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동북아역사재단이 설립 10주년을 맞았다. 〈동북아역사재단 뉴스〉에서는 지난 10년 동안 재단의 활동 성과를 점검하고, 재단의 발전을 위한 고언을 듣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이번 호에는 재단 이사인 한상일 국민대 명예교수에게 한·일 관계를 전망하고 동아시아 역사 영토 갈등 현황 진단을 바탕으로 재단의 발전 방향에 관한 조언을 듣는다.
Q 지난 해 《이토 히로부미와 대한제국》이라는 책을 내셨는데, 책을 내시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이토라는 인물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도 궁금합니다.
한상일 책에도 언급했지만, 이토는 제가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졌던 인물이고 한때 학위논문으로 다룰까 고민했던 주제입니다. 다만 관련 내용이 너무 방대해서 연구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 망설이다가, 몇 년 전 정년퇴임 후 본격적으로 마음먹고 시작하게 된 거죠. 또 하나는 이토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평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토 히로부미라는 인물에 대한 인지도는 높지만 실제로 그가 어떤 인물이었고,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거든요. 그래서 이걸 좀 더 객관적으로, 일본 역사상 이토가 어떤 위치를 차지했고 한·일 관계에서는 어떤 역할을 했는지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느낀 거죠. 마지막으로 최근 일본에서 이토 사후 100주년(2009년)을 계기로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토가 한국의 통감으로 부임해 온 것은 한국을 병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을 문명화시키기 위해서였다는 이른바 ‘문명(文明)의 사도(使徒)’ 주장까지 했죠. 그래서 그것은 맞지 않다는 것을 책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도 있었습니다.
Q 이토라는 인물이 일본 역사에서 갖는 의미를 간단하게 설명해 주신다면, 그리고 이토라는 인물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한상일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이 부국강병의 근대 국가로 발돋움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에요. 또 그가 한국의 통감부에 와서 근무한 게 3년(1906년~1909년)이 좀 넘는데, 그 기간 동안 엄청난 일들을 했어요. 말하자면 이후 35년간 한국을 식민지배할 기틀을 마련한 거죠. 이 부분에 대해 우리가 좀 정확하고 자세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 내에도 이토에 대한 학술적 연구는 많지만, 그가 한국에 통감으로 오게 될 당시의 정치적 위상이나 한국에 오게 된 전후 과정, 통감 부임 이후 펼친 정책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는 없었습니다. 사실 이토는 영국이 이집트를 식민지배할 당시 총영사를 지낸 크로머〔Cromer Evelyn Baring, 1841-1917〕의 통감정치 기법을 모델로 차용한 뒤, 이를 상당히 계획적·조직적으로 집행해 나갔거든요. 또 이토가 통감으로 부임한 기간을 중심으로 본다면, 헤이그 밀사사건을 기점으로 이전에는 회유 정책을 펴다가 이후 강압 정책으로 바꾸면서 많은 의병들의 희생을 불러왔는데, 이러한 것들은 일본 내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이른바 ‘문명의 사도’ 논리와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죠. 이렇듯 우리는 일본이 한국을 병탄해 가는 과정에서 이토라는 인물이 지닌 양면성이랄까, 실체에 대해 정확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Q 책을 집필하면서 혹 어려웠던 부분이나 아쉬웠던 점이 있었다면 무엇일까요?
한상일 책의 후기 부분에서도 언급한 바가 있지만, 기록의 문제가 상당히 아쉬웠습니다. 관련 연구를 하면서 일본의 공문서나 외교문서를 많이 찾아보았는데, 이토는 굉장히 방대한 자료를 남겼어요. 자신이 고종과 나누었던 대화 기록이던가, 통감 통치기간 발생한 일들에 대한 세세한 기록이 지금 일본 외무성의 정부 문서로 남아있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물론이고 해당 시기를 연구하는 서양의 많은 학자들까지 그 기록을 참고할 수밖에 없는데, 과연 이 기록이 얼마만큼 정확한 것일까에 대해서는 생각을 해봐야 하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고종과 순종의 실록은 병탄 이후 일본 사람들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우리 실록에는 자료가 될 만한 관련 내용이 없어요. 이토의 기록에는 고종이 유약하고 무능한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고, 반면 자신의 업적과 관련된 내용은 아무래도 일정 부분 미화시킬 수밖에 없었을 텐데, 그러한 내용의 진위 여부에 대한 연구랄까 평가도 앞으로 연구자들이 풀어가야 할 과제가 될 것 같습니다.
Q 일본에서 정한론(征韓論)이 나오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요? 정한론은 그 이전 시기의 조선관의 단절이라고 할 수 있나요, 아니면 연속이라고 볼 수 있나요?
한상일 정한론은 1873년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제일 먼저 대두한 일본의 대외정책이었습니다. 한국을 정벌하기 위해 군대를 보낼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일본 내에서 대립과 갈등이 있었죠. 정한론을 일본 내 권력투쟁의 산물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물론 일정 부분 맞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모든 대외정책이라는 것이 국내 정치 상황과 무관할 수 없기 때문에, 단순히 그렇게만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정한론에는 두 가지 목표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한국에 대한 대외 정책을 국내 정치에 활용한 면입니다. 일본이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 한반도를 정벌해서 지배해야 된다는 논의는 사실 도쿠가와 막부 말기부터 많았지만, 당시에는 자국 내 정치 상황이 복잡해서 그걸 정책화할 수가 없었거든요. 메이지유신 이후 중앙 정부체제가 갖추어지자 정한론 문제를 전면에 다시 등장시켰는데, 그 계기가 한국과의 외교 마찰이었습니다. 메이지유신 이후 새로 들어선 정부를 인정해 달라는 당시 일본의 요구를, 대원군 집권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았거든요. 그러자 일본 유신 집권세력들은 한국 정벌이라는 대외 원정을 통해 한편으로는 대륙 진출의 기틀을 닦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을 통해 국내 정치를 안정시키는, 일종의 탈출구로 삼으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Q 일본에서는 안중근이 이토를 사살한 것이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병합한 원인인 것처럼 보는 시각이 있는데, 이토가 안중근에게 사살당하지 않았더라면 역사는 바뀌었을까요?
한상일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사살하지 않았다면 한·일 강제 병합도 없었을 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토의 암살이 한·일 강제 병합을 시기적으로 앞당겼을지는 모르겠으나, 병합 자체가 없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일의 역사 관계를 아는 사람이라면 조선을 지배하겠다는 일본의 대외정책은 어느 한 시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메이지유신 이후 일관되게 지속되어 온 기본 정책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죠. 정한론이 대두된 게 1873년인데, 이 문제를 둘러싼 마찰로 인해 일어난 세이난전쟁〔西南戰爭, 1877〕 이후에는 사실상 정한론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요. 그러다가 1894년 청일전쟁 때부터 한반도 지배 문제가 다시금 정식으로 정부 차원에서 논의되기 시작합니다. 그 이후 꾸준히 한반도 문제 처리와 관련해 일본 원로와 내각회의, 천황의 결정 등이 단계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토가 아닌 다른 사람이 통감으로 왔거나 이토가 암살되지 않았더라도 한·일 강제 병합의 큰 흐름에는 변화가 없었을 것이라고 보는 게 맞죠. 이는 1904년부터 1910년까지 한국 병탄을 추진하는 데 바탕이 된 일본의 공문서들만 찾아봐도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Q 한 · 일이 역사인식의 문제로 인한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재단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한상일 한·일 관계를 어떻게 풀어갈 지에 대해 사람들이 여러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기본적으로 양국이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를 가지면 된다고 봅니다. 한국도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상당한 국력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과거 문제에 지나치게 얽매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생각하고요. 물론 사죄와 보상도 중요하고 독도 문제, 위안부 문제 등은 단호하게 대응하고 매듭지어야 하겠지만, 한국도 이제 일본이 경계할 만큼 대국이 되었거든요. 그동안 일본이 과거사에 대해 사죄해 온 것은 그것대로 수용을 하고, 이제는 좀 더 대등한 위치에서 교류와 협력을 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반대로 일본은 일본대로 한국인들의 마음을 살필 필요가 있겠지요. 일본에도 ‘야나기 무네요시’라고 한국과 한국의 문화예술에 깊은 애정을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과거 조선총독부가 통감부 건물을 지으면서 광화문을 헐어버리려고 했을 때, 이 사람이 이에 반대하는 글을 썼어요. 그 내용 중에 “만약 입장을 바꿔 한국이 강대국이 되어 일본을 병합한 뒤 에도(도쿄)성을 허물어버리겠다고 하면, 일본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겠는가?”라고 되물어서 많은 반향을 일으켰고 결국 광화문을 헐지 못했거든요. 이처럼 일본 사람들이 입장을 바꿔 만약 한국이 일본을 침략해 일본의 왕비를 시해하고, 역사와 언어를 말살하고,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청년들을 강제 징용하고, 위안부에 보냈다면 어땠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한다면 한·일이 좀 더 공동의 목표를 향해 발전적인 관계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현재 양국의 국내 정치 상황을 본다면 당분간은 쉽지 않겠지만, 지리적으로 가까운 두 나라가 서로 교류하며 살아가려면 역지사지의 자세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봅니다.
Q 동북아역사재단이 출범한 지 올해로 10년이 됩니다. 지난 10년간의 재단 활동을 평가해 주시고, 향후 재단을 위해 조언을 해 주신다면?
한상일 재단은 지난 10년간 상당히 많은 일을 했습니다. 비단 학문적인 성과뿐 아니라 역사 문제를 현실 정책화하는 데도 많은 기여를 했죠. 한·일 관계에서는 과거사 문제나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특히 독도 문제에 대해서는 상당히 체계적인 자료 축적을 했고 앞으로도 해야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알기로 동북아역사재단은 역사 연구와 정책 개발, 역사 대화와 교류 협력, 동아시아 공동체 기반 조성의 세 가지 설립 목적을 가진 단체입니다. 이중 연구와 정책 개발은 최근 조직 개편도 하면서 점차 전문성을 갖추어 나가고 있고, 역사 교류도 향후 여러 계획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고 있어요. 다만 동아시아 공동체 기반 조성이라는 마지막 과제에 있어서는 다소 후퇴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좀 이상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나는 한·중·일이 공동의 목표를 지향하는 노력이나 움직임이 꼭 필요하다고 보거든요. 물론 당장 중국과의 동북공정 문제, 일본과의 위안부·독도 문제 등 정책 대안에 밀려 동아시아 공동체는 관심권 밖으로 벗어날 수밖에 없겠지만, 재단이 2,30년 후를 내다본다면 한 편에서는 꾸준히 추진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동아시아 공동체라는 게, 사실 그동안 좋은 이미지로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어요. 역사적으로 동아시아 공동체 관련 논의가 세 번 있었는데, 처음은 메이지유신 초기 ‘아시아 연대주의’라고 해서 한·중·일 3국이 연합하여 서양의 침략에 대응하자는 이야기였고, 두 번째는 1930년대 후반-1940년대 초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결성 주장, 세 번째가 1990년대 후반 ‘동아시아 공동체’ 논의인데 당시 우리나라도 “한국을 동아시아의 허브로 만들겠다”고 하면서 활성화되는 듯했죠. 그러다가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흐지부지되더니 지금은 아예 논의 자체가 사라져 버렸어요. 우리가 한편으로는 중국의 중화사상이나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바로잡는 역할을 해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한·중·일이 상호이해를 바탕으로 합의할 수 있는 공동체를 조성하고 지향하는 연구가 꾸준히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그러한 연구와 논의가 꼭 필요한 시기가 올 거라는 생각도 하고요. 동북아역사재단에서도 여러 어려움이 있겠지만, 동아시아 공동체 조성을 위한 노력을 지속해주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