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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편화되고 간소화된 타이완 교과서 속 한국 역사
동북아포커스 2 파편화되고 간소화된 타이완 교과서 속 한국 역사 한국사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타이완 학생들 타이완 사람들은 한국에 대해 낯설지 않다. 삼성 휴대폰, 불고기, 패션의류 그리고 최근 인기리에 방영된 한국드라마는 사람들의 일상이 되었다. 그러나 질문을 바꿔 “한국 역사와 문화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라고 하면 그 대답은 자명할 것이다. 타이완 교과서에서 한국사에 대한 서술은 오랫동안 매우 소략했다. 아마도 중국사를 서술하는 과정에 수당제국의 고구려 정벌을 잠깐 언급한 정도일 것이다. 그나마 비교적 자세히 다루고 있는 한국전쟁의 경우에도 한 페이지가 되지 않는 적은 분량이다. 2019년 새로운 ‘교육과정요강’이 발표되었는데, 원래대로라면 한국사 서술에 변화가 있어야 했다. 한국사를 고등학교 역사교과서 중 「중국과 동아시아」 단원에 포함시켜 서술했다. 이번 교과서 개정은 큰 진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고등학생들이 수업시간에 정식으로 한국사를 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교과서에 한국사에 대한 서술이 포함되었다는 것은 한국사에 대한 이해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난 지금, 결과를 보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듯하다. 교사들은 학생들이 한국사에 대한 단편적인 역사지식을 익힐 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시험을 보기 위해 기계적으로 외우기 때문에 한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심지어 일부 교사는 학생들이 한국사를 사소하게 여겨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였는가?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린츠수(林慈淑) 타이완 둥우대학(東吳大學) 교수
『중국 소재 고구려 유적과 유물』 10권 완간, 15년의 기록
주목! 이 연구 『중국 소재 고구려 유적과 유물』 10권 완간, 15년의 기록 우리의 손길이 닿기 힘든 고구려 유적 마침내 지난 연말에 『중국 소재 고구려 유적과 유물』 10권이 완간되었다. 2007년에 과제를 시작했으니 15년간의 장기 레이스를 마무리한 셈이다. 그사이 공동연구원은 모두 60세 전후의 장년이 되었고, 연구보조원들도 박사학위를 취득한 중견연구자로 성장했다. 연구팀원들이 이 작업과 함께 연구 인생의 절반 내지 전부를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 동북지역에 산재한 고구려 유적과 유물은 고구려사를 연구하고 한국사를 체계화하는 데 매우 중요할 뿐 아니라, 모든 인류가 공유해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이들 유적에 대한 조사와 연구는 20세기 전반에는 일본학자, 1950년대 이후에는 중국학자들이 주도했다. 20세기 전반에 이들 유적을 학문적으로 연구한 한국학자는 거의 없었고, 해방 이후에는 남북분단과 냉전체제로 인해 접근조차 불가능했다. 1992년 한중 수교로 한국학자들도 이 지역의 고구려 유적과 유물에 접근할 길이 열렸지만, 중국의 규제로 직접 조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한국학자들로서는 종래 일본학자나 중국학자들이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학문적인 연구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각종 조사보고서나 연구논저는 여러 간행물에 산재하거나 절판된 경우가 많아 연구자나 역사에 관심 있는 일반인들이 자료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여호규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교수
임시정부, 광복을 맞이하다
임시정부, 광복을 맞이하다 충칭(重慶)에서 임시정부의 활동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는 1932년 윤봉길의 상하이, 훙커우(虹口) 의거 직후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 등을 거쳐 1940년 9월 충칭에 정착했다. 충칭은 중국 국민당 정부가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임시 수도로 정한 곳이자, 교통의 요지였다. 임시정부는 충칭에 정착한 이후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당(黨, 한국독립당)·정(政, 임시정부)·군(軍, 한국광복군) 체제를 정비한 임시정부에서는 독립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기존 국무위원제에서 주석 지도체제로 정부 조직을 개편했다. 1941년 김성숙의 조선민족해방동맹과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 등 좌익 세력도 임시정부에 참여해 좌우 합작정부를 구성하게 되었다. 1942년 7월 조선민족혁명당의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어 광복군 제1지대로 개편되었고, 10월 임시의정원 의원 선거를 통해 좌익 계열 인사가 참여했다. 1940년대 좌우합작을 추진하면서 한국광복군을 토대로 미국, 영국과 연합작전을 수행했고, 연합국을 상대로 독립 외교를 전개했다. 그 결과 1943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개최된 미국·영국·중국 정상회의에서 “적당한 절차를 거쳐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결의를 채택하게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김국화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
하와이의 사진신부, 천연희
근현대 코리안 디아스포라 하와이의 사진신부, 천연희 사진신부 천연희, 하와이로 가다 천연희(1896 ~1997)는 나이 스무 살이 되던 해인 1915년 6월 20일에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고 있던 길찬록(1866 ~1954)의 사진신부로 호놀룰루항에 도착했다. 그녀는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나 비봉동에서 살았다. 20세기 초 학교교육을 받는 여성들이 드물었던 시절, 천연희는 여학교를 나왔으며, 집안 형편도 넉넉한 편이었다. 흔히 시골에서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여성들이 사진신부로 팔려갔다는 세간의 소문은 천연희의 경우와는 많이 다르다. 그녀가 사진신부를 자청하니, 학교 선생님들은 깜짝 놀라면서 말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가 사진신부를 결심하게 된 것은 돈이나 결혼이 목적이 아니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자유의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소망 때문이었다고 회고했다. 호놀룰루에 도착한 스무 살 천연희는 이민국에서 입국 심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랑 길찬록을 기다리는 사이, 이민국 청소부가 충격적인 말을 전했다. 그의 남편 될 사람이 쉰 살의 ‘마구리’(마쿨레-하와이말로 늙은이)라는 것이다. 청천벽력과 같은 말을 들은 천연희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가 일주일 후에야 길찬록을 만났다. 스무 살 꽃다운 신부가 다 늙은 쉰 살의 남편을 만나 살려고 하니 억울하고 기가 막혀 탄식과 울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함한희 전북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