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계곡 입구 사거리에서 계곡을 따라 20분 남짓 걷다보면 계곡 옆으로 화양서원과 만동묘를 만날 수 있다. 화양서원과 만동묘는 송자(宋子)라고도 불렸던, 조선시대 노론 기호학파 학자 우암 송시열과 관련된 유적이다. 조선시대 충청도는 경기도와 함께 기호지방으로 불리웠으며, 충청도만을 가리킬 땐 호서지방이라 불리기도 했다.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의 학파는 지역과 관련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중에서도 호서지방은 서인-노론계의 주요 활동 무대였다. 송시열의 문인록인 《화양연원록(華陽淵源錄)》에 등재된 문인들 중 출신 지역이 확인되는 364명을 살펴보면, 호서지역이 가장 많다.
노론의 수장 송시열 관련 유적이 많은 충북 괴산
이처럼 송시열은 충청도 지방과 관련이 깊다. 그의 출생지도 충청북도 옥천군이며, 영동, 대전, 괴산 등 곳곳에 송시열 관련 유적들이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송시열을 제향하는 서원인 화양서원과 그의 유언에 따라 지어진 만동묘는 무엇보다도 관련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화양서원과 만동묘가 위치한 화양9곡은 명승 제110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송시열이 60세 되던 해부터 괴산 화양계곡에 머무르며 중국의 무이구곡을 본받아 직접 화양구곡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화양 계곡을 따라 걷는 내내 우암 송시열과 관련된 유적을 만날 수 있다. 화양 제2곡인 운영담(雲影潭) 위에 화양계당이라는 초당은 송시열이 말년에 기거하였던 곳이며, 화양 제4곡인 금사담(金沙潭) 암벽 위 세 칸짜리 암서재는 송시열이 문인들과 경론을 강론하였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제5곡인 첨성대(瞻星臺)에는 송시열이 주장했던 북벌에 대한 의지를 집약적으로 담은 ‘비례부동’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3곡인 읍궁암, 4곡인 금사담 사이에 위치한 화양서원은 송시열을 제향했던 전국 90여 개 서원 중 으뜸으로 일컬어진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송시열은 60세가 되던 1666년(현종 7년)부터 유배기간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화양구곡 근처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화양서원은 갑술옥사 이후 1695년(숙종 21년) 노론계 관료들에 의해 세워진 곳으로 사림 노론의 본거지였다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화양서원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고, 담 너머로 화양서원이라는 현판이 걸린 건물만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담장 밖 화양서원묘정비로 서원을 가까이 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화양서원 건립 후 약 10년 뒤에는 만동묘가 건립되었다. 만동묘는 명나라 황제인 신종[神宗, 1572-1620]·의종[毅宗, 1628-1644]의 사당으로 송시열의 수제자인 권상하가 건립하였다. 송시열이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준 명나라 두 황제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라는 유명(遺命)을 남겼기 때문이다. 만동묘라는 이름은 경기도 가평군에 있는 조종암에 새겨진 선조의 어필 ‘만절필동(萬折必東)’ 중 권상하가 그 글귀의 첫 자와 끝 자를 취해 지은 것인데, 그 뜻은 ‘모든 강물은 여러 번 꺾어져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는 뜻이다. 여기서 강물은 중국의 황하를 빗댄 것으로 중국의 정통과 교화가 조선으로 모아진다는 뜻이다.
사원철폐령과 일제 탄압으로 훼손된 화양서원과 만동묘
이렇게 좋은 뜻으로 만들어진 사당이었으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만동묘는 제 역할을 하기 힘들었다. 1865년 흥선군의 사원철폐령에 의해 화양서원과 함께 철폐되었기 때문이다. 후에 유생들의 청으로 다시 제사가 허용되었지만 1917년 일본에 의해 또 다시 제사지내는 것이 금지되었다. 뿐만 아니라 1937년 일본은 제사 도구를 모두 불사르고 묘정비의 비문을 훼손했으며, 1942년에는 괴산경찰서를 짓기 위해 묘당의 건물을 철거하여 자재로 사용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해방 후에야 땅에 묻혀 있었던 만동묘정비를 찾아 세우고 복원하여 겨우 현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실제 방문했을 때도 만동묘정비의 내용은 훼손이 너무 심해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마치 일부러 글자를 훼손하려고 날카로운 도구로 비석의 겉면을 망가뜨린 듯했다.
만동묘를 방문하였을 때 특이한 점은 계단의 폭이 매우 좁고, 개수는 많고, 높이는 높아서 가팔랐다는 것이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내려올 때 벽을 짚고 내려와야 할 만큼 조심스럽게 다녀야 하는 곳이었다. 후에 교수님께 만동묘를 다녀왔다고 말씀드리니 만동묘 계단이 가파른 이유는 명나라 황제를 모시는 곳이기 때문에 사대주의에 의해 경건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오르기 위함이라고 말씀해주셨다.
충청도에서 자란 내게, 화양계곡은 그저 휴가를 떠나거나 수련회를 가는 장소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화양구곡 곳곳에 송시열의 흔적이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다음에는 화양서원과 만동묘뿐만 아니라 9곡 전체를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송시열의 자취를 느끼고 싶다면 여름에 화양구곡에 방문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수풀이 우거진 숲과 계곡, 깎아내린 절벽이 보여주는 절경은 왜 이 곳에서 송시열이 후학을 양성하며 말년을 보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며, 만동묘의 계단을 오르며 조선의 사대주의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