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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김부식, 삼국의 역사를 다시 쓴 고려의 역사가
  • 정출헌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김부식, 삼국의 역사를 다시 쓴 고려의 역사가

 

고려사, 열전》 「김부식전에는 고려 인종 23(1145),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한 것이 얼마나 큰 국가적 사업이었는지 자세히 그려져 있다. 왕은 측근을 직접 보내 그 공로를 치사할 정도로 막중한 일이었다. 그건, 김부식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삼국사기를 편찬할 무렵 김부식은 나이 칠십을 넘어서고 있었으니, 이는 곧 자신의 생을 마감할 즈음 마지막 열정을 불태워가며 이룩한 일생일대의 사업이었다. 무엇이 고려 중기에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그리고 무엇이 김부식으로 하여금 자신의 혼불을 살라가며 삼국사기를 편찬하도록 했던 것일까?

     

라이벌과의 관계 속에서 평가받았던 김부식

하나의 인물과 사건에 대한 평가는 시공을 초월하여 한결같을 수 없다. 그 어떤 특별한 인물이나 사건이라 해도 사정은 다르지 않으며, 김부식(金富軾, 1075-1151)과 그가 편찬한 삼국사기를 평가하는 방식도 그러하다. 하지만 고려 중기 정치가·문장가·역사가 등 다채로운 삶을 살았던 김부식은 항상 라이벌과의 관계 속에서 평가되곤 했다. 정치가로서는 서경천도를 주장했던 묘청(妙淸, ?-1135)과 대비되었고, 문장가로서는 호방하면서도 정감 어린 시풍을 구가했던 정지상(鄭知常, ?-1135)

과 대비되었으며, 역사가로서는 삼국의 역사를 불교적 관점에서 기술한 일연(一然, 1206-1289)과 대비되었다. 김부식 하면 으레 유가적·사대적·귀족적이라는 평가가 먼저 떠오르는 것도 그렇게 해서 내려진 결과다. 특히 묘청의 시도가 좌절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하며 내린 신채호의 평가, 그리고 삼국유사에 실린 서민 관련 일화의 가치를 추켜세우며 내린 최남선의 평가는 김부식과 삼국사기를 이해하는 결정적 기준이 되었다.

     

이처럼 라이벌적인 관점으로 김부식과 삼국사기를 평가하는 것은 그것의 특징적인 면을 각인시키는 데는 효과적일 수 있지만, 객관적이고도 공정한 이해에 있어서는 결정적 한계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비교의 관점을 떠나 김부식이 걸어간 삶을 있는 그대로 꼼꼼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고려사, 열전김부식전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거기에는 김부식의 파란만장한 삶 가운데 다음의 세 국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첫째 국면은 이자겸이 군신관계의 예를 벗어나 전횡을 일삼는 데 맞서 대립했던 장면, 둘째 국면은 묘청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 대한 자세한 묘사, 그리고 셋째 국면은 삼국사기·인종실록과 같은 역사서를 편찬하여 임금으로부터 후한 사례를 받은 사실이다. 이자겸과 묘청의 난을 진압하면서 얻은 시대적 교훈을, 역사서 편찬을 통해 후대에 물려주고자 했던 역사가로 그를 기억하고 있는 까닭이다.

     

새 시대의 비전을 제시하고자 했던 삼국사기

역사를 서술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간단한 문제가 아니고, 항상 엇갈린 평가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또한, 지금은 물론이거니와 오래 전에도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보다 철저한 한화(漢化)를 기대하던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삼국사기가 황탄하고 난잡한 내용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고 불만스러워했는가 하면, 근대 민족주의 역사가들은 지나치게 한화(漢化)에 경도되어 우리 고유의 토속적인 내용을 거세해 버렸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의 역사인식과 관련해서는 더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는데, 김부식은 삼국사기편찬 사유를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삼국에 대한 우리나라의 옛 기록들로 말하면, 문장이 거칠고 졸렬하고 사적 가운데 빠진 것도 많다. 이런 까닭에 임금의 선악(善惡), 신하의 충사(忠邪), 나라의 안위(安危), 인민의 치란(治亂)에 관한 것을 모두 드러내어, 후세에 권계를 보이기에는 부족했다.

- 김부식, 진삼국사표(進三國史表)

     

잘 알려진 것처럼, 김부식은 이미 고려 초에 편찬된 삼국사(三國史)가 있음에도 삼국의 역사를 새롭게 쓰고자 했다. 칠십이 넘은 노구를 이끌고 진두지휘한 그 사업은 웬만한 사명감이 없다면 불가능했을 터다. 옛 기록들은 역사서로서의 구실을 제대로 못한다고 비판하는 것을 보면, 그의 사명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자겸과 묘청의 난을 진압한 뒤, 당대 권력의 정점에 올라섰던 그로서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역사적 비전을 삼국의 역사를 통해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실제로 그런 태도는 삼국사기곳곳에 새겨져 있다.

     

역사에 대한 필자의 견해가 명확히 드러난 역사서

삼국사기를 구성하는 두 축은 본기(本紀)’열전(列傳)’이다. 본기는 신라·고구려·백제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술하는 부분이며, 열전은 삼국을 움직여나간 인물의 행적을 기술하는 부분이다. 김부식은 본기든 열전이든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대목이 있으면, 해당 사실의 마지막 부분에서 자신의 견해를 명확하게 드러냈다. 김부식의 역사관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열전인데, 여기에서는 본기의 사례만을 간단히 살펴본다. 김부식은 삼국의 역사 기술을 마치면서 이들 각국이 왜 멸망했는지 밝혀두고 있다. 삼국의 흥망을 통해 역사의 교훈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 결과 백제의 멸망은 중국에 대한 불손’, 고구려의 멸망은 군신 간의 불화’, 그리고 신라의 멸망은 불교에 대한 숭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평가는 지금도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고려 중기의 권력을 장악하던 정치가로서 추구했던 사대교린(事大交隣)의 외교정책’, ‘문벌귀족(門閥貴族)

으로서 취했던 군신관계’, 그리고 유교이념(儒敎理念)에 기초한 정치철학과 절묘하게 대응되고 있다는 점은 예사롭지 않다. 김부식이 살아 생전 추구했던 주장과 삼국의 흥망성쇠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역사란 과거의 사건을 사실 그대로 기록해야 한다는 믿음과 달리 역사가가 보고 싶은 부분만 보고 선별적으로 기술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혹의 출발점이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삼국사기를 읽을 때마다 기억의 서사라는 말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불손하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