까지의 과정을 본다면 모반죄만큼 가혹하지는 않다. 이 밖에 고구려에서 사형과 관련된 처벌은 산 채로 구덩이에 넣어버리거나, 가죽주머니에 넣어 바다(혹은 강)로 던져버리는 방법도 존재했다. 제사의 희생으로 사용할 돼지를 상하게 했던 관리가 산 채로 구덩이에 던져졌고, 왕비와 왕의 총애를 다투던 관나부인은 가죽주머니에 넣어져 바다로 던져졌다. 특히, 관나부인의 경우 투기죄로 인한 처벌이었다. 부여에서도 부인의 투기는 몹시 꺼리는 죄로 죽일 뿐만 아니라 산에 시신을 방치하였다는 것을 본다면 고구려나 부여에서 투기는 가벼운 죄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관나부인은 어떻게 하다가 죽음을 맞이했고 그 처벌의 의미는 무엇일까?

 

치장을 하고 외출에 나선 고구려 여인들(수산리 벽화)

치장을 하고 외출에 나선 고구려 여인들(수산리 벽화)

 

질투는 나의 힘’: 일상다반사

  삼국사기에 의하면 2대 유리왕(재위 B.C.19-A.D.18)은 송양의 딸을 왕비로 삼았지만, 왕비가 죽자 화희와 치희라는 여인을 맞아들였다. 하지만 두 여인은 왕의 총애를 다투며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결국 왕이 없는 사이에 다투다가 치희가 친정으로 돌아가버렸다. 이때 왕이 치희를 쫓아갔다가 혼자 돌아오며 읊조린 노래가 황조가였다. 다른 한편, 산상왕(재위 197-227)은 형이었던 고국천왕(재위 170-197)이 죽자, 형수였던 왕후 우씨를 자신의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하지만 후사가없어 고민하던 중, 주통촌의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게 된다. 왕후 우씨가 이를 알고 질투하여 주통촌의 여인을 죽이려 하였지만, 왕의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알고 더 이상 어찌하지 못하였고, 결국 주통촌의 여인은 소후(小后)가 되었다. 주통촌의 여인은 왕후 우씨로부터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었지만 왕의 아이를 가지게 되어 훗날 동천왕이 된다 - 화를 면한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왕의 총애를, 권력을 오로지 소유하겠다는 열망은 다반사지만, 심각한 사건을 발생시키면 죄가 되어 처벌된다. 그것이 바로 투기죄다.

 

투기는 죄가 된다: 왕후 연씨와 관나부인의 갈등

  고구려 중천왕대(재위 248-270) 관나부인은 투기죄로 처벌받은 여인이었다. 일찍이 중천왕은 왕위에 즉위하면서 연씨를 왕후로 삼았지만, 아름다운 외모와 9척이나 되는 긴 머리카락의 관나부인을 사랑하여 소후로 삼으려 했다. 왕후 연씨는 관나부인이 왕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될까 노심초사하여 왕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중국의 위나라가 장발을 비싼 값에 구입한다고 하니, 고구려 쪽에서 장발의 미인을 보내 관계를 우호적으로 개선해 보자는 것이었다. 왕후는 관나부인을 염두에 두고 한 제안이었고, 중천왕 또한 이를 알고 있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이때 관나부인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가만히 있다가 해를 입을 것이 명명백백하니 역으로 반격에 나섰다. 왕후가 자신을 무시하고 욕하며, 돌아가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라고 협박해 왔으며, 왕이 출타할 때 반드시 왕후는 자신을 해칠 것이라 거짓으로 왕에게 호소하였다. 이후 왕이 사냥을 다녀오자, 관나부인은 가죽주머니를 보여주며 왕후가 이 주머니에 넣어 죽이려 했다며 울며 호소하였다. 하지만 왕은 그의 말이 거짓임을 알고 오히려 그녀를 가죽주머니에 넣어 바다에 던져버렸다. 결국 왕후 연씨와 관나부인의 왕을 향한 총애 쟁탈전은 투기와 거짓으로 일관했던 관나부인의 죽음으로 마무리되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투기와 관련해서는 부여에서도 가혹한 처벌이 내려졌다. 삼국지동이전 부여조에 의하면 부인(婦人)이 투기하는 것을 몹시 싫어하여, 투기한 부인을 죽일 뿐만 아니라 시신을 산 위에 썩을 때까지 두었다. 원래 부여에서는 상()을 치르는 데 시신을 오래 두는 것을 영화롭게 여겼고, 여름에는 얼음을 이용하는 등 시신을 보존함으로써 영혼을 보호하는 것이라 사고하였다. 그러므로 시신의 방치는 이러한 부여의 죽음관과 반()하는 것으로, 육체를 보존하지 못한 부인은 죽어서도 영혼의 안식을 얻지 못하는 가혹한 형벌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관나부인 역시 산 채로 바다에 던져짐으로써 안정된 영혼의 안식처를 잃게 된 것이었다.

 

(), 물의 정화의식: 영혼의 안식을 뺏다

  형벌은 본래 공동체의 질서나 관습에 가해진 더러움, 곧 신에게 자행된 모독을 씻어 깨끗이 제거하는 불제(祓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의 초기 문자인 법()은 형벌을 공평하게 내리는 것은 물[]과 같고, 해치[]는 정직하지 못한 자를 제거[]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특히 ()’부정을 씻는다는 의미가 있어 물에 유기하는 모양이라고도 해석된다. , 죄지은 자를 물에 유기하는, 씻어내는 방식인 것이다.

  또한 는 가죽 부대 안에 해치[]’를 넣은 모양으로, 신에 대한 더러움을 해치에게 옮겨 행해진 고대의 불제로 해석되기도 한다. 관나부인이 가죽주머니에 넣어져 바다에 유기된 것은 결국 관나부인이 행한 죄로 인해 이를 씻어내는 방식으로 처벌이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물과 관련된 정화의식은 이뿐만이 아니다. 백제나 신라에서도 강물로 던져지는 형벌이 있었다. 백제 무령왕대(재위 501-523) 반란을 일으켰던 백가는 참형을 당한 후, 백강에 던져졌고, 신라 태종무열왕대(재위 654-661) 모반죄를 범한 검일은 사지를 찢기고 강물에 던져졌다. 그야말로 그 시신을 강물에 던짐으로써 땅에 매장하지 못하게 하여 영혼의 안식처를 빼앗는다는 의미와 함께 물에 의해서 더러움을 씻어낸다라는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백제나 신라에서 모반죄가 강물로의 유기를 통한 정화였다면, 고구려에서 관나부인이 바다로 던져진 것은 그 사회에서 투기죄가 이에 준하는 중대한 죄였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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