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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보고
평화와 독립을 향한 좌절과 희망, 명동촌
  • 손명락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3)

평화와 독립을 향한 좌절과 희망, 명동촌

 

올 여름은 내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독립기념관에서 해마다 역사전공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독립운동유적지 답사프로그램을 개최하는데, 올해 이 프로그램에 선발되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많은 조선족들이 살고 있는 연변과 백두산, 집안의 고구려 유적지, 대련·여순 등의 답사 코스는 근대 민족운동사를 연구하는 사학도가 큰 기대를 갖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지금은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중심이 연길(延吉)이지만, 100년 전만 하더라도 일본이 간도일본총영사관을 세운 간도(間島, 사잇섬)에서 조선족이 집단 거주하던 곳은 용정(龍井)이었다. ()이 명()을 몰아내고 그들의 근원이었던 만주를 봉금(封禁)지역으로 설정한 이래 사실상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1860년대 조선에 대기근이 들면서 함경도 지역의 조선인들이 간도 지역으로 이주한 것이 간도 사회의 시초였다. 당시 간도 지역은 일()도구, ()도구 등 숫자로만 분류되고 있었는데 1879년 전후 육도구 부근에 정착한 조선인 농가가 우물을 발견하여 용정이라고 이름을 지은 데서 지역 명이 유래하였다. 그리고 조선을 이은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침탈당하고 경술국치를 맞으면서 간도로의 이주는 대규모로 확대되었다.

     

명동촌(明東村)은 용정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한적한 마을이지만, 명동교회와 명동학교를 중심으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한 독립기지였다. 2차 세계대전과 일본의 패망을 전후로 민족의 비극이 가장 고조되던 시기 명동촌에서는 윤동주와 송몽규, 문익환 등의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평화로운 자연 속 독립기지 명동촌

명동촌에 처음 당도하고 느낀 인상은 바로 평화였다. 만주 땅의 지형은 한반도의 그것과 차원이 달랐는데, ‘만주라는 이름 자체가 강이 많은 곳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산과 강이 많아 골짜기가 곳곳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사이사이로 드넓은 평야가 강하게 눈을 사로잡는다. 100년 전 선조들이 독립을 꿈꾸며 동쪽()을 밝히라()”는 이름을 지은 작은 마을은 전형적인 간도의 시골마을이었다. 과거에는 지금보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고 보다 평화로웠을 것이니, 그야말로 윤동주가 별을 노래하는마을이었을 것이다.

     

평화로운 주변 자연과는 달리, 명동촌은 시작부터 비장하고 치열한 독립전쟁의 기반이 되는 곳이었다. 1910년대 조선인들의 독립 담론을 주도한 것은 독립전쟁론이었다. 당장 일제를 상대할 힘이 없으니 해외에서 교육과 군사력 양성을 통해 기반을 마련하자는 것이었다. 조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만주는 적확한 독립 기지였다. 동시에 한족(漢族)과의 관계를 고려하면서 효과적인 반일(反日)을 이루고자 하였다. 그 결과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 등 일본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3.1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3.13반일운동에서 많은 열사들을 배출하기도 하였지만, 그에 대한 보복으로 1920년 간도참변이 벌어졌다.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는 넓은 들판을 보면서도 그곳에 흩뿌려졌을 피를 생각하니 슬픔 또한 느껴졌다.

     

명동촌에는 명동교회와 명동학교, 윤동주 생가가 한 곳에 모여 있다. 명동교회는 1909년 독립운동가로 상동청년회 출신인 정재면(鄭載冕, 1882-1962)에 의해 설립된 교회다. 정재면은 근대 민족주의를 정착시키고 중국·일본의 견제를 적게 받고자 기독교를 선택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해방 후 정미소로 사용되던 것을 복원하여 명동역사전람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명동교회에서 조금만 길을 걸으면 명동학교가 있다. 명동학교는 원래 서전서숙이 폐교된 후 이를 계승하여 1908년 설립된 명동서숙이 기초가 되었다. 그런데 근대 교육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정재면, 김약연 등의 주도 하에 이름을 명동학교로 개칭하였다. 구학문의 서숙을 신학문의 학교로 대체한 것이다. 이후 기독교 교육과 민족 교육이 활발히 진행되었지만 간도참변으로 학교 건물이 불타는 등 시련을 겪고 말았다. 지금의 번듯한 건물은 2009~2010년 용정시정부에 의해 복원되었고 2011년 독립기념관에 의해 정비된 결과라고 한다.

     

명동촌에서 만나는 윤동주

최근 영화 <동주>의 흥행과 더불어 윤동주(1917-1945), 송몽규 등 명동촌이 배출한 인물들이 큰 주목을 받았다. 답사를 할 때는 아직 진입로 정비공사가 한창이어서 다소 어수선했다. 윤동주 생가는 기념관 형식으로 정비되어 있었는데, 그가 쓴 시를 시비(詩碑) 형식으로 군데군데 배치하여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일제의 압제에 시름하는 조국의 현실과 자신을 둘러싼 시련에 고통받으며 많은 명시를 남긴 윤동주에게, 고향은 한없는 그리움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윤동주, 송몽규, 문익환 등에게 현대인들의 소소한 일상이란 허락되지 않았을 것이고, 매 순간순간 숨통이 조여오는 느낌을 받으며 자신의 꿈과 이상을 펼치지 못하고 스러지는 것에 고통스러워했을 것이다. 직접 답사해 보니 활자로는 느낄 수 없는 고통, 영상으로는 부족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윤동주가 별 헤는 밤을 통해 그리워했던 명동촌은 그렇게 감동으로 다가왔다.

윤동주의 발자취는 국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종로구와 서울 교외를 이어주는 창의문(彰義門) 앞으로 인왕산 자락에서 뻗어진 시인의 언덕(청운공원)’이 있다. 연희학교에 입학한 윤동주가 매일 새벽 인왕산을 오르내리며 시상(詩想)을 떠올린 데서 따온 것이다. 달과 별이 채 자리를 비우지 않은 이른 새벽, 그는 하늘에서 빛나는 별을 바라보며 시어 하나하나에 열심을 다하여 자신의 시를 가다듬었을 것이다. 언덕 아래로는 윤동주문학관이 있어 그의 작품들을 한 곳에서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5월경 윤동주문학관에 처음 들렀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감동들이, 여름 명동촌을 다녀온 후 새롭게 다가왔다. 언제고 명동촌과 윤동주문학관을 함께 둘러볼 수 있다면, 더욱 짙은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