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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중화주의의 현주소
  • 배경한 신라대 교수
배경한 신라대 교수배경한 신라대 교수

간단하게 정의해본다면, 중화주의란 중국인들의 주변 민족에 대한 혈통적 문화적 우월감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중화주의의 형성 자체가, 황하 중류를 배경으로 발전했던 고대 화하(華夏)문명의 우월성에서 비롯되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주변 민족들을 통합해가면서 끊임없이 중화의 범위가 확대되어 갔던 것을 생각해본다면 중화주의란 오랜 역사적 산물이다. 중화주의가 일종의 편견에 불과하다고만 말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전공이 전공인지라 중국에서 열리는 학회 참석이 비교적 잦은 필자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화제가 바로 이 중화주의를 둘러싼 문제이다. 더구나 최근 현대 중국 민족주의의 전개와 1940년대 중반 이후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재편과정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민족주의의 특별한 한 가지 표현이라고 할 중화주의와 그 변용에 대한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고 따라서 자연히 여기저기 중국학자들과 부닥칠 일이 더 많아졌다.

사실 수년전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열리는 학술회의에서 중화주의의 문제를 공개적으로 거론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민족적 긍지에 차서 황제(黃帝)의 자손임을 강조하는 국수주의적 발언으로 일관하는 일부 학자들을 보노라면 이들과 중화주의를 둘러싼 논쟁을 벌이는 것은 처음부터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반드시 올바른 태도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이런 까닭에 중화주의와 관련된 언급을 해야 하는 경우 미리 적당히 각색하거나 부드러운 표현으로 바꾸는 등, '자기 검열'을 하곤 했다.

중화주의 극복을 향한 희망의 끈

그러나 7, 8년 전부터 중국 학술계에서 일부 긍정적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예컨대 수년전 꽝저우(廣州) 쭝샨(中山)대학 역사학과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한 학술강연에서, 20세기 초 중국을 대표하는 정치가 쑨원(孫文)의 아시아 민족 대연합 주장(대아시아주의)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소개한 적이 있는데, 그들의 반응은 예상 밖으로 매우 긍정적이었다. 쑨원의 대아시아주의가 사실은 중국과 일본의 '영도(領導)'를 조건으로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동등한 연합의 주체가 되어야 할 주변의 약소국가들은 여전히 배제되고 있어서 중국 중심주의적(중화주의적) 발상일 뿐이라는 발표에 대하여 20, 30대의 젊은 연구자들은, 민족 영웅 쑨원을 또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신선한 접근이라는 반응들을 보였던 것이다. 기성세대가 보여주던 감정적 대응과 비교할 때 이들의 반응은 신선한 느낌을 받기에 충분했다.

황하 변에 세운 황제염제상황하 변에 세운 황제염제상

마찬가지로 수년전, 친일 민족 반역자로 이름 높은 왕징웨이(汪精衛)의 정치사상을 검토하는 필자의 발표에 대하여 중국학자들이 보여준 반응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왕징웨이 정권은 처음부터 친일정권으로서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점령자 일본으로부터 정치적 '독립(자치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 자체는 인정해야 할 것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참석자들 상당수가 수긍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일부에서는 "민족반역자라는 평가에 가려져 있는 왕징웨이의 다양한 측면들을 우리(중국학자들)도 연구해야만 할 것"이라는 적극적인 평가를 해주기도 했던 것이다.

중화주의와는 약간 거리가 있는 문제이지만 객관성에 기초한 합리적 논의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한 나로서는 당시 묘한 흥분까지 느꼈던 것이다. 그 후 민족주의 혹은 중화주의에 대한 중국학자들의 한결 여유로워진 대응은 여러 주제에 걸쳐서 확인할 수 있었으니 필자로서는 중화주의 극복을 향한 희망의 끈을 확실하게 잡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지난 8월 베이징에서 열린 장제스(蔣介石) 관련 학회에서의 경험은 필자를 다시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타이완의 한 젊은 학자가 국민당 정부의 소수민족 정책이 뒤에 공산당의 소수민족 정책으로 이어졌던 만큼 국민당과 그 지도자 장제스의 소수민족 정책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장제스가 1920년대 말 이후 소수민족의 자치나 독립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서 대한족주의(大漢族主義)라고 하는 민족융합 정책의 추진으로 나가게 되었음을 지적하였다. 대한족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포함하고 있는 이 논문에 대하여 일부 참석자들은, 발표자가 거론한 몽골이나 티베트 위구르 등은 원래부터 중국의 영토이기 때문에 독립이나 자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을 제기하면서, 장제스의 주장은 소수민족의 독립요구를 배반한 것이 아니라 전중국의 민족적 통합을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변화의 조짐은 그저 학문적 수사였나?

보다 심각한 문제는 그날 저녁 뒤풀이자리에서 터져 나왔는데, 문제의 발표자가 빠진 이 자리에서 중국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발표자를 '분열주의자'로 낙인찍는 데 앞장섰다. 알고 보니 발표자는 신장(新疆) 위구르족 혈통으로 미얀마에서 태어난 화교출신이며 미국에서 교육받고 학위를 받은 매우 특별한 이력의 신진 학자였는데, 이것을 알게 된 중국학자들이 그에게 소수민족의 독립을 획책하는 불온분자의 딱지를 붙인 것이다.

좌중에 나처럼 소수민족 문제에 대하여 마찬가지로 민감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 까닭에 중화주의의 칼날이 있는 대로 드러난 것일 테지만, 그날 필자가 받은 충격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렇다면 필자가 그토록 신선한 변화로 받아들였던 중화주의에 대한 중국학자들의 태도변화란 것이 한낱 학문적 수사에 불과한 것이었단 말인가? 아니면 이른바 개혁 개방 이후 세대의 '위대한 조국'에 대한 자신감이나 우월감의 표현으로 결국에는 또 다른 중화주의의 표현에 불과한 것인가?

날로 커져가고 있는 중국의 국제적 영향력이나 이와 비례하여 표출되고 있는 중국인들의 우월감을 보노라면, 화해와 공존의 동아시아 역사를 그리는 데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될 중화주의의 극복에 대하여 비관적일 수밖에 없다. 변화의 조짐이 보이는 것 같긴 한데, 진정한 중화주의 극복은 과연 언제나 기대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