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회담 청구권 교섭 핵심 자료집』 I-V
1965년 체제, 그 기원의 기록을 다시 펼치다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는 전후 동아시아 질서의 거대한 전환점의 하나였다.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는 여전히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강제동원 문제, 일본군‘위안부’ 문제, 원폭 피해자 및 사할린 한인 문제 등은 지금도 한일관계를 뒤흔드는 핵심 변수로 작동하고 있다.
‘이 쟁점들이 왜 수십 년이 지나도록 해소되지 않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결국 협정이 체결되던 당시의 현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무엇이 논의되었고, 무엇이 의도적으로 남겨졌으며, 어떤 타협이 이루어졌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야말로 현재의 갈등을 푸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재단이 발간한 『한일회담 청구권 교섭 핵심 자료집』 I~V는 바로 이 근원적인 질문에 답하기 위해 기획된 방대한 사료 복원 프로젝트의 결실이다.
13년 8개월에 걸친 ‘종이 위 전쟁’, 그 이면의 논리를 복원하다
한일 청구권 교섭은 식민지 지배의 성격과 국가 책임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부딪힌 전쟁터였다.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불법 강점이라는 인식에 기초하여 피해에 대한 배상을 요구했고, 일본은 이른바 ‘역청구권’과 ‘식민지 시혜론’을 내세우며 식민 지배의 부당성 자체를 부정했다.
이 자료총서의 전반부인 제1권과 제2권은 제1~7차 회담에 이르는 긴 교섭의 흐름을 촘촘히 따라간다. 특히 ‘대일청구요강안’을 토대로 전개된 실무교섭 과정은 당시 우리 정부가 무엇을 청구권의 핵심으로 보았는지 선명하게 보여준다. 자료집에 수록된 회의록과 양국 내부 문건을 살펴보면, 오늘날 과거사 갈등의 출발점이 어디에 있는지, 왜 양국 간 법적 해석의 평행선이 지금까지 이어지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오늘날 우리 정부의 외교 정책을 구상하는 데에도 여전히 유효한 자료다.
정치적 타결의 막전막후와 ‘전략적 모호성’의 탄생
청구권 문제가 법리적 논쟁을 넘어 정치적 타결 국면으로 전화되는 과정을 추적한 것은 이 자료집이 지닌 또 다른 학술적 가치다. 제3권과 제4권은 1962년 전후의 급박했던 정치 교섭 과정을 집중 조명한다. 당시 한국 정부는 경제개발을 위한 자본과 기술 도입이 절실했던 반면, 일본 정부는 안보와 경제 진출이 관심사였다. 양국 정부 사이의 복잡한 수싸움이 회의록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잘 알려진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비롯한 고위급 회담의 회의록 등은 청구권 자금의 성격을 ‘배상’이 아닌 ‘경제협력’으로 치환하려 했던 일본 측의 전략과 이를 실용적으로 수용해야 했던 한국 측의 고뇌를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전략적 모호성’은 당시의 교착 상태를 뚫어준 외교적 윤활유였지만, 동시에 오늘날 해석의 차이를 낳은 불씨가 되기도 했다. 이 자료총서는 협정의 문언 뒤에 숨겨진 이러한 ‘의도된 생략’과 ‘정치적 결단’ 과정을 입체적으로 복원해 냄으로써 한일관계의 명암을 동시에 직시하게 한다.
국가 간 합의 뒤에 가려진 개인의 고통과 인권
최근 발간된 제5권은 이 자료총서의 정점이자 재단이 지향하는 연구의 방향성을 가장 잘 보여준다. 제5권은 청구권 교섭 과정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졌으나. 끝내 미완의 과제로 남았던 구체적인 과거사 현안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실태조사 기록을 비롯해 일본군‘위안부’, 원폭 피해자, 사할린 억류 한인, 그리고 B·C급 전범으로 몰린 한인들의 탄원 기록까지, 국가 간의 거대 담론 속에 가려져 있던 ‘개인의 삶’을 전면에 배치했다.
그동안 한일협정에 대한 논의는 흔히 ‘국가 대 국가’로서 청구권 등의 문제가 해결되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왔다. 그러나 이 자료총서는 그 이면에 수많은 피해자의 피눈물 나는 삶과 회복되지 못한 권리가 놓여 있었음을 사료를 통해 보여준다. 피해 규모 산정에 활용된 통계자료나 귀국을 열망하는 서신들은, 이 협정 뒤에 인간의 존엄과 고통을 둘러싼 처절한 기록이 있었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동진회 자료
증거에 기반한 공동의 이해, 미래를 향한 첫걸음
이 자료총서는 과거를 토대로 오늘의 한일관계를 다시 정립하고, 내일을 예견하는 ‘살아있는 참고서’라 할 수 있다. 역사를 둘러싼 소모적인 감정적 공방과 정치적 수사를 넘어, 이제는 객관적인 기록에 기반한 대화가 필요하다. 사료를 갈무리하고 해제하는 작업은 지난한 과정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의 축적과 공유가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정한 화해의 길을 찾을 수 있다. 이 자료총서가 학계와 정책 현장, 그리고 역사를 바로 알고자 하는 시민들에게 의미 있는 길잡이가 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