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일본의 한국 강제병합 100년에 즈음하여 근대 열강의 식민지 지배에서 비롯된 제반 문제와 과제를 소개하고 식민지 지배의 실태와 그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2부로 구성된 본 연구에는 영국, 프랑스, 구소련 등 서구 열강(제1부)과 일본(제2부)이 추진한 식민통치와 국민통합 과정에서 야기된 제반 문제들을 담고 있다. 각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이루기까지 다양한 전공분야를 가진 연구자들로 집필진이 구성된 만큼 동일한 주제에 대해서도 다양한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 본 연구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정당한'(?) 지배논리의 허구성 조명
어떤 사전합의도 없었음에도 본 연구에서는 식민통치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공통된 특징들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지배자'는 '피지배자'를 열등한 타자로 간주함으로써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함과 동시에 스스로의 정체성도 찾았다. 둘째, '피지배자'를 교화의 대상으로 삼아 동화를 모색하려 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의무 부과 또는 동원을 위한 목적으로 추진되었을 뿐 이들에 대한 본질적인 권리부여나 경제적 이익에 대한 고려는 없었다. 셋째, '지배자'들은 '피지배자'의 본연의 의지인 자주성과 독립 회복에 대한 갈망을 철저히 무시하고 지배를 영속화시키려 했다. 그리고 넷째, 이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 지배 정책은 결국 '피지배자'의 저항을 야기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교화를 위해 실시된 시책들이 오히려 저항의 도구로 변질되는 경우까지 있었다.
1부에서는 영국에 의한 인도 통치, 프랑스에 의한 알제리와 베트남 통치 그리고 구소련에 의한 중아아시아 지배 문제를 다뤘다. 영국은 스스로를 이성적이고 용맹한 남성으로 비유하는 한편, 인도를 야만적이면서 나약한 여성으로 비유함으로써 마땅히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영국인의 인도에 대한 깊은 두려움이 자리했다. 교육을 통해 권리의식이 향상된 평원지대의 인도인(벵골인)들이 반(反)영 투쟁에 나서자 서북지방과 시크나 네팔의 구르카 등 산악지대에 거주하는 이들을 병사로 채용하여 폭력으로 이를 진압했다.
프랑스의 알제리와 베트남 통치에서도 별도의 법률체계를 둬 시민과 신민 간 명백한 구분을 두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민중 교화를 위해 추진된 베트남의 꾸옥응우(quoc ngu 국어) 교육과 같은 프랑스의 '문명화'프로젝트가 '피지배인'에게 오히려 저항논리를 보급하는 언론의 발달을 가져다주었다는 지적은 주목할 만하다.
구소련의 중앙아시아 우즈베크 및 카자흐 지배는 공산화와 동시에 러시아인에 의한 이민족 지배가 동시에 진행된 사례이며, 이때 추진된 정치, 경제, 사회 시책들이 대중에게 무엇을 남겼는지를 당사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논하고 있다. 농업개혁과 집산화, 민족정책, 종교정책에서는 늘 정치적 적수가 필요했으며, 이들에게 탄압과 처벌을 가함으로써 지배를 확고히 해나갔다. 이 논문에서 지적되듯이 '대중의 기억'과 '공식의 역사' 간에는 괴리가 있기 마련이며,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구술적 자료가 경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 또한 간과할 수 없다.
2부에서는 일본에 의한 선주민 아이누, 식민지 대만 그리고 조선 통치에 관한 통치정책과 교육 사상 문제에 관하여 논했다. 먼저 아이누(Ainu)의 영토는 메이지 신정부의 출범과 거의 동시에 일본에 의해 류큐(오키나와)와 더불어 첫 번째 침탈의 대상이 되었다. 아이누는 무자비한 폭력을 수반한 동화정책으로 고유의 문화와 언어, 생활양식을 상실하였고 일본사회에서 가장 낮은 지위로 몰렸다. 그런데 농경민족인 일본인이 고도경제성장을 이루자 자신의 우월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그동안 철저히 멸시해온 아이누의 수렵 민족적 특성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며 '단일민족론'을 펼치기 시작했다는 지적을 통해 소위 '일본인론'의 "자의성"을 발견할 수 있다.
타이완 총독부의 차별적 교육정책으로 타이완의 청년들은 사회과학분야에서 고등교육을 받으려면 일본으로 건너갈 수밖에 없었다. 도쿄 소재 사립대학의 예과(豫科) 또는 전문부(專門部)로 진학했다가 졸업 후, 상당수가 하위 관료직을 얻었다. 타이완의 학력만으로 고등교육과정인 본과로 진학할 수 없는 제약 때문이었다. 이런 사실은 식민지당국이 구호로 외친 '일시동인(一視同仁)'의 허구성의 한 측면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조선인 학생이나 일본인 크리스천, 사회주의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타이완청년들이 '문화적 아이덴티티'와 '민족적 아이덴티티'라는 과제를 동시에 각성하게 되었다는 지적을 통해 당시 이들이 놓여있던 처지를 잘 이해할 수 있다.
조선총독부가 조선인에게 강요한 이데올로기에 관한 연구는 1910년대 무단통치기, 1920년대 문단통치기 그리고 1930년대 이후 대륙침략기를 거치면서 내용과 표현 측면에서 변화를 살피고 있다. 각기 '동화정책' '내지연장주의' '황국신민화정책'으로 표현할 수 있는 정책 변화는 그러나 메이지유신 이후 인위적으로 만든 신화인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조선인에게 강요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이는 결국 조선인의 계몽과 문명화에 기여하기 위한 시책이 아니라 막대한 물적·인적 동원과 수탈의 수단으로만 작용되었다.
이와 같은 경향은 '조선'과 '만주' 사이의 '국제'사업으로 추진된 압록강 본류 전원개발 사업을 다룬 연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선만일여(鮮滿一如)'라는 슬로건은 일본에 대륙 "개발"에 봉사하는 체제 구축을 뜻하는 것이지, 조선인과 중국인 간의 민족적 각성에서 비롯한 자율적 연대를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다양한 접근을 통한 심화된 연구 필요
본 연구의 주제인 식민통치와 국민통합은 19세기 중반부터 100년 전후의 비교적으로 짧은 시기에 여러 서양 열강들과 일본에 의해 추진된 만큼 각국이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경험을 동시에 축적해나갔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향후 이와 같은 연구는 타국에 의해 추진된 유사한 사례들을 감안해야 한층 심화된 연구가 가능해질 것이다. '피지배자'가 정복되었기에 열등하다고 간주되고 '지배자'의 도덕적 회의 없이 지배를 정당화했다는 공통된 악순환의 원인은 이런 의미에서 철저히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역사인식·역사해석의 차이 때문에 상호 간에 불신감·긴장감이 상존하는 동북아시아에서는 꼭 필요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