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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코리안 디아스포라
하와이의 사진신부, 천연희
  • 함한희 전북대학교 명예교수

 하와이로 가는 도중 일본 고베에 들렸을때, 다른 사진신부들과 함께 찍은 사진 

가운데가 천연희(1915년)(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국이민사박물관에는 사진신부와 관련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출처: 한국이민사박물관)



사진신부 천연희, 하와이로 가다



길찬록과의 혼인증명서(1915)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천연희(1896 ~1997)는 나이 스무 살이 되던 해인 1915620일에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고 있던 길찬록(1866 ~1954)의 사진신부로 호놀룰루항에 도착했다. 그녀는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나 비봉동에서 살았다. 20세기 초 학교교육을 받는 여성들이 드물었던 시절, 천연희는 여학교를 나왔으며, 집안 형편도 넉넉한 편이었다. 흔히 시골에서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여성들이 사진신부로 팔려갔다는 세간의 소문은 천연희의 경우와는 많이 다르다. 그녀가 사진신부를 자청하니, 학교 선생님들은 깜짝 놀라면서 말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가 사진신부를 결심하게 된 것은 돈이나 결혼이 목적이 아니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자유의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소망 때문이었다고 회고했다.

 호놀룰루에 도착한 스무 살 천연희는 이민국에서 입국 심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랑 길찬록을 기다리는 사이, 이민국 청소부가 충격적인 말을 전했다. 그의 남편 될 사람이 쉰 살의 마구리’(마쿨레-하와이말로 늙은이)라는 것이다. 청천벽력과 같은 말을 들은 천연희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가 일주일 후에야 길찬록을 만났다. 스무 살 꽃다운 신부가 다 늙은 쉰 살의 남편을 만나 살려고 하니 억울하고 기가 막혀 탄식과 울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하와이 농장에서 신혼생활을 하다


 천연희와 길찬록은 1915629일에 호놀룰루의 한인감리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마우이섬 북쪽에 위치한 파이아농장으로 가서 키카니아(Kikania)라는 곳에 거처를 마련했다. 마우이섬은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농장이 많았고, 파이아농장은 특히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으로 유명했다. 당시 사탕수수 농장에는 중국, 일본, 한국, 필리핀 등 아시아계 이민자만이 아니라, 포르투갈, 스페인, 독일, 푸에리토리코 출신도 있었다.

 길찬록은 평안도 안주 출생으로, 이미 한국에서 결혼해 딸 다섯이 있는 기혼자였다. 그는 국·한문을 아는 정도의 학식이 있었지만, 가장으로 가족부양에 대한 책임감이 부족했다. 길찬록은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해서 결근이 잦았다. 그래서 월급과 보너스를 온전히 받아오지 못해, 생활비에 쪼들려야 했다. 천연희는 일감을 찾아 나섰다. 농장 노동자들의 바지를 세탁하는 일, 밥을 해주는 일, 바느질 등 닥치는대로 했다. 학교를 다니다가 사진신부를 자청해서 하와이로 건너온 천연희는 자신이 이곳에서 막 노동을 하면서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나 낙담과 회환만 하고 있기에는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은 냉혹했다.

 어린 신부는 바로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20(1916)에 첫 딸(순애,Betty)을 낳고, 이어서 연년생으로 아들(은주, David), 23살에 딸(순복, Mary)을 낳았다. 아이들이 태어나자 육아와 생활비 부담이 커져만 갔다. 그럴수록 남편의 책임감은 반비례했다. 천연희는 아이들을 대학교까지 마치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길찬록이 곁에 있는 한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시키기 어렵다는 판단이 들었다. 천연희는 길찬록과 이혼을 결심했다.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릴 수 있던 배경에는 혼자서도 가정을 꾸려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연희 노트의 내지(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천연희, 사업가로 나서다


 처음에는 빨래와 바느질로 생활비를 벌었고, 얼마큼의 종잣돈을 마련한 천연희는 궁리 끝에 숙박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하와이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 숙박업이 잘 되었다. 세계대전, 한국전쟁 등 전쟁이 이어지면서 하와이 경제는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그때를 이용해 천연희는 음식점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마침내는 30개 호실이 있는 호텔을 인수하기도 했다. 자녀들은 학교에 다니면서도 시간 날 때마다 호텔일을 도왔다. 큰딸은 영어가 서툰 천연희에게 큰 조력자가 되어 주었다.

 사업가로서 천연희는 성공가도를 달렸지만, 결혼생활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두 번의 이혼을 겪고, 세 번째 결혼을 했다. 상대는 미국인 로버트 앤더슨 기븐(Robert Anderson Given)이 었다. (밥으로 부름)와는 1941년 결혼했는데, 당시 천연희의 나이는 45세였다. 상대가 백인이어서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인 밥이 아이들에게 잘하는 것을 보고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고 한다. 천연희는 사십이 넘어서 처음으로 부부의 정을 느끼며 밥과 행복하게 살았다. 그는 천연희를 곁에서 말없이 도와주는 말 그대로 반려자가 되어 주었다

 1942년경 천연희가 호텔업을 접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1.5에이커(ac)의 땅을 개간해서 카네이션 농장을 시작했다. 꽃 농사 경험은 전무했지만, 한인들 사이에 카네이션이 돈이 된다는 소문이 있어서 뛰어들었다. 천연희는 농사에도 열심이었다. 성실하게 카네이션을 재배했고, 중간 상인들에게 품질, 가격 및 날짜를 잘 지켜주었다. 상인들은 천연희가 신용 있는 농사꾼임을 알아보고 그녀와 거래하는 것을 선호했다. 카네이션 농장도 잘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천연희를 시기하던 누군가가 몰래 카네이션 밭에다 제초제를 뿌리고 도망갔다. 이튿날 아침에 보니 카네이션이 모두 죽어 있었다. 여러 방면으로 조사했으나 뚜렷한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1년 동안 공들여 지은 농사를 하루아침에 망쳐 버린 것이다. 천연희에게는 더없이 큰 시련이 아닐 수 없었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들 숙소(1910년경) (출처: 이덕희)


행복한 결혼생활도 막을 내리다


 그 일 이후 카네이션 농장을 유지하기 힘들어하던 천연희는 다시 숙박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농장을 쉽게 포기하기는 힘들었다. 1950년대 초반 마음을 다잡은 천연희는 농장을 다시 살려서 꽃을 키웠고, 남편 밥은 호텔을 경영했다. 그즈음 호텔 경영이 수월치 않던 차에 설상가상으로 남편의 건강이 나빠졌다. 천연희는 주저하지 않고 호텔사업을 접었다. 남편은 농장으로 들어와 농장일을 하면서 지냈다. 그러던 중 농장의 땅이 개발되어 그 일대의 농민들이 모두 쫓겨나야 하는 위기상황이 발생했다. 게다가 남편 밥마저 병이 위중해져서 마침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농사일을 제쳐두고 천연희는 병원을 오가며 밥을 극진히 간호를 했다. 천연희는 모처럼의 부부애를 느끼면서 그와 다정하게 살았고, 그 기간이 연장되기를 빌었다. 하지만 허망하게도 밥은 세상을 떠났다. 일생을 전투하듯 살아왔지만, 실제로 천연희의 삶을 지탱해 준 것은 잔잔한 사랑의 따스함이었다.


자녀교육이 내 전부다


 “나는 내 손으로 돈을 벌어서 내 자식들을 공부시킬 목적이었다. 남을 의지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천연희는 이 같은 말을 누차 되풀이했다. 그녀는 자녀들 교육에 온힘을 쏟았다. 자녀들을 잘 키우려면 홀로 서야만 했다. 천연희를 유능한 사업가로 만든 것은 자녀들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다. 그녀는 강하고 유능한 어머니상을 만들어 갔다. 사업이 성장하듯 천연희가 만들어 낸 어머니상도 커져갔다. 자녀들의 교육비 마련은 물론이고 그들이 결혼할 때, 또 출산할 때 등 크고 작은 일이 생길 때마다 그들은 어머니의 힘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그녀는 늘 자녀들의 보호막이 되어야 했다그러나 이제 자녀들은 어머니의 보호가 없이도 살아갈 수 있게 모두 장성했다. 1969, 73살이 되던 해 천연희는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후 자녀들은 그녀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아늑한 보호막이 되어 편안한 노후를 지낼 수 있게 해주었다

 자녀들을 키우기 위해 용감한 전사였던 어머니는 지상에서 애잔한 사랑을 나누었던 남편 밥을 찾아 서둘러 길을 떠났다. 그녀는 백수를 누리며 편안하게 생을 마감했다.

 
 


천연희 중학교 졸업사진.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천연희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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