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1906-1962)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유출되던 귀중한 옛 그림과 고려청자, 조선백자, 삼국시대 불상, 귀한 활자로 만든 책 등 민족의 문화유산을 지킨 분이다. 그는 대학교 3학년 때인 1929년 세상을 떠난 아버지로부터 많은 유산을 물려받았다. 나이 스물세 살에 조선 40대 부자 안에 들었지만 사업을 하거나 유유자적 편안하게 사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는 문화재 수집이 민족의 자존심과 존엄을 지키고 되찾는 '문화 독립운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수많은 재산과 젊음을 바쳐 선조가 남긴 귀중한 문화재를 모아 이 땅에 남긴 수집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뿐 아니라 이미 일본으로 건너간 문화재 중에서도 꼭 찾아와야 할 가치가 있다는 판단이 서면, 값을 따지지 않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했다. 이렇게 수집한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해 1937년 성북동에 최신 시설의 미술관을 세웠고, '빛나는 보배를 모아두는 집'이라는 뜻에서 '보화각(葆華閣)'이라고 이름 붙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 박물관으로 현재의 간송미술관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혜원 풍속화첩까지
간송 전형필의 수집품 중 그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소중하게 여긴 문화재는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70호)이다. 광화문 광장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의 손에 들려 있는 책이 바로 간송 전형필이 기와집 10채 값을 주고 구한 《훈민정음 해례본》으로, 현재까지는 유일본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후 집현전 학자들이 그 사용법을 설명한 책이다. 인류 역사에서 언어를 만든 후 그 사용법을 설명한 책은 《훈민정음 해례본》이 유일하기 때문에 1997년 10월 유네스코에서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조선시대 그림 중에는 우리나라 미술사 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들이 많다. 진경산수화의 창시자인 겸재 정선의 작품을 비롯해 단원 김홍도, 현재 심사정을 비롯해 조선시대 기라성 같은 화가들의 작품이 수두룩하다.
그중 조선시대 미인도를 대표하는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와 국보 제135호 '혜원 풍속화첩'에 실린 30점의 풍속화는 조선 후기 우리나라 그림 중 백미라고 평가된다. 조선시대 후기의 풍속을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는 30점의 그림이 있는데, 일본 오사카에 있는 골동품 상회에 매물로 나와 있었다. 그래서 간송 전형필이 일본에 건너가서 기와집 25채, 지금 돈으로 환산해서 최소 75억 원을 주고 사들여 우리나라로 가져왔다.
해방 후 국보 135호로 지정된 '혜원 풍속화첩'은 1957년 12월부터 1959년 6월까지 미국 워싱턴 D.C., 뉴욕, 보스턴, 미니애폴리스, 시애틀,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8개 도시에서 '한국 국보전' 순회 전시를 할 때 출품되었고, 1958년 2월 9일 자 뉴욕타임스에 소개되어 큰 찬사를 받았던 화첩이다.
과감한 결단력과 민족애로 되찾아온 고려청자들
간송 전형필은 당시 값이 너무 비싸 조선인 수집가들이 엄두를 못 내던 청자 수집에도 큰 공을 기울였다. 1935년에는 기와집 20채 값(현재 가치 약 60억)을 주고 학이 69마리 새겨진 '청자상감 운학문 매병'(국보 제68호)을 소장했다. 고려청자 작품 중 가장 아름다운 도자기 중 하나로 손꼽힌다. 도자기를 한 손에 잡고 빙그르르 돌리면 천 마리의 학이 하늘로 날아가는 것 같다고 해서 '천학 매병'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이 청자는 1961년부터 1962년까지 영국, 프랑스, 독일, 벨기에, 덴마크에서 열렸던 '한국 국보전'에 출품되어 많은 유럽인의 찬사를 받았다.
1937년에는 일본에 거주하던 영국인 수집가 존 개스비(John Gadsby)가 20년 동안 수집한 고려청자 명품 20점을 처분한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몇 차례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흥정을 거쳐 기와집 400채, 현재 가치로 환산해서 약 1,200억 원에 사들여,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게 했다. 당시 구입한 고려청자 중 7점은 광복 후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었다. 청자 기린형 향로(국보 제65호), 청자상감 연지원앙문 정병(국보 제66호), 청자 오리형 연적(국보 제74호), 청자 원숭이형 연적(국보 제270호), 백자 박산향로(보물 제238호), 청자 상감 포도동자문 매병(보물 제286호), 청자 상감 모란당초문 모자합(보물 제349호)이 그때 일본에서 되찾아 온 청자들이다.
간송 전형필이 수많은 일본인 수집가들 틈에서 과감한 결단력과 민족애를 앞세워 수집한 문화유산은 광복 후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중 12점이 국보로, 10점이 보물로, 4점이 서울시 지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나머지 수집품 5천여 점도 문화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는 학계의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많은 이가 간송 전형필을 '민족 문화유산의 수호신', 간송미술관을 '민족 문화유산의 보물창고'라고 부른다.
1962년 간송 전형필은 보다 규모 있는 박물관을 구상하던 중 갑작스레 닥쳐온 병마로 고통스러운 투병생활을 하다가 홀연히 세상을 떠났고, 간송미술관은 그의 생전에는 일반 국민들에게 개방되지 못했다. 그후 후손들은 국립중앙박물관 미술과장이자 간송 전형필의 제자인 최순우를 비롯한 여러 미술사학자들의 도움으로 정리 작업을 시작했다. 1966년 국립중앙박물관 연구원 출신의 미술사학자 최완수를 영입했고, 그를 중심으로 간송 수집품에 대한 본격적인 정리와 학문적인 연구 작업이 이루어졌다.
1971년 가을부터 2013년까지 간송미술관은 매년 5월과 10월 중순에 2주씩 소장품 전시회를 열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 지은 간송미술관은 몇 시간씩 줄을 서는 관람객을 맞기에는 한계점에 도달해 2014년부터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주제별 전시회를 열기 시작했다. 올해 8월 28일까지는 겸재 정선·단원 김홍도·혜원 신윤복 등 33명 화가의 작품 80여 점을 통해 조선 풍속 인물화의 변천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풍속인물화전'이 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