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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보고
한국의 전방후원분
  • 연민수 역사연구실 연구위원

지난 여름 영산강유역의 전방후원분(장고분)을 답사할 기회를 가졌다. 현재 확인된 13기 전체를 자세히 확인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이 지역의 전방후원분의 존재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이다. 전방후원분의 분포는 전라도 서남부의 영산강 물줄기를 따라 산재되어 있고, 시기적으로는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대로 연속성이 없이 1세대로 끝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전방후원분은 일본 고유의 묘제로 알려져 있어 피장자와 그 성격을 존재를 둘러싸고 한일양국학계의 뜨거운 관심과 논쟁을 일으키고 있다.

전방후원분은 왜 논란이 되는가?

일본고대사학계의 통설에 따르면 전방후원분은 4~6세기 고분시대에 축조된 야마토정권의 지배층의 묘제로 동 고분의 지역적 분포는 야마토 정권과의 정치적인 지배·복속관계로 설명하고 있다. 그 범위도 동북지방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문제는 일부에서 제기하고 있는 한국의 전방후원분도 일본의 영향권 내에 속하고, 일본열도의 외연부에까지 야마토정권의 세력이 뻗치고 있었다는 학설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일제시기 조선총독부의 가야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고고학적 조사가 임나일본부설의 물적 증거를 찾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사실이 상기되고, 일찍이 《임나흥망사》(1949)의 저자 쓰에마츠 야스카즈(末松保和)가 주장한 임나4현이 영산강유역을 포괄하고 있고, 해당 고분에서 왜계 양식, 유물이 확인되고 있다는 점에서 긴장감을 더해가고 있다.

영산강유역 전방후원분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현재 최대의 쟁점이 되고 있는 부분이 고분의 피장자 문제이다. 피장자가 누구인가를 두고 왜인설, 왜계백제인설, 재지수장설 등의 주장이 있고, 또 그 속에서도 차이가 존재한다. 전방후원분이 분포하는 영산강유역은 사료의 공백지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이들 고분이 만들어진 시기에 이 지역에 왕권의 실체를 알려주는 문헌사료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우선 왜인설을 취할 경우 현재 발견된 13기 모두 왜인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또 광역 지역에 동시다발적으로 왜인이 세력권을 형성하는 역사적인 배경이 제시되어야 하고, 집단적 왜계 문화의 흔적이 발견되어야 한다. 만약 이들 전방후원분의 주인공이 왜인이라면 단순한 교류의 차원을 넘어 현지 정착을 위한 이민 내지는 망명으로 생각되고, 영산강유역에 정착한 시기는 고분의 조영시기보다 다소 앞선 5세기 2/4분기에서 6세기 1/4분기의 범위 내에 들어야 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 북규슈 등 일본열도에 한반도 남부로 대거 이주할 만한 정치·군사적인 동향은 발견되지 않는다. 6세기 전반에 일어난 북규슈의 수장 이와이의 난 때에도 그의 일족은 야마토 정권에 복속을 맹세하여 살아남아 망명의 흔적은 없다. 혹 한반도 남부로부터 일본열도로 간 이주자가 어떤 계기에 의해 되돌아 오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으나, 한반도로부터 이주자가 다수 발생한 가야지역이나 백제영역으로 회귀할 것이고, 연고가 없는 지역으로 들어갈 가능성은 없다고 보인다. 왜계 백제 관료설을 취할 경우도 이들의 활동시기와는 차이가 있고, 이들은 중앙관료로서 외교활동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영산강유역에 묻힐 가능성은 전무하다.

(좌)일본 사카이시에 있는 다이센고분.전장 4860m로 일본 최대의 전방후원분이다. (우) 해남 전방후원분. 전장 77m

다음으로 북규슈 등의 왜인들이 영산강유역과 오랜 세월에 걸친 교류의 결과 현지에 정착하여 유력 호족으로 성장했다는 가설이다. 그러나 특정 시기에 동시다발적이고 1세대로 끝나는 현상은 장기 교류의 결과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일본열도로부터 집단적 망명을 상정해도 단기간에 이들이 재지세력을 능가하는 고분을 만들 수 있는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것도 동시에 10명이 넘는 유력자를 배출했다는 것은 대규모의 집단적 망명자가 각지로 분산하여 지역적 거점을 형성했다는 가설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영산강사회가 저항할 능력이 없거나 무주지 혹은 공한지가 아니라면 성립하기 어려운 추론이다. 그렇다면 전방후원분의 피장자는 재지세력으로 보는 것이 가장 온당하다고 생각된다.

왜 전방후원분을 조영했을까

이들 전방후원분에는 백제계, 가야계, 왜계 유물이 혼합된 복합적 문화요소가 확인되고 있다. 영산강 사회가 상상 이상으로 주변지역과 문화적 접촉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전통적인 옹관묘 사회에서 전방후원분, 횡혈식석실 등 새로운 문화이식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지배층의 의식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전통적인 세계관의 변화로서 다원적 문화의 수용에 의해 지배층의 자립을 꾀하려는 정치적 성격을 띤 문화혁신의 실태를 반영하고 있다.

같은 시기 섬진강 동쪽방면의 가야지역은 백제, 신라의 거센 강풍에 휘청거리고 있을 때, 나름대로의 자립을 위해 일본열도의 왜를 포함해 주변제국과의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을 영산강사회는 인지하지 못했을 리 없다. 특히 강대국의 침략을 받는 공동점을 가진 나라 처지에서 영산강사회는 낙동강, 섬진강유역의 남부가야지역의 현실과 그 대응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연히 영산강사회는 자체 정보교류를 통해 재지세력의 존립을 위해 무언가의 공동전선을 꾀했을 가능성은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그것이 전방후원분이라는 가시적인 조형물의 존재가 아닌가 생각된다. 분구의 통일성, 기획성은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동일한 외형을 지닌 분묘를 조영함으로서 연합과 동맹을 과시하는 정치적 효과를 노렸던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특정한 시기에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하였다는 것은 단순한 문화의 전파나 수용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지배층 상호간의 공동의 연대의식이 없으면 일어나기 어려운 현상이다.

그럼 왜 전방후원분이라는 형태로 통일적 연대를 형성하려 했을까? 분묘의 외형은 분명 일본열도의 왜인 혹은 영산강사회가 왜인과의 교류를 통해 현지에서의 경험을 통해 도입했을 것이다. 고분을 거대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원분의 형태로는 한계가 있다. 전방후원분이라는 조영방식이 웅장한 모습을 표현하기에 어울리는 모델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영산강유역이 백제에 의해 침략당하는 5세기 후반 이후 본격적인 전방후원분이 축조되기 시작하여 5방제의 실시로 백제의 지방행정구역으로 편입되는 6세기 1/4분기까지 계속된다. 이것은 백제에 대한 내부결속의 행위이고 자립의 의지를 과시하려는 영산강사회의 지역적 세력들의 정치적인 선언의 표상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