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재단의 〈일제침탈사 편찬사업〉은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침탈과 식민지 지배 실태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종합하여 총서로 발간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자료총서, 연구총서, 교양총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치·경제·사회·문화 분야로 나누어 학계 전문가들이 집필에 참여하고 있다. 〈일제침탈사 시리즈〉에서는 발간된 일제침탈사 총서 가운데 한 권을 선정해 소개한다.
한국문화재를 가장 많이 소장한 나라, 일본
보통 외국에 가면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알기 위해 국립박물관을 찾는다. 그런데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동양관에는 한국 고대 유물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반가운 마음도 잠시, “한국 고대 유물이 일본에 왜 이렇게 많이 있지?”하는 궁금증을 갖게 된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따르면, 2023년 1월 1일 기준으로 해외에 소재한 한국문화재는 27개국 229,655점이라 한다. 이 가운데 일본에 있는 문화재는 95,622점으로 전체 41.6%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다. 이들 문화재는 박물관이나 공공기관 등이 공개한 것으로, 개인 소장 반출 문화재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현재 문화재의 정확한 규모나 소재를 파악하는 것은 어려운 상황이다. 설사 소재를 파악한다 하더라도 유출 경로를 정확히 밝힐 수 있는 객관적 자료를 확보하기는 어렵다. 불법적인 방법으로 반출된 문화재의 출처를 찾는 일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1900년대 초, 일본인들의 불법 도굴과 반출
개항 이후 일확천금을 꿈꾸며 한국으로 건너온 일본 상인과 청일전쟁 직전부터 군사력을 동원해 대거 한국으로 건너온 일본의 군인·헌병·순사들은 불법 도굴을 일삼았다. 이들은 개성, 강화, 해주 등지에서 왕릉과 귀족 무덤을 마구 파헤치고 출토한 유물은 골동상을 통해 매매했다. 1906년경, 고물상에 종사한 한국인은 214명 정도였는데, 1909년 평양 지역에만 일본인 고물상이 12명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도굴품을 취급하는 이들이었다.
일본인들은 본격적인 식민통치가 이루어지기 전부터 경제적인 이유로 한국의 유적과 유물을 도굴해 일본으로 반출했다. 특히, 개성 지역을 중심으로 한 고려 시대 고분에 관심이 많았다. 이들은 고려자기를 무작위로 도굴했고 반출해갔다. 이 시기 군부 및 경찰 등 권력을 가진 고관들에 의한 도굴 사례도 두드러진다. 이들은 권력을 이용해 유물을 쉽게 ‘획득’했는데, 이 유물을 전리품으로 생각했다.
이밖에도 일본 관학자들은 자료 수집 차원의 조사와 연구를 하는 방식으로 유물을 반출했다.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는 고건축물 및 고적,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는 조선사적유물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는데, 이들이 유물을 반출하는 데 어떠한 제지도 받지 않았다.
조선총독부의 고적조사와 문화재 정책
조선총독부는 1916년부터 고적조사 5개년 사업을 통해 한국의 고적조사를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조사 대상은 한사군, 고구려, 신라, 임나(가야), 백제 지역이었는데, 이곳이 일찍이 일제가 주장하는 식민사관을 뒷받침할 만한 실질적인 유물을 찾을 수 있는 지역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는 짧은 기간에 최소한의 인력과 경비를 들여 ‘효율적’으로 고적을 조사하고자 했다. 조선총독부는 조사현장에 근처 한국인의 반발을 막고 조사단의 안전을 위해 헌병이나 경찰관을 대동했다. 소수 인원이 제한된 시간 내에 조사를 해야 하는 만큼 고분을 조사할 때는 주로 크고 완전한 형태의 무덤 몇 기만을 조사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따라서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고적조사 5개년 사업은 학술적 조사라기보다는 그들이 주장하는 통치 이데올로기를 증명하려는 정치적 의도와 유물 수집을 목적으로 한 발굴조사였다. 이런 과정에서 많은 고분 출토유물들은 원소재지에서 이탈되어 ‘학술적 조사 목적’이라는 명분으로 일본으로 반출되는 약탈 피해도 동시에 입게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16년 문화재 보존을 위한 법령 <고적급유물보존규칙>을 반포했고, 1933년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을 시행했다. 두 법에 따라 고적과 유물을 등록·지정하게 된 것은 표면적으로는 문화재 관리와 보존에 관한 근대적 제도가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총독부의 의도에 따라 이전이나 반출, 지정해제가 무분별하게 이루어졌다. 즉, 한국문화재에 대한 지배와 통제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고적조사위원회와 조선총독부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 등을 설립해 전문가에 의한 조사 관리도 시행했다. 고적조사위원회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위원장을 맡고, 총독부 관련 부서의 고등관 외에 일본인 관학자들이 위원으로 참여했다. 이들 대부분은 일제의 조선역사 편찬사업에도 깊이 관여했는데, 고적조사를 통해 증명한 식민사관을 역사서술로 구체화하려 했다. 따라서 일제의 고적조사와 조선역사 편찬사업은 같은 목적하에 ‘따로 또 같이’ 추진한 사업이었다.
고적조사 발굴 현장(평양)
‘역사 만들기’ 전시공간, 조선총독부박물관
박물관은 전시 주체자의 의도에 따라 관람자들을 시각적으로 교육시키는 학습의 장이다. 일제는 고적조사를 통해 발굴 수집한 한국 고대 유물을 박물관에 전시하여 자신들의 ‘문화 식민통치’를 선전하고자 했다. 그들은 “한국은 고대부터 중국이나 일본 등 외세의 영향을 받아 문화를 발전시켰다”는 ‘타율성론’과 “신라와 고려는 불교문화를 바탕으로 나름의 문화를 발전시켰으나 조선시대 유교를 도입한 후 사색당쟁에 빠졌다”는 ‘정체성론’을 강조하며 ‘보여주고’ 싶은 역사만을 전시했다.
일반적으로 박물관에 전시하는 유물은 전시 주체자의 역사에 대한 이해를 대변한다. 따라서 박물관 전시는 나름의 정치적 목적을 갖게 된다. 일제강점기 박물관 전시는 한민족 공동체를 지배하려는 일본 권력기관의 의도를 담고 있다. 일제 식민통치자들은 박물관 전시를 통해 자신들의 의도에 따라 한국에 대한 ‘역사 만들기’를 시도했다. 이런 면에서 ‘근대적 전시공간’인 역사박물관은 식민통치자들의 지배이데올로기를 담아내는 문화공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역사인식을 재현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조선총독부박물관 전경
『일제강점기 문화재정책과 고적조사』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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