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륭제는 개항을 요구하는 매카트니 사절에게 이렇게 큰소리 쳤다고 한다. “땅이 크고 나는 물건이 많으니(地大物博) 우리는 당신들의 물건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아무리 큰 나라도 세계사의 흐름을 비켜갈 수 없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은 아편전쟁에서 패했고, 패전 조약으로 주요 항구들을 강제로 열어야 했다.
동아시아 근대사 속 ‘개항’
동아시아 근대사에서 ‘개항(開港)’처럼 역사에 의해 이리저리 비틀린 단어는 없을 것이다. 항구는 원래 바다로 열려 있는데 무슨 이유로 다시 열어야 했을까? 항구가 열려 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아편이 들어왔겠는가? 개항은 이미 비틀리고 있는 팔을 꺾은 것뿐이다. 영국이 아편을 미끼로 중국의 해안을 강제로 열었듯이 얼마 후 일본은 운요호를 미끼로 분쟁을 일으켜 맺은 조일수호조규로 부산항을 열었다. 제국주의 세력이 상시적으로 쓰던 도발-전투-불평등조약의 공식은 황해를 사이에 둔 양국에 그대로 적용된 셈이다.
난징조약은 홍콩 할양과 상하이를 비롯한 5개 항구의 개방이 골자다. 이후에도 중국은 열강과의 싸움에서 패배를 거듭하고, 텐진조약은 양쯔강을 따라 이어진 내륙 항구들도 모두 개방할 것을 명시했다. 당시 이 내륙 수로 주위로 난징을 비롯한 중국 최대의 도시들이 밀집해 있었고, 그 동쪽 끝이 상하이였다. 상하이는 이렇게 굴욕의 첨단에 서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상하이는 이미 굴욕이 가져다 준 성과만 남고 그 외피는 벗어 던진 듯하다.
중국 현대사를 바꾼 바람은 언제나 남쪽 개항지역에서 불어왔다. 공화혁명(국민혁명)은 최남단 개항장인 광저우에서, 공산혁명은 북단이었던 상하이에서 시작했다. 국민당은 난징에 정치 중심을 두었지만 상하이 자산가들의 자금줄에 기댄 정부였고, 상하이에서 시작한 공산혁명은 텐진조약의 개항장을 따라 한커우로 이어졌다. 그러나 제국주의 시절은 여전히 끝나지 않아 영국에 이어 일본이 밀려온다. 중·일전쟁 시기 상하이, 난징, 한커우를 차례로 잃은 국민당 정부는 결국 충칭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아편전쟁 이래 양쯔강은 수시로 역류했다.
돌고 도는 역사의 상징이 된 상하이
그럼에도 역사에는 막을 수 없는 순리(順理)가 있는 듯하다. 막아도 큰 강은 어쩔 수 없이 동쪽으로 흘러나갈 수밖에 없다. 기록이 남아 있는 춘추전국시대 이래 상하이 해안선은 계속 동쪽으로 밀려가 아예 지도를 바꿔놓았다. 양쯔강 하구의 충밍도(崇明島)는 끊임없이 흙을 실어 나르는 강 때문에 계속 커지고 있다. 강이 땅을 넓히듯, 오늘날 양쯔강 유역 5억 인구의 노동은 상하이의 힘을 불리고 있다. 충칭에서 출발한 선단이 상하이에서 양쯔강을 벗어날 무렵 규모는 열 배로 불어나고, 이 모든 물량을 합친 것보다 더 큰 상하이 현지의 선단이 합세하여 세계로 나선다. 최근 다보스에서 시진핑이 트럼프를 대신하여 자유무역의 수호자임을 선포한 것도 세계 최대의 도시가 된 인구 3천만의 상하이를 믿기 때문이다. 지난 20세기 후반, 부산항은 우리 노동자들의 고된 노동 덕분에 수출입국의 상징이 되고 세계 유수의 항구로 발돋움했다. 중국의 항구들도 과거 역사의 굴욕을 앙갚음하겠다는 듯 세계 시장을 향한 야망을 숨기지 않고 있으며, 그 중심이 바로 대륙 최대의 항구도시 상하이다. 역사는 이렇게 돌고 돈다.
중국에서 개방을 상징하는 세력을 흔히 ‘해파(海波)’라고 한다. 해파의 꼭대기 격인 상하이방(上海帮)은 권력 주위를 벗어난 적이 없다. 20세기 전반 상하이는 악질적인 갱스터와 고리대금업자들이 활보하고, 술을 비롯한 온갖 향락이 판치는 ‘데카당스’의 도시, 중국을 뒤집겠다는 혁명가와 정치가들이 모여 저마다 다른 꿈을 꾸는 변화의 도시, 조계지의 외국인 거류민과 외국 사업가들이 버글거리는 성급하게 세계화된 도시였다. 덩샤오핑은 1991년 상하이에서 천안문 민주화 운동으로 잠시 멈춘 개방을 재천명하면서 상하이의 상징성을 십분 활용했다.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풍성한 도시
오늘날 상하이는 옛날의 혁명가들을 잃은 듯하고, 데카당스의 분위기도 조금 줄어든 듯하지만 여전히 과거의 모든 것을 유지하고 있다. 이 모든 과거의 유산 위에 후기 산업화시대의 기회를 탄 대자본가들의 돈이 더해진 상하이는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고 있다. 겨우 20년 전 황무지였던 푸동은 하늘을 가리는 빌딩들에게 점령당했다. 하지만 백화점과 고급 상점이 밀집한 난징로 중심가를 조금만 벗어나면 여전히 화장실 하나를 단위로 옹기종기 모인 1930년대 그대로의 상하이가 있다. 이 건물 저 건물에서 떼어낸 벽돌을 모아 만든 모자이크식 상하이 뒷골목 건물은 베이징 후통(胡同)의 고전미와 다른 애잔함이 묻어난다. 쉬자후이(徐家滙) 옛 골목의 자그마한 상점들은 북경의 우악스러움과 대비되는 어쩌면 일본인들이 만든 듯한 착각이 드는 상하이식 ‘디테일’이 살아있다. 건물에 어울리게 진열대의 물건은 모두 작고 섬세하고, 사람들은 조곤조곤 이야기한다. 상하이가 어떻게 변하든 옛 상하이의 맛은 시 중심과 외곽에서 그대로 이어진다.
앞으로도 당분간 남풍은 계속 이어질 것 같다. 황하는 말라 이제 진흙을 실어 나를 힘이 없지만, 양쯔강의 기세는 꺾이지 않고 있다.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를 요구하지만 북경은 해파(海波)들의 희망만큼 빨리 변하는 곳이 아니고, 가끔 그곳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수십 차례 상하이를 오가다 이제는 숫제 이곳에 살고 있지만 상하이의 풍성함을 이해하는 것은 세계를 이해하는 것처럼 여전히 어렵다. 하지만 상하이에서의 모든 행정과 서비스가 베이징의 몇 배 속도로 흐르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과거 상하이 ‘데카당스’가 그랬듯 상하이 생활방식은 중국 첨단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도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상하이를 방문하거든 대한민국 임시정부 옛 터를 찾아가는 것을 잊지 말자. 황푸강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신테띠(新天地)라는 상하이에서 가장 멋진 거리에 자리잡고 있으니 찾기도 어렵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