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광복을 맞이하다
충칭(重慶)에서 임시정부의 활동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는 1932년 윤봉길의 상하이, 훙커우(虹口) 의거 직후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 등을 거쳐 1940년 9월 충칭에 정착했다. 충칭은 중국 국민당 정부가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임시 수도로 정한 곳이자, 교통의 요지였다. 임시정부는 충칭에 정착한 이후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당(黨, 한국독립당)·정(政, 임시정부)·군(軍, 한국광복군) 체제를 정비한 임시정부에서는 독립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기존 국무위원제에서 주석 지도체제로 정부 조직을 개편했다. 1941년 김성숙의 조선민족해방동맹과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 등 좌익 세력도 임시정부에 참여해 좌우 합작정부를 구성하게 되었다. 1942년 7월 조선민족혁명당의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어 광복군 제1지대로 개편되었고, 10월 임시의정원 의원 선거를 통해 좌익 계열 인사가 참여했다.
1940년대 좌우합작을 추진하면서 한국광복군을 토대로 미국, 영국과 연합작전을 수행했고, 연합국을 상대로 독립 외교를 전개했다. 그 결과 1943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개최된 미국·영국·중국 정상회의에서 “적당한 절차를 거쳐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결의를 채택하게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김국화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