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만강 유역은 지금도 변경, 경계의 공간이다. 조선시대에 이 지역은 왕조의 발상지로 인식되었지만, 동시에 변방의 울타리를 뜻하는 번리(藩籬)로 불렸다. 그곳에 거주하는 여진인들은 번호(藩胡)라고 불렸다.
재단 교양총서『조선의 경계인 여진족』은 조선 건국에 참여한 여진인들을 소개하고, 조선이 두만강 유역을 어떻게 번리로 인식했는지, 또 번호라 불리던 여진인들과 이주한 조선인들의 관계와 삶이 어떠했는지 살펴본다. 아울러 만주 지역 최대의 히트 상품이었던 초피(貂皮), 곧 담비가죽을 매개로 나타난 사회경제적 변화를 조명하고, 두만강 유역 여진인들의 반란과 이탈, 나아가 누르하치의 두만강 유역 여진 통합 속에서 번호라 불리던 여진인들이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도 추적한다.
『조선의 경계인 여진족』
조선 건국에 참여한 여진족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선조들은 몽골 침략기에 전주에서 강원도 삼척으로, 다시 두만강 유역으로 이동한 뒤 함경도 지역에 정착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성계의 선조들은 자연스럽게 여진인들과 교류하게 되었고, 가문이 성장하면서 고려 유민과 여진인들은 그들의 군사적 기반이 되어 갔다.
고려 말 신흥 무인 세력으로 성장한 이성계 역시 어려서부터 뛰어난 무용(武勇)으로 여진인들을 복속시켰다고 전해진다. 이성계와 의형제를 맺은 것으로 알려진 이두란(이지란)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성계가 왜구와 홍건적을 물리치면서 동정서벌(東征西伐)할 때에도, 몽골군과 싸우며 요동 정벌을 할 때도, 위화도 회군을 할 때도, 이 여진인들은 이성계를 따라 전장을 누볐다.
조선 건국 후 즉위한 이성계는 자신에게 종군(從軍)했던 여진인 추장들을 포상하고 조선의 관직을 내렸다. 또한 이두란과 그의 아들들을 개국공신으로 삼았다. 이처럼 조선 건국은 고려의 변방이라고 할 수 있는 함경도 지역을 기반으로 전개되었고, 이성계의 군사적 기반 중 하나였던 여진인들은 조선 건국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이지란 초상(경기도박물관)과 이지란의 영정을 봉안한 경기도 남양주지 진겁읍 용정리에 있는 청해사(靑海祠)(한국학중앙연구원)
평화·공존의 공간, 두만강 유역
세종은 옛 조상의 땅을 회복한다는 명분으로 두만강 유역에 6진을 설치하였다. 이것은 이성계의 선조들이 두만강 유역에 이주했던 것과 여진인들을 번리라고 인식한 것에 바탕을 둔 조치였다. 그러나 6진을 설치했다고 해서 이곳에 거주하던 여진인들을 두만강 밖으로 모두 내쫓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삶의 터전을 잃은 여진인들이 조선을 침입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은 6진 지역에서 조선인과 여진인이 공존할 수 있도록 새로 쌓은 성 안에는 조선인을, 성 밖에는 여진인을 거주하게 했다. 이에 따라 성 밖에 사는 여진인을 가리켜 성 밑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에서 ‘성저야인(城底野人)’이라 부르게 되었다. 성저야인은 자연스럽게 조선의 번리가 되었고, 이들은 조선으로부터 생필품을 공급받았고, 추장들은 조선의 관직을 받아 정치적, 경제적 혜택을 누렸다.
조선의 영향을 받은 여진 번리는 점차 성장하여, 16세기에 이르면 두만강 유역에 번호(藩胡) 부락이 형성되었다. 이들 번호 부락은 만주 지역의 특산품인 담비 가죽을 조선에 공급하고, 조선으로부터 우마(牛馬)와 철물(鐵物)을 공급받아 점차 농경 기술을 발전시켜 갔다. 조선과 명에서 만주 지역의 담비 가죽이 유행하자 함경도에는 상인들이 몰려들었고, 변방을 지켜야 할 조선의 관리들마저 담비 가죽 무역에 뛰어들기도 했다.
헤이룽강 유역의 검은담비(강원대학교 김창호)와 러시아의 검은담비 기념우표(서대문자연사박물관)
한편 6진 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은 변장과 수령들의 가혹한 수탈을 피해 여진 지역으로 도망하는 일이 빈번했다. 세금도 없고 가혹한 수탈도 없었으며, 상대적으로 풍요롭게 보이는 여진 땅은 조선인에게 살기 좋은 곳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조선인들이 여진인의 집에 가서 일하기도 하고, 조선인과 여진인이 부모와 자식 같은 관계를 맺기도 했다. 조선인과 여진인 번호는 거주 공간이 분리된 변경인 또는 경계인이었지만, 사회·경제적으로 서로 의지하며 평화와 공존의 공동체를 만들어 갔다.
여진인들의 반란과 이탈, 여진 통합과 경계인의 삶
조선인 수령들은 담비 가죽을 매개로 번호까지 수탈하였다. 지나친 수탈은 여진인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켰고, 마침내 ‘니탕개(泥湯介)의 난’과 같은 번호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니탕개 등은 여진인 1만∼3만 명을 모아 조선의 6진 지역을 침입하였는데, 이러한 번호들의 반란은 임진왜란 이후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번호들의 반란은 여진의 사회·경제적 역량이 6진 지역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북관유적도첩』 중 「수책거적도(守柵拒敵圖)」(고려대학교박물관)
1587년(선조 20) 이순신이 조산만호(造山萬戶)로 녹둔도의 둔전을 관장하였는데, 가을 추수 무렵 여진인들이 약탈하려 하자,
이순신이 목책을 방어하여 농민을 보호하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물론 만주 지역의 여진인 사회에서 두만강 유역의 번호 부락들만 발전한 것은 아니었다. 16세기 만주 지역에는 국가 수준으로 성장한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이 있었고, 이들은 여진 부족의 통합을 두고 서로 경쟁하였다. 이들에게 두만강 유역의 번호 부락 흡수는 여진 통일을 위한 필수 과제였다.
먼저 건주여진의 누르하치가 두만강 유역의 번호 부락을 간접적으로 복속시켰고, 이어 해서여진의 부잔타이가 군사적인 복속을 시도하였다. 결국 누르하치의 군사와 부잔타이의 군사가 조선 경내인 종성진 오갈암(烏碣巖)에서 전투를 벌였고, 이 전투에서 승리한 누르하치가 두만강 유역의 번호들을 차치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누르하치는 여진을 통합하고, 후금을 건국하였으며, 조선과 명 연합군의 공격을 격퇴하였다.
이 과정에서 두만강 유역에 거주하던 조선의 번호 소롱이(小弄耳)가 부잔타이의 사절로, 다시 누르하치의 사절로 조선에 파견되었다. 조선의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소롱이는 조선과 명 연합군의 패전 이후 최일선의 외교관으로 변모하였다. 조선과 여진 사이의 경계인이었던 소롱이는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그 위치와 역할 또한 달라졌다. 소롱이로 대표되는 두만강 유역의 여진인들은 이처럼 시대의 변화 속에서 변경인이자 경계인의 삶을 보여주었다.
『신충일필 건주기정도기(申忠一筆 建州紀程圖記)』(국립중앙박물관)
1595년(선조 28) 신충일이 왕명을 받아 건주위 누르하치를 방문하였을 때 왕복한 노정과 당시의 견문,
누르하치의 거성(巨城)을 그린 견문록이다.
오늘날 우리는 급속하게 변화하는 국제정세 속에 살고 있다. 세계 곳곳에 우리 민족이 흩어져 살고 있고, 교통의 발달로 해외까지 자유롭게 오갈 수도 있다. 이제 변경이나 경계라는 인식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지만, 각 국가와 국가 사이, 세력과 세력 사이, 또는 사상과 문화 사이에는 여전히 ‘경계’는 존재한다. 그리고 그 경계 위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