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신문』 발간 130주년을 기념하다
‘최초’의 순한글·민간 발행 신문
1957년부터 매년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기념하고 있지만 그 유래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날이 ‘신문의 날’로 제정된 것은 1896년 4월 7일『독립신문』이 창간된 데서 비롯되었다. 2026년 올해는 『독립신문』 창간 13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기도 하다.
비록 ‘신문의 날’과 『독립신문』의 연관성을 잘 모른다 하더라도, 한국사를 공부한 적이 있다면 『독립신문』이라는 이름과 함께 이 신문을 수식하는 ‘최초’라는 단어가 어렴풋이 떠오를 것이다. 그렇다면 『독립신문』에 붙는 ‘최초’는 어떤 의미일까? 사실 한국 최초의 근대 신문은 『한성순보』로 창간 순서만 놓고 보면 ‘최초’라는 타이틀을 차지하지 못한다. 그러나 『독립신문』은 여러 측면에서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최초의 민간 신문, 최초의 순한글 전용 신문, 최초의 띄어쓰기 시도, 조선인이 발행한 최초의 영자 신문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처럼 『독립신문』을 수식하는 여러 ‘최초’는 ‘처음’이라는 뜻을 넘어서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신문 기사를 순한글로 쓰고 띄어쓰기를 사용해 가독성을 높인 것은, 전근대 사회에서 특정 계층이 독점하던 정보와 지식을 보다 많은 대중에게 전파하고 공유하려는 신문 발행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독립신문』 창간호 논설은 신문 발행 목적이 조선의 민중을 대변해 의견을 개진하고, 정부의 정책 등을 대중에게 알려 서로 소통하게 하는 데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 이를 위해 성별이나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누구나 신문을 읽을 수 있도록 순한글로 기사를 작성하고, 띄어쓰기를 사용했던 것이다. 또 영문판을 함께 발행한 것은 조선의 정황을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에도 정확히 알리기 위해서였다. 『독립신문』이 무엇보다 중시했던 것은 신분이나 성별과 관계없이 누구나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알게 함으로써 정부와 민중이 서로 소통하는 공론장을 만드는 일이었다.
『독립신문』 1896년 4월 7일 자, 창간호 논설
『The Independent』, 1896년 4월 7일 자, 창간호 논설
『독립신문』 발행을 주도한 인물은 잘 알려진 대로 서재필이다. 그는 1884년 갑신정변에 가담했다가 실패하자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10여 년간 망명 생활을 했다. 1894년 갑오개혁이 추진되고 정변 가담자에 대한 사면이 이루어지자, 서재필은 1895년 12월, 귀국했다. 그는 귀국 직후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었지만, 새로운 정부에 참여하기보다 신문을 발행해 민중을 ‘계몽’하고자 했다. 하지만 신문 창간은 서재필 한 사람만의 의지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서재필과 마찬가지로 신문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내부대신 유길준을 비롯한 갑오정권 역시 신문 발간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1896년 2월, 아관파천이 일어나면서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고, 유길준도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신문 창간은 중단될 위기에 놓였다. 다행히 새로 들어선 박정양 내각도 신문 창간을 긍정적으로 여겨 창간 비용을 지원하고, 정동에 있던 정부 건물을 신문사 사옥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서재필은 일본에서 인쇄기와 한글‧영문 활자 등을 구입하고, 자신이 사장 겸 주필을 맡아 1896년 4월 7일『독립신문』을 발행했다. 창간 초기에는 1~3면을 국문판으로, 4면을 영문판으로 편집하였고 일간신문을 지향했다. 하지만 한동안은 화‧목‧토요일, 주 3회 격일로 발행하였다.
영문판 발행을 통한 세계와의 소통
『독립신문』은 ‘한글판과 영문판을 동시에 발행한 ‘최초’의 신문이었다. 비슷한 시기 조선에서 발행된 영문 잡지 및 신문으로는 1892년 『코리안 리포지토리(Koraen Repository)』, 1901년 헐버트가 발행한 『코리아 리뷰(Korea Review)』, 1904년 『대한매일신보』의 영문판인 『코리아 데일리 뉴스(Korea Daily News)』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매체는 선교사 등 외국인이 중심이 되어 발행한 것이다. 따라서 『독립신문』 영문판인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는 조선인이 주도하여 발행한 최초의 영문판 신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영문판은 서재필, 윤치호, 헐버트 등이 담당하다. 이들은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세계에 알리고, 국제 사회에 조선의 상황을 정확히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신문 발행 초기에는 전체 4면 중 마지막 1면만 영문판이었지만, 1897년 1월부터는 별도의 4면짜리 신문으로 분리하여 발행할 만큼 비중이 커졌다. 또한 내용 면에서도 단순히 국문판 기사를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 사회에 조선의 상황을 정확히 알리고, 국가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기사를 실었다.
서구 문화 수용, 광고를 통한 근대 문물의 소비
『독립신문』은 조선이 서양 여러 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문명개화국, 자주독립국이 되는 것을 시대적 과제로 설정하였다. 또한 조선 민중이 문명개화국의 ‘국민’으로 거듭나게 하기 위해서는 ‘계몽’과 신교육을 통해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수용하고 익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아가 『독립신문』은 새로운 지식과 기술뿐 아니라 음식과 의복 같은 생활양식의 변화 역시 문명개화의 중요한 요소로 인식했다. 『독립신문』은 “김치와 밥을 버리고 우육과 브레드를 먹게 되며 말총으로 얽은 그물을 머리에 동이지 아니하고 남에게 잡혀 끄들리기 쉬운 상투를 없애고 세계 각국 인민과 같이 머리부터 우선 자유를 얻게 될 터”라는 일상생활의 서구화를 문명 개화의 한 모습으로 제시했다.
『독립신문』 1896년 10월 10일 자, 논설
문명개화를 이루기 위해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문명개화국이 된다면 조선의 식문화와 의복문화도 서양식으로 바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또한 『독립신문』은 다양한 서양 물품 광고를 게재하여 대중이 근대 소비 문화를 접하고 익히도록 했다. 신문의 광고면에는 세창양행과 같은 무역상사가 수입해 온 각종 서양 물품을 소개하고 구매를 권하는 광고가 등장했다. 이와 함께 새로운 상점이나 근대식 병원의 개업 소식, 신간 서적 출판 광고 등도 게재하였다. 『독립신문』은 이러한 상업 광고를 통해 경영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는 한편, 대중이 자연스럽게 근대적 생활양식을 접하도록 유도했다.
『독립신문』 1897년 11월 16일 자 광고
세창양행에서 품질 좋은 금계랍(말라리아 특효약)을 수입하여 도매 가격으로 판매한다는 광고가 보인다.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가벼움’, 문명개화를 이루려는 ‘무거움’
창간 직후 『독립신문』은 정부 정책을 대중에게 전달하고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며 정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또한 신문 발행의 가장 큰 목적인 대중 ‘계몽’을 위해 신지식과 정보, 국내외 소식 등을 충실히 전달하는 근대 인쇄매체의 역할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독립신문』과 정부의 우호적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보수파 대신들이 권력을 잡고 개혁에 반대하는 정책을 추진하자 『독립신문』은 이를 강하게 비판하였고, 정부는 신문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독립신문』은 폐간 위기에 처하였지만, 서재필이 추방되는 선에서 일단락되었다. 1898년 5월부터는 윤치호가 뒤를 이어 주필을 맡아 발행을 이어갔다. 그러나 독립협회 사건으로 윤치호마저 신문사를 떠나면서, 1899년 1월부터는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가 한동안 주필을 맡았고, 1899년 6월부터는 영국 선교사 엠벌리(W. H. Emberley)가 사장 겸 주필이 되었다. 하지만 독립협회가 해산된 뒤『독립신문』에 대한 정부의 탄압은 더욱 거세졌고, 결국 1899년 12월 4일 자를 마지막으로 폐간되었다.
『독립신문』은 조선인이라면 누구나 쉽게 소식과 정보를 접하고, 또 의견을 표출할 수 있는 최초의 민간 신문으로서 국내외 공론장의 역할을 담당했다. 민중을 ‘문명개화’를 함께 이루어 나갈 능동적 주체라기보다는 ‘계몽’의 대상으로 바라본 한계도 있었다. 그럼에도 『독립신문』은 민권의식을 깨우고 정치사상을 보급하는 데 큰 획을 그었다. 정부의 탄압 속에서도 끝까지 목소리를 냈던 이 신문은 1899년 폐간될 때까지 근대 공론장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