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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쇄국시대에 조선인이 된 일본인
  • 윤유숙 (한일관계연구소 연구위원)

에도막부의 지시에 의해 유학자 하야시 후쿠사이(林復斎) 등이 1853년 무렵 편찬한 대외관계사료집 통항일람(通航一覽)에는 1566~1825년까지 일본이 주변국과 맺은 통교관계가 나라별, 연대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통항일람에는 조선통신사의 방일은 물론이거니와 그외 일본을 둘러싼 주변국과의 교류가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어 에도시대 일본의 외교사 연구에 불가결한 기초사료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에는 조선통신사와 관련된 흥미로운 일화가 등장한다. 1748년의 통신사를 기록한 통항일람62(朝鮮國部38)에 수록된 일화를 해설과 함께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통항일람에 등장한 조선통신사 이야기

     

조선통신사 행렬도동북아역사재단17484,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 일행 중 한 명이 말을 타고 통사(通事) 한 명과 관리를 대동한 채 오사카 규타로마치(久太郞町)에서 향() 가게를 경영하는 시로헤이(四郞兵衛)라는 사람을 방문했다. 원래 통신사 일행으로 온 조선인들은 정해진 육로를 따라 이동하며 그 도정에서 일본 측이 마련한 숙소에 머무는 것이 통례인데, 그들은 (허가를 받고) 지정된 숙소를 벗어나 오사카에 거주하는 상인 시로헤이의 거처를 수소문해가며 찾아온 것이다. 이런 일이 흔치 않다보니, 뜻하지 않은 조선인의 출현에 호기심이 발동한 마을 사람들이 삼삼오오 시로헤이의 집에 모여들어 조선인과 시로헤이의 만남을 구경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윽고 시로헤이와 대면하게 된 그 조선인은 일본어로 말하기를 사실 나는 기이번(紀伊藩현재의 와카야마 현) 아리타군(有田郡) 세나마을(瀬名村) 출신으로, 예전 당신의 부친(父親) 대에 이 가게에서 고용인으로 일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 돈 4관문(貫文)을 훔쳐 달아나 교토(京都)로 갔지만 교토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다시 나가사키(長崎)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쓰시마(對馬)로 가면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쓰시마로 건너가 6년을 살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제법 형편이 좋아져 조선으로 갈 수 있는 도항허가증을 받아 조선에 건너갔고, 여러 가지 일을 겪은 후 조선인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나의 장인은 조선 하급관리의 후손으로, 그 연줄로 이번에 일본으로 건너오는 통신사 일행으로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기회를 빌려 어떻게든 예전에 일하던 주인댁에 들러 그간의 경위를 설명하고, 고향 기이(紀伊)의 소식과 풍문도 듣고 싶어 이렇게 방문하게 됐습니다. 나는 조선에서 집을 한 채 소유하고 그런대로 윤택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라며, 조선에서 가져온 인삼 3뿌리와 작은 접시 10개를 품에서 꺼내 시로헤이에게 선물로 주었다.

시로헤이가 그 조선인에게 돈을 건네자 그는 조사가 엄격하여 일본인에게서 많은 돈을 받아서는 안 되니 이 중 100()만 받겠습니다. 조선에 돌아가면 일본에는 금은(金銀)이 많이 난다는 얘기를 아내에게 전하겠습니다.”며 그 자리를 떠났다. 이 사실은 사카이() 봉행(奉行) 이와미아와노카미(稻生安房守)에 의해 막부에 보고되었다.

     

에도시대 조·일을 오간 한 남성의 인생역정


초량왜관도이는 1748년에 조선통신사가 오사카를 방문했을 때의 일화로, 문헌에 보이듯 막부의 관리가 상부에 보고한 내용이다. 쓰시마를 경유하여 조선에 건너가 정착한 기이(紀伊) 출신의 어느 일본인이 조선통신사 일행이 되어 다시 일본 땅을 밟게 되었고, 오사카에 들른 차에 예전에 일하던 가게를 찾아가 자신의 과오를 고백하고 근황에 관한 얘기를 나눈 뒤 돌아갔다는 내용이다. 그는 동행한 사신단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사가 엄격하다면서 시로헤이가 건넨 금전 중 일부인 100()만을 수취했는데, 그것은 조선통신사의 일원이 현지 일본인과 개인적으로 물품을 매매하는 행위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시로헤이에게 건넨 조선 인삼 3뿌리와 접시는 아마 과거 자신이 저지른 과오에 대한 보상의 선물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 일화는 에도시대의 조·일관계를 연구하는 연구자에겐 시종일관 거의 충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18세기 전반 쓰시마번을 경유하여 조선에 건너간 일본인이 조선의 여성과 결혼하여 조선에 정착하여 살았던 예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장인이 하급관리의 후손이라는 연줄로 조선 정부가 에도막부에 파견하는 외교사절인 통신사 사절단의 일원이 되기까지 했다. 표면적인 이야기만 보면 21세기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살다가 한국에 정착한 어느 일본인 남성의 인생역정이라 해도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현대적이다. 하지만 이것은 합법적인 절차를 거치면 타국으로의 이주 내지는 이민이 가능하고 국제결혼이 일상화된 현대를 살아가는 시민 아무개의 일화가 아니라, 18세기 쇄국의 시대를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충격적이다. 도대체 영조(英祖) 치세기의 조선에서 이런 일이 가능했단 말인가. 가능했다는 것은 곧 함께 하늘을 받들며 살 수 없는, 불구대천지왜인(不俱戴天之倭人)’을 사위로 맞아들일 정도로 18세기 조선인의 왜인 인식이 관대해졌으며, 당시 조선 사회는 오늘날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외국인에게 열린 사회였다는 의미일까.

     

통항일람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 문제의 는 자신의 경제적인 처우를 향상시키기 위해 기이오사카교토나가사키쓰시마로 계속해서 거처를 옮겼다. 여기까지는 일본 국내에서의 이동이지만, 문제는 쓰시마에서 조선으로 도항한 이후다. 통항일람에는 조선에 도항한 이후 그가 겪은 일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조선에 도항한다는 것은 곧 부산의 초량왜관에 건너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헌데 초량왜관이 어떤 곳이던가. 왜관이란 조선 전기부터 일본인 통교자를 수용하고 접대하기 위해 설치된 객관(guest house)’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일본인 통교자가 쓰시마 한 곳으로 한정되어 버린 까닭에 쓰시마번 사람이 왜관의 유일한 사용자가 되었지만, 임진왜란이라는 참담한 전쟁을 경험한 조선은 17세기 초 국교가 재개된 이후 왜관에 대한 통제와 관리를 조선 전기에 비해 대폭 강화했다.

     

엄격한 통제와 관리하에 있던 초량왜관


우선 도항해 오는 일본인이 함부로 왜관 주변의 조선 마을을 배회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는 한편, 왜관에 출입하는 조선인 관리의 행동까지 규제했다. 조선 정부가 마련한 일본인의 행동 범위를 준수하지 않은 자는 왜관 근처에서 사형에 처한다는 무시무시한(?) 내용의 약조(約條)1683년 제정되었을 정도였다. 이 약조는 조선 정부가 쓰시마번 당국을 상대로 체결한 것이었다. 조선 정부는 초량왜관에 도항해 오는 일본인이 왜관 안에서만 생활하다 쓰시마로 귀국하는 체제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약조가 체결된 후에도 일본인의 왜관 이탈행위는 계속되었고, 그 행위가 발각될 때마다 조선과 쓰시마번은 이탈자의 체포와 처벌 여부를 둘러싸고 논쟁과 갈등을 반복하곤 했다. 쓰시마번은 조선통교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번(自藩)의 이익 추구를 위해 때로 의도적으로 규정을 어기기도 했지만, 그들 역시 그것이 분쟁의 요소가 된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체적인 통제 규정을 마련하여 왜관 내 일본인들의 행동을 관리하고 있었다.

     

초량왜관은 17세기 말 이후 이러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반세기 이상의 세월이 흐른 시점에 초량왜관에 건너왔을 는 조선 여성과 결혼하여 조선에 정착했다. 안타깝게도 통항일람에 기록된 내용은 이것이 전부이고, ‘에 관한 다른 문헌 기록을 발견하지는 못한 상태다. 따라서 그가 왜관에 왔다가 어떤 경위로 결혼과 정착에 성공했는지, 조선의 어느 지역에서 어떠한 사회적 신분으로 살았는지, 조선 정부와 쓰시마번 당국은 그의 존재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는지 등의 세부적인 의문들은 해소할 길이 없다. 통신사의 일원으로 선발된 시점에서 적어도 그가 조선 정부에서 인정하는 신분을 확보하고 있었으리라는 막연한 추정을 해 볼 뿐이다.

     

현 단계에서 의 사례는 이례 중의 이례라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따라서 이 일화를 근거로 당시 조선 사회에 관해 섣불리 일반론적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국가적인 명분을 앞세우곤 했던 조정의 대일정책 논의나 완벽한 통제와 관리를 지향했던 왜관정책들이 존재하던 가운데, ‘와 같은 존재가 실재했다는 것은 어쩌면 조선 후기의 기층사회가 외국인(異國人)’에 대해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의 포용력과 유연성을 갖고 있었음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