돛 걸어 창해에 배 띄우니
긴 바람이 만 리에 통하네
최치원(857~?)의 「범해(泛海)」의 일부이다.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2013년 한·중 정상회담 환영사에 이 구절을 인용하여 크게 화제가 되었다. 또 ‘2015 중국 방문의 해’ 개막식 축하 메시지에서는 “우리나라 화개동은 항아리 속 별천지”라는 「화개동」 시구를 언급했다. 그렇다면 왜 중국의 국가주석이 21세기 한·중 문화교류의 키워드로 통일신라시대 인물인 최치원을 선택했을까?
신라 숙위유학생의 인백기천(人百己千)
최치원의 생애는 《삼국사기》 「열전」에 전한다. 경주 사량부 사람이며, 아버지는 견일(肩逸), 형은 해인사에 주석한 현준(賢俊) 스님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찬찬하고 민첩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했다. 12세 때 바다의 배편을 따라 당나라로 유학 갈 때 아버지는 “10년 안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가서 힘써라”고 말했다니 아들에 대한 기대와 야망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신라 후기에는 많은 유학생들이 당나라로 건너갔는데 대개 6두품 출신이었고, 최치원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숙위학생으로서 사신을 따라 입당하여 국자감에서 수학했다. 스스로 머리를 묶어 대들보에 걸고 가시로 허벅지를 찌르며 잠을 참았으며, 남이 백의 노력을 할 때 천의 노력을 다한 결과 6년 만에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한·중 문화교류의 주역
당나라는 경제적·문화적 번성을 누리며 외국 유학생에게 우호적이고 개방적인 정책을 펼쳤다. 수도 장안은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 신라인, 일본인,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아랍의 상인까지 모여들어 국제도시를 이루었다. 이들 외국인은 당나라와 자국을 왕래하며 문화를 교류했다. 821년부터 약 70여 년간 신라에서 파견한 유학생은 40여 명에 이르렀으며, 이들은 한·중 문화교류의 주역이었다. 최치원은 과거에 급제하고 선주 율수현위에 임명되기 전까지 낙양을 유람했는데, 이때 나은(羅隱), 고운(顧雲), 장교(張喬) 등의 당나라 유명 시인들과 교류했다. 최치원이라는 이름이 중국 문인들 사이에 알려져 《신당서(新唐書)》 「예문지 藝文志」에 그의 저술 목록이 수록되었고, 《전당시(全唐詩)》에는 그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후대 학자들이 당나라 시인 이백의 ‘기경상천(騎鯨上天)’ 고사를 인용하여 최치원을 시선(詩仙)으로 부른 것도 당과 신라를 같은 문화적 맥락으로 이해하려 했던 결과이다.
황소(黃巢)의 난과 <격황소서 檄黃巢書>
최치원이 활동하던 시기의 당나라는 당쟁과 환관의 횡포가 극심하여 정세가 어지러웠다. 874년 황소가 난을 일으켜 기세를 드높이고, 장안에 스스로 나라를 세워 항복한 관리를 기용하는 등 통치를 굳혀갔다. 880년 그는 난을 토벌하는 사령관인 고변(高騈)의 종사관이 되었다. 5년 간 그 휘하에서 감찰과 문한의 임무를 수행하였는데, 이때 유명한 <격황소서 檄黃巢書>를 지어 문장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 황소의 난에 큰 타격을 입은 당 조정은 말기적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고, 최치원은 당 사회의 급변하는 정세와 혼란상을 경험했다. 당시 신라 역시 혼란한 정치적 국면을 당해 있었다. 884년 그는 신라로 돌아왔다. 당에서의 자신의 경륜이 신라에 쓰이기를 바라며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과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을 헌강왕에게 올렸다. 《계원필경집》은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 문집이다.
신라의 개혁을 꿈꾸며 올린 시무책(時務策)
귀국 후 그는 국왕의 측근인 시독과 사서원의 문한직을 맡아 여러 글을 찬술했다. <대숭복사비명>과 <낭혜화상비명>을 작성했던 890년까지 중앙관부의 직을 맡았다. 그러나 당시 신라는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나는 농민들의 반란, 지방호족들의 군웅할거 등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가 겪었던 당 말의 상황이 신라에도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조정은 최치원과 같은 도당유학파들을 군과 현의 장관으로 임명하여 혼란한 지방사회를 효율적으로 통제하고자 했다. 893년 최치원은 중앙정계로 복귀했다. 그는 국제정세의 흐름 속에서 신라를 파악하고, 기울어가는 나라를 일으키기 위한 개혁안을 작성했다. 진성여왕에게 올린 시무책 10여 조는 그의 개혁의지를 담은 것이다. 왕은 기뻐서 시무책을 받아들이고 그에게 아찬의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말세에 그를 의심하고 꺼리는 자가 많았다”고 한 것처럼, 그의 개혁안은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개혁은 중앙 귀족들의 반발에 부딪혔고 진성여왕은 폐위되었다.
소요자방(逍遙自放)과 은둔, 새로운 시대의 도래
최치원은 벼슬을 버리고 산과 숲 속, 강이나 바닷가에 대를 짓고 소요하며 스스로를 놓아버렸다. 그는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 해인사에 은둔하며 생애를 마감할 때까지 저술활동을 했다. 방이 뜸뜨는 연기로 가득했고, “때로는 삶이 귀찮아 몸을 태워버리려는 생각”을 할 만큼 병마로 고통을 겪었다. 그런 동안에도 908년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를 찬술했고, 이를 마지막으로 그는 전설 속으로 사라졌다. 《삼국사기》 에서 최치원은 태조가 고려를 창건할 것을 알았기에 “계림황엽 곡령청송(鷄林黃葉 鵠嶺靑松)”이라는 글로써 태조의 왕업을 은근히 찬조했다고 적고 있다. 그는 신라의 정치적 운명을 읽었고 이를 바로 돌리기 위해 개혁안을 올렸다. 그러나 개혁의 꿈은 좌절되었고 결국 신라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의 별장이 있었던 창원의 월영대와 마지막 은둔처인 합천 가야산은 고려, 조선시대에 학자들의 순례지로 명성이 높았다. 그들은 이곳을 찾아와 최치원을 그리워하고 그의 정신을 더듬으며 수많은 시를 남겼다. 그들이 최치원의 유적을 찾아 확인하려 했던 정신은 무엇이었을까? 21세기 한·중 문화교류의 키워드로 되살아난 최치원, 그의 가치는 문장가뿐만 아니라 치열한 학자적 탐구 정신에서도 찾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