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도에게 답사란 ‘즐거움’이다. 역사를 책으로 배우는 즐거움도 있지만 조상들의 얼이 배어 있는 고적들을 직접 돌아보며 느끼는 즐거움은 말로 형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을 아우르는 학문인 사학을 배우는 학생으로서 시간을 뛰어넘어 조상들과 같은 공간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큰 기쁨이다. 최근 경기 북부와 강화도 답사를 다녀왔다. 그중 강화도는 3일의 여정 중 이틀을 소모할 만큼 돌아볼 곳도 많고, 이야깃거리도 많은 곳이다.
강화도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빼놓고 설명하기가 어려울 만큼 지리적,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곳이다. 우선 선사시대 대표적인 고인돌 유적지 중 한 곳이고, 고려시대 대몽항쟁의 거점지, 또 조선시대에는 한양으로 들어가는 외국과의 해상 교류 통로였으며, 우리나라 학풍의 한 줄기인 강화학파를 형성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 강화도의 수많은 유적지 중 광성보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상처가 남은, 19세기 조선의 외세 저항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다.
끝없는 외세에 대한 항전 의지
광성보(廣城堡)는 고려 왕실이 대몽항쟁을 위해 도읍을 강화도로 옮기며 구축한 강화 외성의 일부로 지어졌다. 이후 조선 광해군 10년(1618)에 외성을 보수하면서 새롭게 축조한 보루가 되었고, 효종 9년(1658) ‘광성보’라는 이름으로 처음 설치되었다. 이후 숙종, 영조 대에 보수·개축되었다가 현재의 광성보는 신미양요 때 파괴된 것을 1976년 다시 복원한 것으로, 당시 원형이 남아있던 덕진돈대를 기본 형태로 했기 때문에 광성보를 비롯한 다른 돈대들이 모두 비슷한 모습을 띠고 있다.
1871년 미국은 고종 3년(1866) 평양에서 있었던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강화도의 초지진을 선제공격하여 신미양요를 일으켰다. 규모는 군함 2척을 비롯한 증기선 등 28척의 함선과 현대적 장비로 무장한 828명의 보병중대로 알려져 있다. 이어 미군은 덕진진을 공략하고 광성진(광성보)으로 진격했다. 광성보는 강화도의 방어진지 중 가장 중요한 곳으로 여겨졌는데, 가파른 절벽 위에 위치해 시야 확보에 유리했으며 건너편 해안 사이에 빠른 물살이 지나는 작은 해협이 있어 함선의 접근이 어렵기 때문이다.
1미 상륙부대는 함포사격으로 어재연과 천여 명의 조선군이 지키는 광성보를 집중 포격한 뒤 성내로 진입해 육탄전을 전개했다. 전력(戰力)에서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조선군은 총알이 부족하면 총자루로, 그것도 없으면 돌을 던지고 흙을 뿌리면서 최선을 다해 싸웠다. 8시간 가량 치러진 전투에서 조선 측은 어재연 등 240여 명이 전사하고 100여 명이 자결하였으며 20여 명이 포로로 잡혔으나 미군은 거의 피해가 없었다. 광성보 전투 이후에도 조선은 척화비를 세우며 외세 항전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인지 광성보의 초소 겸 포대인 용두돈대에서 바라본 바다와 성곽은 창칼이 날카롭게 베어놓은 듯 거칠어 보였다. 해협을 가르는 바람은 따뜻한 봄 날씨 속에서도 볼이 얼얼해질 정도로 거세게 불었다. 이런 조건 속에서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고 생김새도 익숙치 않은 서양인과 싸우다 죽어간 이름 없는 병사들의 용기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소중한 사람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을까 조국을 지키기 위함이었을까. 어떠한 이유에서든 그들의 희생은 고귀했고 덕분에 조선은 외세에 굴복하지 않고 강경한 입장을 고수할 수 있었다.
전투, 그 후의 기억
어재연 전사 이후 조선군은 반격을 가해 초지진에 주둔한 미군을 격퇴시키는데 성공한다. 야간 기습을 당한 미군은 다수의 전함이 암초에 부딪쳐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잠시 퇴각하여 포로 석방을 빌미로 통상을 요구하는데 그쳤다. 신미양요 이후 조선은 강화도에 포군을 증설하고 척화론이 더욱 힘을 얻어 외국에 대한 문을 굳게 걸어 잠그게 되었다. 또한 강화도를 방비한 어재연과 수비부대의 전공을 높이 사 전투 중에 사망한 어재연은 병조판서 겸 삼군부지사(三軍府知事)로 추증되고,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53명의 유해를 모아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에 묻었다.
신미순의총은 광성보에서 용두돈대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처음에는 일곱 개의 무덤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사전답사에 이어 본 답사를 다녀오면서 자세히 보게 되었다. 전쟁에서 이름을 남기는 것은 승자든 패자든 몇몇 지휘관들 뿐이다. 전장에서 적군과 용감히 맞서 싸우다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며 넋을 위로할 순 없겠지만,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으로 이 땅을 수호한 조상들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다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광성보 전투에서 외세의 침략에 맞섰던 이들의 땀과 피는 소중했지만 이후 전개된 조선의 역사는 그들의 바람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하지만 희생이 덧없었던 것만은 아니다. 신미양요 이후 10여년이 지나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은 분명 불평등조약이었지만,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덜’ 불평등했기 때문이다. 미국과 그러한 조건으로 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던 것은 신미양요 당시 조선의 강한 저항, 즉 그들의 피흘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광성보를 답사하면서 주위 자연환경과 전적비를 보고 신미양요 당시를 상상해볼 수 있었다. 광성보에서 용두돈대를 가는 숲길은 시간이 지나 녹음이 짙어진다면 산책코스로 제격일 듯했다. 가파른 언덕을 한 바퀴 감고 있는 성곽 위를 걸으며 치열한 전투의 흔적을 느껴보고, 나아가 조선을 지키고자 싸움에 참가했던 사람들의 심정을 헤아려 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