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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네르친스크 조약 체결의 지정학적 배경
  • 박장배 한중관계연구소 연구위원

네르친스크 조약 체결의 지정학적 배경

올해는 후금이 건국된 지 400주년이 되는 해다. 1616217, 누르하치는 허투알라(지금의 랴오닝성 신빈)를 수도로 하는 후금을 세워 자신을 칸으로 선포하고 연호를 천명이라고 했다. 후금의 건국 후 격동하는 국제정세 속에서도 큰 충돌 없이 유지되던 조선과 후금의 관계는 인조 이종이 즉위한 후 두 차례의 대규모 전쟁으로 귀결되었다. 1627년의 정묘호란과 1636년의 병자호란이 그것이다.

17세기 역사무대에도 무수한 단역들이 존재하지만 주연과 조연을 꼽아본다면, 대략 다음과 같은 배역과 사건을 들 수 있다. 17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일본과 조선의 관계가 정돈되고* 나서 조선과 후금의 관계가 정돈되었다. 그 다음에는 후금과 동몽골의 관계가 정돈되었고, 이어서 후금()의 중원과 강남 정복이 이루어졌다. 17세기 말에는 청과 러시아, 1720년경에는 청과 티베트의 관계가 정돈되었고, 1750년대에는 청이 서몽골의 준가르를 평정하였다.

청과 러시아는 1650년대부터 헤이룽장(아무르 강) 유역에서 충돌하다가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경계를 나누어 병존하는 구조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러시아와 청의 대치와 병존은 19세기 후반 연해주의 영유권 이동과 20세기 몽골의 독립이라는 점을 빼면 우여곡절 속에서도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여러 측면에서 17세기는 현대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중후반 헤이룽장 유역의 격돌을 중심으로 근현대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형성된 기원과 과정의 일단을 살펴보자.

     

후금 건국기의 동유라시아 정세

17세기 중후반 청과 러시아가 아무르 강 유역에서 충돌한 사태는 13세기 몽골제국의 형성·확장과 관계가 있다. 러시아의 탄생에도 몽골제국의 그림자가 깔려 있다. 크게 보면 러시아도 몽골제국의 유산을 물려받은 제국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1582년 예르막이 코사크인 800명을 데리고 우랄 산맥 부근의 시비르 강을 건넘으로써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이 시작되고, 러시아는 이때부터 1647년 오호츠크 해에 도달할 때까지 동진을 계속하였다.

한편 16세기 말엽의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 명을 주연으로 하는 동유라시아 국제전쟁이었고, 서태평양 지역이 대항해시대의 영향권에 들어가고 해양세력의 활동력이 강해지는 현상을 보여주었다. 전쟁을 일으킨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의 길을 빌려서 대명(大明)을 정벌할 것이다. 위배한다면 먼저 조선을 정벌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명을 점령한 다음 인도까지 정복할 것이며 베이징(北京)에 천황을 두고 자신은 닝뽀(寧波)에 머물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 전쟁은 동유라시아 각지의 대륙세력들, 특히 몽골과 티베트와 서역에 연쇄적인 영향을 주었다. 전쟁의 결과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향후 1875년 무렵까지 교린 관계를 유지하는 식으로 정돈되었지만, 조선의 피폐와 명의 내우외환 속에서 상대적으로 힘의 공백이 초래된 요동(만주) 지역에서는 이후 중국 대륙을 호령할 세력이 급성장하고 있었다.

여진인(후의 만주인)들은 요동 북부에서 출발하여 1644년 베이징을 차지하였다. 1153421, 금이 현재의 베이징을 수도로 정한 후 베이징은 동유라시아 중심부로 부상하였다. 문제는 만주인들이 대거 중원 각지로 이주하면서 북만주 일대에 일종의 힘의 공백이 초래되었다는 점이다. 만주인들이 중원과 강남을 차지하는 과정은 매우 격렬한 역사적 격돌 과정이었다.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홍타이지는 162691, 심양 고궁에서 칸으로 등극했다. 1634년 베이징 북쪽 동몽골 부족들의 복속은 명·청 교체기 동유라시아의 역학 구도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 병자호란은 이런 배경 하에서 발발하였다.

     

1637112일 최명길 등이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군 진영으로 가서 전달한 국서 내용에 임진왜란 당시 명이 천하의 군사를 동원하여 조선을 구원했다는 재조지은을 거론했다. 홍타이지는 천하는 크고 나라는 많다. 너희를 구해준 것은 오직 명나라 하나뿐인데, 너희는 어째서 천하를 운운하는가? 명나라와 너희의 허탄하고 망령됨이 끝이 없구나라고 질타했다. 1636년 국호를 후금에서 청으로 바꾼 홍타이지는 =천하라는 인식을 팽개쳐버린 상황이었다.***

새로운 천하관으로 무장한 청조는 1644년 베이징을 장악하고 제국의 수도로 정한 후 명의 잔존세력 등 중원 세력의 반발, 청과 협력한 동몽골 부족에 대한 통제와 활용, 청에 복속하지 않으려는 서부 몽골 부족들의 제압, 헤이룽장에 출현한 러시아들의 진출 저지 등 사방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었다. 청이 직면한 도전은 병존했지만 시기마다 우선순위가 달랐다. 중원세력과 몽골세력을 제압하고 통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러시아인들과의 관계를 정돈해야 했다.

 

* 미국이라는 요소를 빼면, 국제질서의 측면에서 17세기 당시와 현재의 연속성은 매우 두드러진다. 먼저 임진왜란(1592~98)을 일으켜 해양세력의 대두를 동아시아에 과시했던 일본이라는 요소는 동아시아 역사의 매우 중요한 변수로 등장하여 오늘날까지 일정한 역할을 해왔다. 흥미로운 점은 일본의 임진왜란 도발과 유사한 시기에 벌어진 러시아의 팽창은 대항해시대(15세기 중반에서 18세기 중반)에 이루어진 사태라는 점이다.

** 김상준 . 윤유숙, 근세 한일관계 사료집 : 야나가와 시게오키 구지 기록(柳川調興公事記錄), 동북아역사재단, 2015, 44

*** 한명기, 역사평설 병자호란②》, 푸른역사, 2013, 165

 

 

16-17세기 러시아의 동진 과정과 흑룡강 일대 헤이룽장 유역의 약사성 전투와 국제질서 재편

러시아는 레나 강변에 야쿠츠크(1632)를 세우고, 아무르 강 인근에는 알바진(1650)과 네르친스크(1659)을 세웠다. 17세기 중반까지, 여러 러시아 원정대가 아무르 강까지 진출했다. 남하하는 러시아 세력에 맞서 청은 1652년 지금의 지린성 닝안(寧安) 지역인 닝구타(寧古塔)에 군사를 주둔시켜 막게 했다. 청은 1653년에는 사르후다를 닝구타 앙방장경(후에 장군(將軍)으로 개칭)으로 삼으면서 이듬해 조선에도 원병을 요청하였다.

조선의 효종 이호는 1654년 변급이 지휘하는 150, 1658년에는 신유가 이끄는 262명의 전투병을 파견했으니 이것이 나선정벌이다. 1차 원정 당시의 전투 장소는 숭화강과 목단강이 만나는 지점(依蘭縣)이었다. 스테파노프는 1654(순치 11) 여름, 370명의 원정대를 데리고 숭화강으로 진입했다가 격퇴되었다. 4년 뒤인 1658610(음력) 조선군 2차 원정(2차 나선정벌) 때 사르후다의 지휘 아래 조선과 만주 연합군은 숭화강과 아무르강의 교차지점 30리 아래(同江市)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스테파노프의 러시아군을 격파했다. 스테파노프 일행의 궤멸은 러시아 코사크가 헤이룽장에 침입한 전초전(탐색전) 단계의 종결을 의미한다. 아무르 독군(督軍)의 설치에 따라 이후 러시아의 아무르 강에 대한 침입은 보다 대규모로, 조직적으로 엄밀하게 진행되었다.

제2차 나선정벌 당시 조선군의 이동경로1669년 친정 시작 직후 발생한 삼번의 난’(1673~1681)을 진압한 강희제는 북방으로 주의를 돌렸다. 1685(강희 24) 여름 사부수 장군을 지휘관으로 한 수륙 대군으로, 톨부진이 지휘하는 러시아측의 약사성을 맹공함으로써 약사성 전투가 시작되었다. 러시아군은 3배나 많은 청군의 공격을 1년 가까이 막아냈다. 강희제는 일단 군대를 물려 재정비한 다음 다시 알바진을 공격하려 했으나 1688년 서몽골의 오이라트(준가르) 갈단이 청에 복속하고 있는 할하 부를 공격해 왔다. 강희제는 러시아와 국경 문제를 조속히 매듭지어야 했고, 당시 러시아도 사정은 비슷했다. 1686년부터 폴란드, 베네치아,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오스만튀르크와 전쟁을 시작했던 것이다. 어느 쪽도 상대방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지 못한 채 긴장을 유지하다가,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다.

러시아 측의 골로빈 사절단(1687~89)은 관리와 사병 약 2천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689년 청 측 사절단에는 소어투, 통궈강, 흑룡강장군 사부수 등과 함께 예수회 선교사인 페레이라, 제르비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168998일 청과 러시아의 전권대리인들이 서명하고 라틴어본 2부를 상호 교환했다.* 네르친스크 조약에 따라 청과 러시아 사이의 국경이 문서상으로는 결정되었다. 이로써 1650년대부터 시작되어 30년 가까이 진행된 양국 사이의 무력분쟁도 종식되었다. 청이 러시아의 남하를 대체로 헤이룽장 선에서 막는 것으로 타협이 이루어진 것이다. 러시아는 이 조약을 통해 청과의 무역 통로를 확보했다. 청의 강희제는 준가르와 러시아의 결탁을 사전에 차단하고 갈단과의 전쟁에 전력을 기울일 수 있었고, 마침내 1750년대 준가르를 멸망시키고 청의 신장 지역 지배를 실현시켰다.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은 중앙유라시아의 세계를 청과 러시아가 양분하는 기점이었다.


헤이룽장 유역박물관의 네르친스크조약에 대한 전시다시금 주목해야 할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17세기 중후반 청과 러시아가 아무르 강 일대에서 충돌했던 역사적 과정을 중국과 러시아는 상대방의 공격과 영토 침탈 사례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현지 토착민들의 시각은 달랐을 것이다. 그들에게 총포로 무장한 식민세력은 너무나 낯설고 사나운 외부인들이었다. 나름대로 자신들의 문화를 일구며 살고 있는데, 갑자기 외부인들이 나타나 무력으로 위협하며 세금을 내라, 전쟁에 나서라, 개종해라하는 것이 삶의 터전과 문화 파괴로 느껴졌을까, 새로운 기회의 제공으로 느껴졌을까. 두 가지 요소가 다 있었겠지만, 현실적으로 토착인들은 짧은 시간에 소수부족으로 전락했다.

17세기 조선이 경험한 동유라시아 국제질서의 재편은 병자호란과 같은 대형 전쟁도 있었고, 두 차례의 나선정벌같은 소규모 원정도 있었다. 거기서 드러난 조선의 역량은 분열된 리더십, 정보 수집 능력의 부실함, 보잘 것 없는 재정과 군사력 등 매우 초라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경험은 실패의 경험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나선정벌과 같은 개별 사안이 아니라 동유라시아 차원에서 조선의 경험을 보면 조선은 당시 동유라시아 국제질서 재편의 단순한 조연이 아니라 의도하지 않은 주연이었다.**

병자호란 무렵 조선은 명과 후금 두 강국 사이에 끼여 있는 약소국이자 종속변수’”였을지 모르지만, 상대를 알고 자신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했다. 서북방과 동남방 양쪽 모두를 적으로 만들 수 없는 냉혹한 지정학적 현실이라고 꼭 불리한 것만은 아니다. 1933년 당시 경성에 있던 흥아연구소의 도요카와 젠요 소장은 일본 제국의 수도를 옮기자는 경성천도론을 주장한 바 있다. 팽창주의자의 어설픈 주장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서울의 동유라시아 중심도시적 가치를 드러낸 평론으로 볼 여지도 없지 않다. 역사 연구기관 등을 역사적 상징성이 큰 용산공원 부지 내로 이전하고 동유라시아 역사와 미래방략을 주도적으로 연구하는 기능을 발휘하도록 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한국이 평화 선도국이 되어야 한다면,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동북아 평화협력 구상과 함께 현정부의 트로이카 국정과제를 이루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의 대륙, 창조의 대륙, 평화의 대륙을 기치로 하는 유라시아 연결 제안은 분단 이후 처음으로 외교정책 상에서 유라시아를 전략적 협력 공간으로 언급했다.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는 실크로드 익스프레스(SRX)’의 실현과 함께 북극항로의 개발을 통한 유라시아 양 끝의 해상 연계 등도 모색하였다는 측면에서 유라시아 해상 이니셔티브로도 인식할 필요가 있다


 

* 보리스 이바노비치 트카첸코 지음, 성종환 옮김, 러시아-중국 문서에 나타난 동부국경, 동북아역사재단, 2010, 27

** 15세에 서울이 속수무책으로 함락당하고 국왕이 수치를 당하는 병자호란을 겪은 유형원(1622-1673)1652년 집필하기 시작하여 1670년 완성한 반계수록에서 토지제도, 교육제도, 군사제도 등 종합적인 개혁방안을 제시하고자 했다. 개혁안의 전제는 리더십의 현명한 안목과 높은 도덕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