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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1절 즈음에 생각하는 시대와의 대화
  • 오금성 |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서울대 교수)

인간은 시간을 따라 살아가는 동물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시간에는 '물리적 시간'과 '역사적 시간'이 있다. 9월 11일은 어느 해에나 있는 물리적 시간이지만, 뉴욕 무역센터 테러사건을 겪은 미국인에게는 2001년 9월 11일은 '역사적 시간'이다.
마찬가지로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을 감행한 한국인에게는 3·1절은 '역사적인 시간'이다. 금년은 3·1 독립운동이 일어난 지 89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동안에는 매년 이 날을 그저 한가하게 쉬는 날로만 생각해 왔으나, 금년에는 또다시 3·1절을 맞으며 잔잔한 상념이 교차되는 것은 단지 동북아역사재단에 손가락 하나를 넣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세계사적인 의미에서 보면, 한국을 중심으로 중국,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의 모든 나라는 한자와 유교문화, 율령체제와 불교문화 등을 공유하면서 하나의 문화권적인 성격을 형성해 왔다. 그러면서도 각 나라를 형성한 개별 민족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각기 다른, 독특한 역사를 발전시키며 독자적으로 발전해 왔다. 19세기에 서양의 제국주의 열강이 적극적으로 동아시아로 진출하여 식민지를 건설할 때에도, 각기 다른 역사와 문화를 가진 동아시아 각국은 각각 다른 저항 양상을 보이며, 영토와 문화를 굳건히 지켜왔다.

한국은 고대부터 중국문화를 수용하여 한국적인 문화로 발전시켜 왔다. 그 결과 조선시대에 이르면, 중국의 경전과 사서에 대한 조선 사대부의 이해는 같은 시기의 중국의 신사와 비교해도 결코 손색이 없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이러한 좋은 여건이 전승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근대사학의 방법을 도입한 역사연구는 겨우 8·15 광복 이후의 일이었다. 특히 중국사의 경우에는, 냉전체제 하에서 중국사 본령보다도 어쩔 수 없이 한·중관계사 연구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러한 연구풍토가 바뀌어 본격적인 중국사 본령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중반부터였다.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우리가 한국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나라의 역사와 문화 연구에서 결코 잊어서는 안 될 명제가 있다. 한국은 이 지구상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는가? 한국은 중국에 대하여, 일본에 대하여, 어떠한 위치에 있는가? 무엇 때문에 자기 나라의 역사가 아닌, 세계사를 연구하고, 중국사를 연구하고, 일본사를 연구하는가?
한국은 작은 나라이지만 그 많은 외침 속에서도 꿋꿋하게 나라와 문화를 지켜 왔다. 40년 가까운 일본 제국주의 침탈과 민족말살 정치를 거치면서도 살아남았다. 그 뿐 아니라 6·25 전란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반쪽만으로도 세계의 경제대국에 근접해 가고 있다. 이러한 우리의 자부심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학문을 통하여 평화와 번영을 도모해 나가야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자기의 연구 주제와 철저하게 씨름함으로써, 우리가 잡은 주제의 해당 시대로 들어가, 그 시대의 사람들과 만나 대화하고 그들과 함께 여행하면서, 그들의 인식과 사고방식 등을 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러한 '학문적 대화와 여행'을 위해서는, '사료'의 철저한 분석과 이해가 필요하다. 요사이는 컴퓨터를 통하여 필요한 사료에 너무도 쉽게 접할 수 있지만, 그렇게 얻는 사료는 자칫 "다이제스트"적인 토막지식에 불과할 수도 있다. 중국 명·청시대의 지식인들이 '시문(時文)'만으로 과거시험 공부를 한 때문에, '사서오경'의 진수를 이해하지 못한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될 것이다.

'진실' 존중은 역사 연구의 기본

또 한 가지 필요한 것은 한·중, 한·일 관계사를 새로운 안목에서 연구해야 한다는 점이다. 70년대 초까지의 한·중관계사 연구와 같은 방법론에서 벗어나야 하겠다. 치밀한 사료분석을 통하여 한국사와 중국사·일본사를 확실하게 이해한 위에서, 단순히 사람과 물자의 교류가 아닌, 새로운 관계사를 정립해야 할 것이다. 그것만이 인해전술로 엄습해 오는 주변 국가들의 '역사왜곡'에 대해서도 우리의 '민족'과 '역사'와 '영토'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역사학은 인류의 과거(인류 체험의 총화=역사)를 탐구하고 기록하고 평가하는 학문이다. 이러한 역사 연구에는 기본적으로 객관성·특수성·보편성 등 3 가지를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그 중에서도 객관적 균형 감각은 필수적이다. 객관적 균형 감각은 '진실'을 존중하는 것이다. 역사연구에는 다른 어떠한 목적의식도 결코 작용해서는 안 된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이름 그대로 역사연구를 토대로 동북아시아 여러 나라와 평화와 번영을 공유할 것을 목표로 설립되었다. 그러기에, 지금까지 해 온 것 이상으로 동북아역사재단의 학문적 역할을 기대해 본다. 새롭게 3·1절을 맞으면서, 적어도 동북아시아에서 만은 다시는 3·1절 같은 '역사적 시간'이 없기를 기대하면서, 동북아역사재단이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학문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건실한 기관으로 발전하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