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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임나일본부설의 역사학
  • 글 연민수 한일관계연구소 연구위원
임나일본부설이 기록되어 있는 《일본서기》 필사본

현재 임나일본부설은 학계의 영역을 넘어 언론, 정치권, 시민사회 등 다양한 계층의 관심을 촉발시키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최근 벌어진 동아시아 역사논쟁의 파급효과라고 생각된다. 임나일본부설은 고대한일관계사 논쟁의 핵으로 학문적인 영역을 떠나 일본의 한국사 인식, 한국인에 대한 편견과 왜곡된 역사관을 심어주는 근거가 되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은 존재론, 부정론, 존재론에 기초한 새로운 학설의 제기 등 다양한 측면에서 검토되어 왔다. 최근에는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의 존재가 새롭게 주목받아 임나일본부설에 접근하려는 경향도 포착되고 있다. 연구자들 간에는 이미 소멸한 학설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지만,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부분이 도처에 확인되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의 최초 발원지는 일본근대사학이 아니라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에 있다. 따라서 일본고대 사료의 세계에 나타난 일본지배층의 가야관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중요하다. 단지 사료의 재구성을 통해 만들어낸 논리는 다양한 임나일본부론을 생산해 놓았지만, 그 속에서도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한국지배의 역사적 근거로 보는 일본근대사학

국립은행권의 신공황후 삼한정벌도(1873)

일본근대사학의 한국사 연구는 한국 침략과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국책사업으로 추진되었다. 고대 한국은 일본에 예속된 존재로서 조공하고 지배받던 번국으로 인식하고 연구해 왔다. 그러나 일본근대사학이 주목한 것은 임나일본부설에 앞서 신공황후의 ‘삼한정벌론’이다. 임나일본부 문제는 신공황후의 삼한정복론 속에 흡수된 이야기로 인식되고 있다.

《일본서기》에는 일본의 한반도 복속관을 2개의 이야기로 구성하고 있다. 신공황후가 신라, 고구려, 백제를 정벌하고 ‘내관가(內官家)’를 설치했다는 것과 신공황후가 격파한 뒤 가야 7국을 평정하고, 백제는 일본에 복속을 맹세한다는 이야기다. 이 2개의 가공 이야기는 일본의 신라정벌이라는 행위가 전면에 나오고 고구려, 백제, 가야는 그 산물로서 그려져 있다. 이 가공의 전설은 교과서, 화폐, 우표, 판화로 만들어져 국민적 상식으로 선전되었다.

이들 기록에 근거하여 일본근대사학의 임나일본부설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1911년에 나온 《역사지리》의 임시 증간된 조선호 특집이다. 이 특집호 발간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천여만의 백의민족은 지금 제국의 판도에 들어왔다. 이제 동양의 평화는 영원히 유지되고 제국의 안전은 장래에 보장된다. 천년 세월의 쾌거이고 우리 제국의 신민이 되는 일 축하해야 되는 것은 아닌가. 조선호를 증간하여 이른바 국사의 훌륭한 부분을 발현시키고 이 자랑스러운 일을 보게 된 근본적 사실을 밝힌다.

 

한국병합 직후 발간된 이 잡지는 한국 지배에 대한 역사적인 근거를 보여주기 위해 편집되었다. 이 증간호에는 22개 주제로 다양한 측면에서 동일 기원설을 언급하고 태고로부터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고 복속하고 있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 중에서 「임나일본부의 흥폐」 내용을 정리해 보자.

 

신공황후 도안 지폐(1878)

*신공황후의 정한(征韓) 기사는 대단히 유쾌한 일이다. 신라정벌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가야 7국을 평정한 결과 한반도 내 일본의 속국이 생겼고, 통치를 위해 국마다 일본부와 주재관을 두었다. 일본은 중국과 같이 제번국(諸蕃國)에 정삭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무용의 국이기 때문에 삼한이 두려워했다. 금일의 병합에서는 한국 황제는 조선 국왕이 아니고 이왕(李王)이며 병마, 재정, 외교는 일체 관여하지 않는다, 이것은 조선총독부가 행하는 것이다. 임나에 일본부를 두고 재신(宰臣)을 보내 통치하는 일은 비슷하지만 권한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있다.

 

임나일본부에 관한 서술은 한국병합 직후에 나온 것으로 일본학계의 공식 입장이 집약되어 있다. 조선호에 실린 임나일본부설의 취지는 고대로부터 한국은 일본에 복속된 국으로 이러한 역사적인 관계가 금일에 실현되었다는 영광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이쇼기 소화천황이 동궁시절에 일본사 교재로 배운 《국사》에는 임나일본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우리나라는 가야에 관청을 두고 관인을 파견하여 보호했는데, 우리나라의 위광을 반도에까지 넓히자 주변 몇 나라도 보호를 요청했다. 이들 나라를 통치하는 정치 조직을 임나일본부라고 하고 가야에 있다. … 서쪽의 백제도 우리나라에 종속하여 보호국이 되기를 희망했다. 천황은 이를 수락하시어 백제에 감독관을 보내 국정에 참여시켰다.

 

이 교재는 이른바 만세일계 천황가의 영광된 역사를 그리고 있으며 특히 한국병합 직후 천황가의 역사교과서라는 점에서 정치적 의도가 깊이 담겨 있다.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조선을 통치할 총독을 천황이 임명한다는 현실의 상황이 고대에도 일본부를 두고 관리를 파견하여 가야를 통치한다는 이미지가 투영되어 두 개의 사건이 시공을 초월하여 같은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요컨대 현실의 한국 지배는 고대의 재현으로 나타나고 있다.

1943년 간행된 고등고시의 수험참고서인 《국사개설》에는 “임나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였다. 반도에서 우리나라의 위세는 크게 떨쳐 임나를 본거로 하여 신라를 억압하고 백제, 고구려에까지 지배력을 미치게 되었다.”라고 하고, 한국병합에 대한 서술에서는 “흠명천황 시대에 우리나라는 임나부(任那府)를 철수시키고 천지천황대에 우리 속국인 백제가 멸망하고 나서 오랜 세월이 흘렀다. 지금에 와서 전 반도는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회복하여 황토(皇土)화 되었다.”라고 한다. 한국 강제병합을 본연의 모습으로 회복시킨 사건으로 인식하고 있어 임나일본부를 일본의 가야지배기관으로 규정하고 있다. 고위 관리의 임용시험 참고서를 문부성이 제작했다는 사실은 황국사관의 주입, 현실의 한국 지배 당위성을 인식시키려는 수단이었다.

이상의 근대일본사학이 구축해 놓은 임나일본부상은 스에마츠 야스카즈(末松保和)의 《임나흥망사》(1949)로 체계화되었다. 이후 일본 대부분의 역사교과서나 개설서, 전문서적에 이르기까지 이 설을 통해 고대한일관계사를 이해하고 있다. 일본학계에서 70년대에 이르기까지 임나일본부를 전론으로 다룬 논고가 그다지 보이지 않은 것도 ‘임나의 지배’를 당연한 것으로 믿는 학문적 풍토에 기인한다.

 

새로운 학설의 등장과 도달점

해방 이후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나온 임나일본부설이 북한학계의 분국론이다. 김석형을 대표로 하는 이 설은 기원전 3세기부터 한반도로부터 건너간 이주민이 일본 열도에 한반도계 소국인 분국을 건설했는데, 이들 분국은 5세기 이후 야마토정권의 국토 통일과정에서 통합되었다고 한다. 임나일본부란 야마토 정권이 이들 한반도계 분국을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기관이라는 것이다. 이 설은 문헌뿐 아니라 신화, 고고학 등의 자료까지 분석하여 고대한일관계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의 가야관련 지명, 사건은 가야사를 복원하는데 유용하며 가야의 땅에서 일어난 고대한일관계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후 일본학계에서는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를 경략(經略) 할 때 근거지로 했던 임나의 군현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야마토 정권과는 무관하게 왜인이라고 칭하는 임나의 재지호족이 주체가 되어 지배했다는 설이 나왔다. 한일고대사 논쟁이 활발해지는 가운데 외교기관이나 외교사절을 표방하는 연구가 강하게 대두된다. 《삼국사기》 직관지의 ‘신라왜전(新羅倭典)’이 대왜처리를 주 목적으로 한 외교기관인 점에 착안하여 임나일본부도 가야의 대왜처리를 주 목적으로 한 외교기구설이었다고 주장하는 이 설은 대화정권(大和政權)의 출선기관설(出先機關說)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기구의 구성 및 운영 자체도 가야제국의 주체성을 강조한 점에서 연구사적 의의가 있다.

일본이 임나4현을 백제에게 주었다고 해설한 지도(『日本史年表·地圖』, 吉川弘文館,2005)

국내학계의 연구는 《일본서기》의 백제가 가야방면으로 진출해 나가는 과정에서 현지 지배를 위해 설치한 기관이라는 설이 초기에 큰 호응을 얻었다. 이후 일본부 관인의 출자 분석을 통해 안라국을 중심으로 가야제국의 독립 보존 혹은 교역적 성격을 추론하고 가야제국의 국가적 이익을 위해 주변 제국을 왕래하며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 임나일본부의 실태라는 설이 나왔다. 이후의 연구도 대체로 앞의 연구 기반 위에서 논리를 전개시키고 있다.

 

다시 꿈틀거리는 임나일본부설

《일본서기》 계체기6년조에는 일본이 임나의 4현을 백제에게 하사했다는 영토할양 기사가 나온다. 즉 이 지역이 일본의 영토였다는 전제이다. 이 내용은 일본의 일부 역사교과서나 개설서 등에 사실처럼 서술되고 있다. 일본학계에서는 임나4현을 전라도 일대로 보고 있다. 근년 고고학적 성과에 의하면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전라도 일원에 일본 열도에 산재하는 전방후원분의 외형을 갖는 고분들의 존재가 확인되어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이러한 연유로 일본열도와의 연관성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문제는 앞서 스에마츠가 제기한 임나4현이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 발견된 지역과 상당부분 일치하고 있어 《일본서기》의 내용을 뒷받침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일부의 시각도 존재한다.

근년 《송서》 왜국전에 보이는 모한(慕韓)이라는 명칭에 주목하여 5세기 단계에서 실재한 정치체로서 영산강 유역에 해당시키는 설이 있다. 《송서》 왜국전의 모한을 3세기 단계의 《삼국지》에 등장하는 광역의 마한과 경역을 달리하는 정치체로 본 것이다. 나아가 모한과 마한의 경역에 대해서 왜와 남조가 공통으로 인식했고, 왜왕들이 송조에 요구한 백제˙신라˙가라˙임나˙모한˙진한 등지에 대한 군사도독권은 침략과 지배에 대한 국가의지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영산강 유역에 모한이라는 정치체가 존재했다는 것은 상상에 불과하다. 3세기 이전의 마한이 5세기대에 특정 지역을 지칭하는 모한이 되었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전방후원이라는 외형적 특징은 왜와의 교류에 의한 형태학적 모델을 수용한 정치적 성격을 띤 문화현상이라고 생각된다. 일본 열도 내부의 정치적 해석 연장선상에서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을 해석하려는 시도는 경계해야 한다.

 

향후 과제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서기》가 만들어낸 창작이다. 당시 국제관계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허황된 이야기로 일관하고 어설픈 조작으로 곳곳에 한반도지배설과 충돌되는 내용과 모순이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일본서기》 편찬 이후 고대사료에는 보이지 않고, 중세의 《석일본기》에서조차 ‘천황의 의지를 전달하는 사자’ 정도로 이해했다. 한국병합 후 일본근대사학에서도 조선총독부가 아닌 통감부의 성격에 가깝다는 설을 내놓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료의 체계적인 이해가 어렵다고 고민한 흔적이 엿보인다.

《일본서기》는 고대 한일관계사 연구에 치명적인 오류투성이지만, 역으로 사료의 재구성과 비판적 검토를 통해 한국고대사를 복원하는데 도움이 되는 사료이기도 하다. 가야사의 체계적인 연구에 의해 임나일본부설은 설 땅을 잃었지만, 고대 한일관계사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는 남아 있다. 《일본서기》의 세계에 흐르고 있는 한반도 제국에 대한 인식, 임나일본부설이 나오게 된 배경, 일본 고대 씨족들의 가전(家傳)에 대한 연구, 사료 편찬시기의 일본 고대국가가 지향하고 있던 이념에 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분석과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