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장군총
예로부터 인간은 삶 너머의 삶에 관심을 보였고, 그 결과 영혼 혹은 혼령이라는 존재가 상정되었다. 아울러 한 사회가 죽음을 마주하는 광경은 상장의례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는 고구려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고구려인이 사후 거처에 대한 인식과 상장의례에서 드러나는 면모를 통해 그들이 죽음을 대하는 방식을 헤아릴 수 있다.
태왕릉 가형석곽 복원도. 이 석곽 안에 관이 있었던 것을 통해
고구려에서 무덤을 죽은 이의 거처로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후의 거처, 무덤과 하늘
한국 고대에 죽은 이의 거처로 주목한 곳 중 하나는 무덤이다. 신라 김후직의 혼령이 무덤 속에서 왕에게 간언하였고, 미추이사금과 김유신의 혼령이 각자의 무덤 안에서 소통하였다고 믿은 것은 그곳을 죽은 이의 생활 공간으로 여긴 데서 비롯된 전승이다. 또 동옥저에서 시신을 덧널(槨)에 매장한 뒤 솥에 쌀을 담아 곁에 두는 풍습이나 신라 고분에 솥이 묻힌 것은 무덤에 거주하는 죽은 이를 위해 양식을 마련해 둔 것이다.
신포시 절골터 금동판 명문. 고구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왕의 신령이 도솔천에 올라가 미륵을 뵙기를 원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고구려도 다르지 않았다. 고국천왕의 혼령이 왕후 우씨에게 분노해 자신의 무덤에 소나무를 심게 했다거나 서천왕릉을 도굴하려던 모용외가 사고를 당한 뒤 그곳에 신이 있을까 두려워했다는 전승은 무덤을 사후의 거처로 여긴 결과이다. 이 점은 고고학적으로도 확인된다. 국내 도읍기 왕릉에서 매장부가 가옥 모양(家形)으로 조성되고 청동제 부뚜막이 두어짐과 아울러, 담장을 비롯한 다양한 부대시설을 갖춘 능원이 마련된 것 또한 묘주가 무덤에서 현세와 같은 생활을 이어 간다고 여긴 결과다.
서대총 전경. 후장 풍속이 성행하던 때 만들어진 서대총은 한 변의 길이가 50m를 훌쩍 넘는 거대한 규모이고,
정연한 능원을 갖추었는데, 왕릉으로 추정된다.
물론, 죽은 이가 머무는 곳이 무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5세기 초에 만들어진 「광개토왕비문」에서 시조 추모왕, 즉 주몽의 죽음을 일컬어 “하늘로 올라갔다” 하고, 고분벽화 가운데 천상 세계를 그린 사례가 상당한 것을 보면, 하늘도 혼령이 돌아갈 곳으로 상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처음에는 무덤을 더욱 중시하였던 것 같고, 그 뒤 불교의 영향 등으로 혼령이 육체를 벗어나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는 믿음이 강고해짐에 따라 무덤의 중요성은 점차 약해졌다고 생각된다. 벽면을 가득 채운 연꽃무늬 벽화나 왕의 신령이 도솔천으로 올라가기를 바라는 「신포시 절골터 금동판 명문」은 그러한 변화상을 잘 보여준다.
미창구장군묘 벽화. 불교적 세계관이 확산된 결과, 벽면 사방을 연꽃으로 가득 채운 벽화도 등장하였다.
삶과 죽음의 교차로, 상장의례
대략 3세기 후반의 사정을 전하고 있는 『삼국지』 동이전에 따르면, “사람이 죽을 시 금은과 재물을 모두 써 후히 장사하며, 돌로 봉분을 쌓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벌려 심었다”라고 한다. 또 『수서』 동이전에서는 “장사할 때 북치고 춤추며 악기를 연주하였다” 하는데, 이는 예전부터 행해지던 풍속이 훗날 기록되었다고 여겨진다. 후장이란 부장품의 많고 적음뿐 아니라 상장의례의 길고 성대한 과정, 대규모 잔치, 장대한 무덤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러한 점에서 보면 막대한 물량을 투입하여 장례를 치르고 거대한 적석총을 만들었으며, 식수 행위를 통하여 주변을 꾸미고 시끌벅적하게 죽은 이를 보내던 고구려에서는 후장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풍속은 계세사상(繼世思想)과 연관된다. 계세사상은 사람이 죽어도 현세와 같은 물질적 생활을 계속한다는 사고이다. 이때 혼령의 거처로 중시된 것이 무덤이다. 그렇기에 거대한 무덤을 조성함과 아울러 후히 장례를 치른 것이다. 다만, 불교가 퍼져 생전의 공과에 따라 내세의 삶이 결정된다고 여기는 믿음이 강해짐에 따라 그러한 기조에도 변화가 생겼다. 다시 말해 박장 풍조가 부상한 것이다. 5세기 이후 왕릉의 규모가 이전보다 작아지고, 부장품에서 후장과의 관련성이 약해졌다. 또, 후기의 사정을 전하는 『수서』 동이전에서 “매장이 끝나면 장례에 참여한 사람들이 죽은 이가 생전에 썼던 물품을 가지고 간다”라고 전하고 있다. 사고관의 변화에 발맞추어 죽음을 마주하는 모습도 달라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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