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8월이 되면 유독 떠오르는 이가 있다. 《삼국유사》의 지은이 일연[一然, 1206-1289]이다. 복중(伏中)에 태어나 복중에 생애를 마친 ‘뜨거운’ 사람이어서이다. 일연의 생일이 음력 6월 11일인데, 1206년 그날은 양력으로 7월 25일이었다. 초복에서 중복 사이이다. 1289년 음력 7월 7일, 그러니까 칠석을 보낸 다음날 아침 일연은 열반에 들었다. 만 83세, 군위군 고로면의 인각사에서였다. 날짜가 그렇다보니 지금도 인각사에서 매년 열리는 일연의 다례제는 흔히 삼복 한가운데 끼는 경우가 많다. 열반에 들던 해의 음력 7월 8일도 양력으로 8월 2일이었다. 중복에서 말복 사이이다. 더위는 타고 난 모양이었다. 삼복(三伏) 더위 속에 태어나 삼복 더위 속에 돌아갔다.
한여름 더위만큼이나 뜨거웠던 그의 생애
인각사가 소중한 것은 《삼국유사》의 완성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78세 때 인각사에 와서 83세까지 5년간, 우리는 이 사이 언제쯤 일연이 《삼국유사》를 탈고했으리라 보고 있다. 더러는 점잖은 국사(國師)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국사로 친다면 무협지를 썼다고 해야 한다는 말이 나올 만큼, 일연의 ‘삼국유사 저술’은 입방아에서 자유롭지 못했지만, 이제 《삼국유사》는 이 모든 논란의 저 위에서 의연히 자기 자리를 잡고 있다. 《삼국유사》는 모든 책 위의 책이다.
왜 그런가? 일연은 역사를 왕 중심이 아니라 이야기의 주인공 중심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중심이라면 서민이나 지체가 낮은 스님도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그의 붓을 통해 정착한 이야기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입체적 생활사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유사’라는 제목을 붙이는 다른 책 또한 이와 비슷한 시도가 있었지만, 일연만큼 일연의 《삼국유사》만큼 내용과 형식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래서 《삼국유사》이다. 삼복의 뜨거운 기운을 타고 태어난 사내는 그렇게 뜨거운 역사적 선물을 우리에게 던져주었다.
고려 국사의 지위보다 더 소중했던 어머니
일연이 고향인 경산으로 돌아온 것은 그의 나이 77세가 되던 1283년 가을이었다. 그해 봄, 충렬왕은 일연을 국사로 임명하였었다. 종신직이라 할지라도 국사에 취임하면 개성의 광명사에서 보통 2~3년 정도 머물다 하산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그가 굳이 서둘러 낙향한 까닭은 95세의 노모가 고향에 살아계시고, 이제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봉양하고 싶다는 소망 하나밖에 없었다. 여덟 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 품을 떠났던 일연이었다. 그리고 70여 성상, 수행자로서 보낸 한 세월을 마감할 나이에 이르러 그가 택한 마지막 길은 어머니를 향한 염원, 오로지 그 한가지였다.
일연의 고향은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이다. 비문에서는 장산군이라 하였는데, 이곳은 본디 압량(押梁)이라는 작은 나라였고, 신라 경덕왕 때부터 장산이라 불렸었다. 장산은 고려조에 들어 경주에 소속되었다가, 충선왕 때 비로소 경산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일연의 또 다른 호가 목암(睦庵)이다. 중국 목주(睦州) 출신의 진존숙(陳尊宿)을 사모하여 지었다는데, 한 고승에게 바친 일연의 사모는 진존숙이 실행한 애타는 효심 하나 때문이었다.
경산이 경산현으로 승격된 것은 충숙왕 때였다. 국사인 일연의 고향이었기 때문에 올려준 것이다. 실로 고려 때 국사라는 지위가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웅변하는 일이다. 그러나 국사로서 이만한 권위나 지위보다 만년의 일연에게 더 크게 다가온 존재는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삼국유사》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중요 키워드이다.
어머니와 함께 한 마지막 6개월, 그리고 《삼국유사》
이 무렵 일연의 생애를 돌아볼 때마다 한 가지 애틋한 정경과 만나게 된다. 먼저 주요 일지를 정리해 보자.
1277년(71세) 경상도 청도의 운문사에 주석
1281년(75세) 경주행재소에서 충렬왕을 모심
1283년(77세) 여름에 국사로 책봉, 가을에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모심
1284년(78세) 봄에 어머니 별세, 경상도 군위의 인각사를 하산소로 정해 옮김
1289년(83세) 인각사에서 입적
일흔 살이 넘은 나이에 택한 운문사는 그가 속한 가지산문(迦智山門)과 관련이 있고, 연령으로 보아 마지막 주석처로 가장 적절한 곳이라 택했을 것이다. 그런데 4년 뒤, 뜻밖의 일로 일연은 자리를 옮겨야 했다. 고려와 몽골 연합군이 제2차 일본 원정을 떠나던 해, 왕은 경주의 행재소에서 이를 진두지휘하고 있었는데, 일연에게 위무(慰撫)의 임무 같은 역할이 주어진 듯하다. 충렬왕은 이 일로 일연과 무척 가까워졌고, 원정이 마무리 된 다음 일연을 아예 개성으로 동행시켰다. 급기야 국사로 책봉한 것은 이 일이 결정적인 계기가 아니었나 싶다.
국사로 책봉되자마자 귀향을 청원했다는 사실은 앞서 적었다. 그래서 일연이 어머니와 함께 한 시간은 그의 나이 77세 가을부터 다음 해 봄까지 6개월 정도였다. 나는 이 기간 두 노인의 행적을 상상해 보거니와, 가을에서 겨울을 지나 봄까지 긴 밤마다 마치 천일야화처럼, 세상에 나가 70여 성상 보고 듣고 배운 것을, 늙은 아들은 더 늙은 어머니에게 하나씩 이야기보따리처럼 풀어놓지 않았을까? 즐거워하시는지, 어머니의 낯빛을 살피면서 말이다. 어머니가 듣고 이해하며 재미있어 할 이야기라면 세상의 누구라도 그렇지 않을 리가 없다. 일연에게 어머니는 그 척도였다. 거기서 살아남은 이야기가 모여 《삼국유사》의 초벌이 되었으리라 나는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일연의 어머니는 《삼국유사》의 첫 독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