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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최종병기 활>과 병자호란 - 영화 <최종병기 활>을 보다 -

영화 <최종병기 활>과 병자호란

 

2011년 상영되었던 영화 <최종병기 활>은 7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불러 모은 화제작이었다. 강렬한 전투 장면, 박진감 넘치는 배경음악을 바탕으로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조선이 직면했던 비극적인 상황을 다룬다. 영화 전체의 스토리가 허구에 입각해서 이어지고 일부 장면이 표절 논란을 불렀던 한계가 있긴 하지만, 병자호란 시기 민초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의 실상을 상상하는 데는 별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다.

 

각자도생할 수밖에 없었던 백성들

 

영화 속 병자호란의 비극은 황해도 어느 시골 마을의 혼례식장에서부터 시작된다. 신랑 서군(김무열 분)과 신부 자인(문채원 분)의 혼례 의식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청군이 들이닥치면서 식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신랑의 아버지를 비롯한 다수가 피살되고 신랑, 신부와 하객들은 모두 포로가 되어 청군에게 끌려가는 신세가 된다. 이들은 압록강변까지 연행되지만 조선의 관이나 군으로부터 어떤 도움이나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생사의 갈림길로 내몰린다. 그리고 탈출하기 위해 맨 주먹으로 청군에 맞서는 처절한 장면이 연출된다.

 

그랬다. 병자호란 시기 서울 이북 지역의 백성들은 청군의 칼날 앞에 사실상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었다. 침략을 자행한 청군의 돌격 앞에서 조선군은 무력했다. 황해도 정방산성(正方山城)에 머물며 청군을 방어할 책임을 맡았던 도원수 김자점 등은 전쟁 발발 사실을 제때 보고하지도 않았고, 한번 패한 뒤에는 싸움을 회피하고 도주했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겨우 들어갔지만 대다수 백성들은 자신과 가족을 스스로 지켜야만 했다. 각자도생해야 했던 백성들은 청군에게 죽거나 다치거나 사로잡혔다. 사로잡힌 민간인들을 피로인(被擄人)이라 불렀는데, 최명길은 피로인의 수를 50만이라고 했다. 청 태종 홍타이지는 삼전도에서 항복을 받은 직후 인조에게 무시무시한 요구를 들이민다. ‘청군이 붙잡은 피로인들 가운데 압록강을 건너기 전 탈출에 성공하는 자는 불문에 부치지만,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 땅을 밟은 뒤 조선으로 도망치는 사람들은 조선 정부가 도로 붙잡아 송환해야 한다.’

 

피로인들을 자신들이 ‘피땀 흘려 획득한 정당한 성과’라고 규정했던 청은 그들을 심양까지 온전히 데려가기 위해 광적으로 집착했다. 서울 주변에서 붙잡힌 피로인들은 청군의 엄중한 감시 속에 2천리 정도를 걸어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굶어 죽고 얼어 죽고 맞아 죽는 자가 속출했다. 탈출하려다 실패한 피로인 중에는 발꿈치를 잘리는 끔찍한 고통을 겪은 사람도 있었다. 사실 병자호란이 남긴 가장 큰 비극은 피로인 문제였다. <최종병기 활>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다.

 

영화 속 자인에게만 있었던 ‘오빠’

 

영화 속 여주인공 자인은 심양으로 끌려가는 도중 청군 왕자 도르곤의 눈에 들게 된다. 물론 이 도르곤은 병자호란 당시 침략에 가담했던 구왕(九王) 도르곤(多爾袞)이 아닌 가공의 인물이다. 도르곤은 미모의 자인에게 수청 들기를 강요하고 자인은 정절을 지키기 위해 격렬하게 저항한다. 하지만 도르곤의 완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폭행을 당할 위기에 처한다. 바로 그때 그녀의 신궁(神弓) 오빠 남이(박해일 분)가 나타난다. 도르곤의 목에 칼을 겨눈 남이가 자인에게 던진 짧고 건조한 대사는 관객들의 마음을 자못 아리게 한다. “무사하냐? … 미안하다 늦어서.” 남이는 자인을 극적으로 구출하여 탈출시키고 기름을 뿌려 도르곤을 태워 죽인다. 속절없이 희생당해야 했던 조선 백성들의 울분을 다소나마 풀어주기 위한 설정인 것으로 보인다.

 

자인은 병자호란 당시 가장 처참한 고통에 노출되었던 여성 피로인들을 상징한다. 당시 청군은 처녀, 유부녀를 가리지 않고 여성들을 마구잡이로 붙잡았다. 그런데 현실 속의 여성들에게는 자인의 경우처럼 믿음직한 ‘오빠’가 없었다. 피로인 여성들은 끌려가는 도중 온갖 수모에 시달렸고, 심양에 도착한 이후에는 첩이나 노비로 전락했다. 심지어 유부남인 청군에게 끌려갔던 여성들은 그들의 본처로부터 끓는 물을 뒤집어쓰는 고통을 겪기도 했다. 또 도망이나 속환(贖還) 등의 방법으로 어렵사리 조선으로 귀환했던 피로 여성들이 ‘화냥년’이라는 비난과 매도에 다시 절망해야 했던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병자호란을 바라보는 시각을 교정하는 영화

 

<최종병기 활>에는 자못 흥미로운 대사들이 많다. “내 활은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나라도 백성도 버린 임금은 이미 큰 죄인이오”, “두려움은 직시하면 그뿐,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 등등. 모두 남이가 던지는 대사들이다. 신궁 남이는 전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내팽개쳐진 채 각자도생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 민초들의 고독과 강인함을 상징하는 캐릭터다.

 

병자호란은 17세기 초반 명청교체(明淸交替)라는 동아시아 질서의 격동에서 비롯된 전란이었다. 침략을 자행한 청의 무도함과 잔인함을 역사적으로 먼저 단죄해야겠지만, 당시 조선 집권층이 보여주었던 무력함과 무책임 또한 철저하게 반추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종래까지 교과서나 개설서에 서술된 병자호란 관련 내용들은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청군에 대항했으나, 결국 청에 굴복하고 말았다”는 식의 서사를 통해 주로 ‘인조의 굴욕’만을 강조하고 있다. 수많은 피로인들이 겪어야 했던 비극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는 것이다.

 

중국의 부상 속에 북핵, 사드 배치, 남중국해, 일본의 개헌 문제 등이 맞물려 다시 격동하고 있는 오늘, 영화 <최종병기 활>을 통해 병자호란을 돌아보는 느낌은 예사롭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