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1월 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환국 기념사진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충칭(重慶)에서 임시정부의 활동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는 1932년 윤봉길의 상하이, 훙커우(虹口) 의거 직후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 등을 거쳐 1940년 9월 충칭에 정착했다. 충칭은 중국 국민당 정부가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임시 수도로 정한 곳이자, 교통의 요지였다.
임시정부는 충칭에 정착한 이후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당(黨, 한국독립당)·정(政, 임시정부)·군(軍, 한국광복군) 체제를 정비한 임시정부에서는 독립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기존 국무위원제에서 주석 지도체제로 정부 조직을 개편했다. 1941년 김성숙의 조선민족해방동맹과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 등 좌익 세력도 임시정부에 참여해 좌우 합작정부를 구성하게 되었다. 1942년 7월 조선민족혁명당의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어 광복군 제1지대로 개편되었고, 10월 임시의정원 의원 선거를 통해 좌익 계열 인사가 참여했다.
1940년대 좌우합작을 추진하면서 한국광복군을 토대로 미국, 영국과 연합작전을 수행했고, 연합국을 상대로 독립 외교를 전개했다. 그 결과 1943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개최된 미국·영국·중국 정상회의에서 “적당한 절차를 거쳐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결의를 채택하게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정문(출처: 국사편찬위원회)
개헌과 국가 건설 구상
임시정부는 해방 후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 어떤 국가를 수립할 것인지 구상하고 준비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를 위해 1941년 11월 국무위원회의 결의를 통해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제정하고, 1944년 제5차 개헌을 통해 「임시헌장」을 공포했다.
건국강령은 1941년 11월 28일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명의로 발표되었다. 제1장 총강(總綱), 제2장 복국(復國), 제3장 건국(建國)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강에서는 고유주권설, 삼균주의(三均主義), 토지국유화가 제시되어 있다. 건국강령은 삼균주의에 입각한 것으로, 1941년에 와서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명의로 공식화되었다. 복국은 독립군이 본토에 진격해 일체를 구축하고 국제적 승인을 얻어 독립운동을 완성한다는 계획이었다. 건국에서는 삼균주의를 구체적으로 규정해 자유권·참정권·수익권을 강조했다.
임시헌장은 1944년 4월 제5차 개헌을 통해 제정했다. 임시헌장은 종전의 헌법인 임시약헌(臨時約憲)을 개정해 “광복운동자를 집중 통일하고 전 민족을 총동원하여 독립을 완성한다”고 밝히고 있다. 임시헌장은 건국강령을 구체화하고 해방에 대비한 법이었다. 또한 주석의 권한을 강화했지만, 부주석제를 신설해 연립정부의 한 축인 민족혁명당 등 좌익 세력을 배려했다. 광복운동자의 특권, 심판원도 설치했다. 가까운 미래의 해방을 염두에 두면서 임시헌장의 전문을 통해 삼균주의와 건국강령의 정신을 계승한 건국이념을 밝혔다. 임시헌장을 통해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자의 결집처이자 중심임을 드러내면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적 순수성과 권위를 강조했다.
임시정부 요인의 환국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국에 항복했다. 일본의 항복소식이 임시정부에 전해진 것은 이보다 앞선 8월 10일이었다. 8월 10일 저녁 8시 충칭의 각 방송과 신문 호외를 통해 항복소식이 알려졌고 임시정부는 이를 통해 항복 소식을 접했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와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은 시안(西安)에서 이 소식을 들었다. 임시정부는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곧바로 국무회의를 열어 대책을 협의했다. 당시 충칭에 있었던 국무위원만 참석한 가운데 국무회의가 열렸다. 이어서 8월 17일 임시의정원 회의도 열렸다. 8월 21일 김구가 시안에서 충칭으로 돌아오자 다시 회의가 열렸다. 회의를 거듭했지만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에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자, 임시정부는 국무회의에서 결의한대로 귀국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임시정부는 귀국에 앞서 국민에게 발표할 성명서와 앞으로 추진할 정책을 마련했다. 일본이 항목문서에 조인한 다음날인 9월 3일 김구의 명의로 「국내외동포에게 고함」이란 제목으로 해방에 대한 임시정부의 견해와 임시정부가 국내로 돌아가 추진할 과제를 밝혔다. 이것은 당면정책이라는 이름으로, 그 내용은 모두 14개 조항이었다.
당면정책 14개조는 임시정부가 국내로 들어가 과도정권을 수립할 때까지 정부로서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었다. 임시정부는 당면정책 14개 조항을 통해 정식 정부를 수립하기까지 과정과 단계를 설정했다. 임시정부가 우선 정부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다음단계로 국민들과 함께 과도정권을 수립한다고 밝혔다. 이후 과도정권의 주도하에 보통선거를 실시해 정식 정부를 수립하되, 정식정부는 독립국가, 민주정부, 균등사회를 원칙으로 수립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임시정부는 환국을 준비하면서 중국 내 한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활동도 했다. 임시정부는 중국 측에 한인에 대한 보호를 요청하면서, 중국뿐만 아니라 동남아에 거주하는 한인까지 포함하여 선무공작(宣撫工作)을 전개했다. 중국과 동남아에 있던 한인의 귀국은 1945년 11월에 시작해서 1946년 7월까지 이어졌다.
임시정부는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 해외 거주 한인 문제, 일본군에 소속된 한적사병 문제, 환국에 필요한 교통 및 경비문제 등을 중국국민당 정부와 교섭했다. 임시정부가 중국 영토 내에서 수립되어 활동했고, 중국국민당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섭은 귀국에 대한 실제적인 조치를 마련해 줄 것과 여비 및 선박 제공 등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것으로 추진되었다.
임시정부의 환국과 노선은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전개된 교섭에 따라 준비가 진행되었다. 노선은 충칭에서 상하이로 이동해서, 상하이에서 국내로 들어가기로 했다. 충칭에서 상하이까지는 중국 측이, 상하이에서 서울까지는 미국 측이 교통편을 제공하기로 했다. 돌아가는 길도 녹록지 않았다. 미군정은 임시정부 요인들의 입국을 개인 자격으로 전제했고, 15인승 비행기 한 대를 제공했다. 하지만 상하이에 먼저 도착한 인원만 해도 29명이었다. 이 인원이 모두 탑승할 수 없었기 때문에 1진, 2진으로 나누어 귀국하기로 했다. 김구를 비롯한 1진 15명은 11월 23일에 상해를 출발해 오후 4시경에 김포비행장에 내렸다. 2진 22명은 12월 1일 상하이를 출발해 다음날 서울에 도착했다.
임시정부 요인들이 충칭을 출발한 후, 남아 있던 임시정부 직원과 가족의 환국을 추진했다. 1945년 11월 4일 자 명단에 따르면, 한인 501명이 충칭에 거주하고 있었다. 턱없이 부족한 교통편과 여비로 인해 해를 넘겨 1946년이 되어서야 교통편을 마련할 수 있었다. 임시정부 직원과 가족은 1946년 3, 4월에 귀국했다. 나머지 인원도 상하이를 출발해 4월 29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충칭에 정착해서 1945년 11월 환국할 때까지 약 5년 동안 주권의 회복과 해방 후 국가수립의 방향 제시를 위한 다양한 모색을 했다. 그 결과 임시 ‘정부’의 역할을 수행하며 환국까지 이르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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