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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고치현(高知縣)에 조선의 두부를 전파한 박호인의 후예들
  • 윤유숙 한일관계연구소 연구위원

고치현(高知縣)에 조선의 두부를 전파한 박호인의 후예들

에도시대 일본 사회에 조선인이 정주하게 된 발단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의해 연행된 조선인 전쟁포로, 즉 피로인(被虜人)의 존재에서 유래한다. 조선 침략에 참가한 다이묘들이 많았던 규슈(九州), 주고쿠(中國), 시코쿠(四國)일수록 다수의 조선인이 납치되었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서일본 지역은 상대적으로 피로인도 많았고, 일본에서 정주의 길을 택한 조선인도 많았다. 실제 서일본 지역에는 피로인을 거주시키기 위해 설정한 조선인마을 당인정(唐人町)’ 혹은 고려정(高麗町)’이 곳곳에 존재했다.

그러다보니 정주한 조선인 중에는 일본 사회에서 주목할 만한 업적을 세우거나 영향력을 발휘한 사람들도 있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람이 현재 전세계적으로 일본 도자기를 대표하는 사쓰마야키의 심수관, 아리타야키의 이삼평 같은 도조(陶祖)이다. 그런데 시코쿠(四國)의 고치현(高知縣)에는 조선 두부를 현지에 전파한 박호인이라는 조선인이 있었다.

     

두부 제조와 판매로 이름을 날린 박호인 일족

고치현(高知縣) 고치시(高知市)에는 하리마야 다리에서 남쪽으로 1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시내를 관류하는 가가미가와(鏡川)가 있는데, 그 강 연안에 당인정(唐人町)이 존재했다. 임진왜란 당시 고치현은 다이묘 초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의 영지였는데, 그가 1593년 경상남도 웅천성(熊川城)을 공격했을 때 경주에서 원군세력으로 온 박호인과 일족을 포획하였다. 처음 도사에 연행되었을 때 박호인 일행의 거주지는 모토치카의 우라도 성(浦戶城) 근변이었다. 일족과 가인을 합해 30, 그 외에 연행되어 온 조선인이 350명 정도 있었다. 17세기 말 쓰여진 도사모노가타리(土佐物語)에 의하면, 모토치카가 생포한 조선인 80여 명을 불쌍히 여겨 정옥(町屋)을 세워주니 당인정(唐人町)이라 불렸고, 그들은 두부(豆腐)라는 것을 만들고 팔아 하루의 끼니를 삼아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그중 박호인(朴好仁)은 이름 있는 군장(軍將)이어서 빈객처럼 정중히 향응했는데, 박호인의 아들 원혁(元赫)은 모토치카의 고쇼(小姓 : 주군의 곁에서 시중을 들며 잡용(雜用)을 관장하는 무사)가 되었고, 딸은 정실 부인의 시녀가 되었다.

모토치카가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하자, 도사에 전봉(轉封)되어 온 새로운 다이묘 야마노우치 가즈토요(山內一豊)는 박호인 일족의 제역(諸役)을 면제하고 나가하마(長浜)에 토지 3()을 주어 우대하였다. 지금도 그들이 처음 거주했던 우라도(浦戶) 가쓰라하마(桂浜)의 인근에는 당인옥부적(唐人屋敷跡)’이라 불리는 곳이 있고, 나가하마 지역에도 당인전(唐人畑)’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야마노우치 가즈토요가 우라도에서 고치시로 거성을 바꾸면서 박호인 일족에게 가가미가와 연안에 67평 정도의 저택을 주었다. 다른 피로인들도 주변에 집주하도록 하고, 가인들이 행하는 두부 제조와 판매에 독점권을 주어 성() 주변 인근 지역에서 다른 사람이 두부 영업을 하지 못하도록 금하는 대신 정월(正月) 인사의 형식으로 은 2()를 상납하게 했으니, 두부 판매는 막부 말기까지 박호인 일족의 전매특허가 되었다. 가가미가와 북안(北岸) 일대에 있던 당인정은 이러한 경위를 거쳐서 형성된 조선인 마을이었다.

 

고치현에의 두부전래도 라는 제목으로 한반도가 표시되어 있다

두부를 일본 내 서민 식품으로 확산시키다

메이지시대 초기에 쓰여진 가이잔슈(皆山集)는 두부의 전래에 관하여 조선의 피로인 박후인(朴候仁)이라는 자의 자손들이 당인정에 거주하면서 처음으로 두부를 만들었다. 지금도 곳곳에서 이것을 만들지만 그곳 맛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근대 메이지시대가 되어서도 고치현 두부의 기원이 박호인과 그의 후손이라고 전승되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까지도 일본인들에게 대중적인 식재료로 사랑받는 두부가 서민들의 식품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만든 것은 당인정의 조선인들이다. 두부가 일본에 전래된 것은 고대 나라시대 혹은 헤이안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는 왕도를 중심으로 기나이(畿內) 일부 지역 귀족이나 고위 관리에 한정되어 소비되던 진품이었다. 고치현의 경우는 피로 조선인을 통해 조선식 두부가 주변 사회에 전파되어 식생활에 영향을 끼친 대표적 사례인 셈이다.

오늘날 일본인들이 즐겨 먹는 두부는 연두부이지만 과거 당인정에서 생산된 두부는 끈으로 묶어 운반할 정도로 단단했다. 고치현 북부 도쿠시마현(德島縣)과의 경계 지역에 위치한 오토요초(大豊町) 지역에서는 지금도 이런 두부가 생산되고 있으며 이를 도진도후(唐人豆腐)’라 부른다. 과거 당인정이 있던 거리에서 현재 그 후손이 경영하는 두부가게를 찾아볼 수는 없지만,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하기 전 어느 시기까지만 해도 당인정은 두부 향기로 가득한 곳이었고, 그 곳의 두부는 고치시를 대표하는 명산품이기도 했다.

조선의 군장이었다는 점과 두부 제조기술을 전파한 공적을 인정받아서인지 박호인은 현지에서 상당한 예우를 받았음에도 끝내 도사에 정주하지 않고 여기저기 거처를 옮긴 끝에 조선으로 귀국했다. 도사를 떠난 그는 이요(伊予, 현재 에히메현)의 다이묘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에게 의지하다가,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가 지배하는 히로시마(廣島)에서 저택을 하사받고 두 명의 자식을 얻었다. 하지만 1617년 방일한 조선통신사를 따라 히로시마에서 태어난 두 아이와 함께 조선으로 귀국했다. 한편 도사에 남겨진 박호인의 장남 박원혁은 야마노우치 가즈토요의 부인 시녀였던 도토미(遠江)라는 일본 여성과 결혼하여 네 명의 아들을 얻었다. 그 후 성()을 아키즈키(秋月), 이름을 조지로(長次郞, 후에 長左衛門)로 개명했고, 1652년 그가 사망한 후에도 자손들은 번성했다고 한다. 박원혁의 묘는 당인정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히쓰잔(筆山)에 위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