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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포커스
발해와 일본의 갈라진 틈을 메운 사람들
  • 구난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문학부 교수

오대산




8세기 동아시아는 7세기의 격동을 뒤로하고, 당 제국을 주축으로 형성된 교류 네트워크 안에서 활발한 문물 교류를 꽃피웠다. 신라와 일본 양국은 7세기 전반까지만 하더라도 당과의 소원했던 정치 외교적 상황을 타개해야 하는 같은 처지에 놓여 있었기에 유례없이 활발한 교류를 이뤘다. 하지만 신라와 당의 관계가 회복되고, 고구려 옛 땅에 발해가 건국되면서 신라와 일본의 관계는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반면 8세기 중반부터 발해와 일본은 긴밀한 관계를 이어 나가게 된다. 발해는 공식 사절로 일본을 34차례 방문했고, 일본 또한 발해를 13차례 방문했다. 양국을 넘나드는 항해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229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발해의 역사에 47회에 달하는 교류 행적은 양국의 관계가 무척이나 긴밀하였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종일관 양국의 관계가 돈독했던 것은 아니다. 삼국 통일 전쟁에 개입했다가 백강 전투에서 패배를 경험한 일본은 신라로 대표되는 대륙 위기를 견제하면서 천황제 율령국가를 조속히 구현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것의 성취 여부와는 별개로 한반도 제국에 대해 번례를 적용해 명분을 얻으려 했다. 8세기 후반 이후 국력이 크게 확대되어 동북아의 강국이 된 발해는 천손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표방하는 등 일본에 대해 대외적 자신감을 나타냈고 이는 천황제 율령국가를 구현하려는 일본과 필연적으로 갈등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낸다.


771년 일만복(壹萬福)의 파견 시, 국서에 발해가 천손임을 강조하고 발해와 일본의 관계를 구생(舅甥) 관계라 표현해 한차례 갈등을 겪었으며, 발해사의 도착지를 둘러싸고도 갈등을 빚었다. 일본은 발해에 츠쿠시(築紫)의 길을 이용해 다자이후(大宰府) 입국을 강권했으나 발해는 계속 북로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방문 기한을 둘러싼 공방도 있었는데 일본은 121회 방문을 제안했지만 발해가 이를 무시하면서 몇 차례 마찰이 생겼다. 발해 사신이 가져온 모피 등의 물품에 대한 일본 귀족의 수요가 점차 높아지면서, 구입 절차와 우선순위를 정하는 규정이 연이어 등장한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발해로부터 수입된 물품이 일본 내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은 발해 사신의 방문을 부담스럽게 여기고 각종 요구를 제기하기 시작했는데 826년에는 급기야 우대신이었던 후지와라 오츠구(藤原緖嗣)가 발해 사신의 잦은 방문을 비판하는 표문을 올리는 일도 있었다. 자칫 양국의 관계가 신라와의 관계처럼 경색되고 단절될 우려마저 감돌았던 것이다.


그러나 양국이 파국으로 치닫지 않은 데는 발해의 유연한 외교 전술과 양국 인사들의 끈끈한 인연 그리고 진정 어린 교류라는 큰 동력이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실상을 알 수 있는 기록은 그다지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적게나마 양국 학자들 간의 감동 어린 교감과 애틋한 사연이 전해져 오고 있다. 특히 발해 승 정소의 행적은 각별하다. 그는 육로와 해로를 아우르며 무려 24,000Km에 달하는 여정을 오갔다. 비록 사료의 한계로 그의 행적을 자세하게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중국과 일본의 남아있는 기록의 편린을 모아 보면 어느 정도 그의 여정을 추정할 수 있다.


입당구법순례행기 

일본승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오대산에서 발견된 발해승 정소(貞素)의 사연


그의 행적을 포괄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 중의 하나가 일본승 엔닌(圓仁)이 남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남은 기록이다. 엔닌은 838년 견당사 일행으로 당에 도착하였지만 단기 유학생 신분이었기에 당초 그가 원하던 천태산 순례가 허가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그는 일본으로 곧장 되돌아가야 했지만, 학문에 대한 열정을 굽히지 못해 8402월 귀국선에서 내려 당 체류를 감행하게 된다. 불법이 될 수도 있었던 그의 순례를 도와준 것은 적산법화원의 신라승, 장보고 등 재당 신라인들이었다. 여행 허가를 받은 뒤 적산법화원을 출발해 3개월여 만에 그는 오대산에 이른다. 오대산은 중국 밀교의 상징이라 할 만큼 당시 견당 유학승과 구도승들이 필수적으로 거쳤던 지역이다. 오대산 순례 과정에서 그는 계곡에 있는 허물어진 칠불교계원(七佛敎誡院)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애틋한 사연이 담긴 편액 일본국 내공봉대덕 영선화상을 곡하는 시와 서(哭日本國內供奉大德靈仙和尙詩(幷序))를 접하게 된다. 그 편액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나를 깨우쳐 준 분은 응공이라는 사람이다. 스승을 따라 부상(扶桑), 일본에 이르렀고 성장하여 치림(緇林), 불법에 뜻이 섰다. (중략) 813년 늦은 가을 여관에서 나는 그 스승 영선대사를 만났다. 첫마디 대화에서 뜻이 맞아 마음으로 불법을 의논했다.

(중략) 영선대사는 나의 스승이신 응공의 사부이시다. 일찍이 불법의 오묘한 이치를 깨달으시니 그 뜻이 세상의 으뜸 가운데 으뜸이 되신다.

...825년 일본의 왕(嵯峨天皇)이 금 100냥을 보냈는데 그것이 장안에 이르렀다. 나는 그 금과 편지를 받아 영선대사에게 전달했다.

...영선대사께서는 1만 개의 사리와 새로 만든 불경 2, 그리고 천자가 쓴 편지 5통을 나에게 주며 일본을 건너가 나라의 은혜에 감사하는 뜻을 전하라고 하기에 나는 이를 응낙했다. 일단 응낙한 터이니 어찌 만 리의 겹친 파도를 꺼릴 수 있겠는가? 끝없는 인연들을 모으는 일을 할 수만 있다면 원대한 꿈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일본 왕은 나에게 금 100냥을 주어 보냈다.

...(그러나) 내가 태화(太和) 2(828) 47일 영경사(靈境寺)를 찾아갔을 때 영선대사께서는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였다. 피눈물이 흐르고 몸이 으스러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내가 사방에서 몰아치는 검은 파도의 바다를 건너 죽음을 목전에 겪으며 다섯 번의 여행을 하면서도 마치 그 어려움을 밥 먹듯이 한 것은 응공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나의 믿음은 응공에서 시작하여 그에게서 끝났다.

(중략) 4월의 난초가 떨어질 무렵 장안을 바라보며 그 중도에서 한 수의 시를 지어 바치노라.”

엔닌(圓仁),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3

개성(開成) 573일조


     

죽음을 넘나드는 긴 여정을 감내한 정소


정소는 적어도 813년 이전에 입당했고 구법 활동을 하던 중 응공(應公)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고, 이 인연을 통해 응공의 스승인 영선(靈仙)을 만난다. 한편 821년 일본을 방문한 왕문구 일행은 일본 왕으로부터 영선에게 황금 100만 냥을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듬해 귀국한다. 이후 발해 견당사를 통해 장안까지 이것이 전달되었으며 이를 825년에 장안에 있던 정소가 당 오대산 금각사(金閣寺)에 있던 영선을 찾아가 전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와 상응하는 내용은 일본의 유취국사(類聚國史)에도 남아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영선이 1만립의 불사리와 새롭게 번역한 경전 2부 그리고 일본 왕에게 전하는 조서와 칙서 5통을 정소에게 넘기며 일본 왕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정소는 이를 전하기 위해 또다시 긴 여정을 감행하게 된다. 오대산에서 발해로 온 뒤 826년 고승조 일행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왕에게 이를 전한다. 일본 왕은 그를 환대하며 다시 황금 100냥을 영선에게 전해줄 것을 부탁한다.

이에 정소는 발해 사신과 함께 귀국한 뒤 다시 오대산으로 넘어가 영선을 찾아갔다. 8284월에 그가 머물고 있다고 들었던 영경사(靈境寺)를 찾아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열반의 세계로 접어들었다. 두 번째 황금 100냥은 영선의 죽음으로 전달되지 못했고, 이는 도리포에서 풍랑을 만나 바다에 빠뜨리고 만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에서 확인할 수 있다.(續日本後紀11 承和93月 辛丑條)

정소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매우 비통해 했으며, 이러한 자신의 심경을 글로 남기는데 그것이 바로 엔닌이 본 편액의 내용이다.

정소가 이동한 여정은 장안-오대산-발해, 상경-동해, 횡단-일본, 헤이안-동해, 횡단-발해-오대산이었고 그 거리는 대략 2500km 남짓 된다. 죽음을 무릅쓴 동해 횡단 여정을 겪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감행한 것을 보면 그는 초인적인 의지를 지닌 사람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정소가 이런 어려운 여정을 감내하고 발해, 일본, 당을 넘나들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건 불법을 구하고, 그것을 향한 정념과 진리를 일깨워 준 스승에 대한 존경과 신뢰가 아니었을까? 그것이 바로 매서운 파도도, 험준한 산길도 헤쳐 나가는 강인한 동력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오대산 

발해, 일본, 당, 신라의 구도승이 모여들던 오대산

지금도 많은 구도승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양국 간의 갈등도 해소한 승려들의 신뢰와 우정


이들의 서로에 대한 존경과 신뢰는 양국의 경색되는 교류 정세도 초월했다. 정소가 일본을 방문할 당시 발해와 일본의 관계는 그리 긴밀하지 못했다. 양국이 단절 없이 오가던 바로 전 시기와 대비해 본다면 냉각기로 접어들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지도 모르겠다. 당시 일본 조정은 발해 사신의 방문 기한을 12년으로 할 것을 수차 요청했고, 이 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사행이 이루어질 경우에는 도착지에서 귀국 조치할 정도로 양국의 관계는 심각해져 가고 있었다. 일례로 직전인 823년에 일본에 도착한 고정태 일행은 아직 12년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헤이안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도착 지역인 에치젠국에 머물다가 귀국해야만 했다. 그러나 825년 정소와 함께 도착한 고승조 일행에 대한 일본의 예우는 달랐다. 이 사행 역시 아직 12년이 되지 않았던 것은 똑같았지만 기한을 문제 삼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그들을 헤이안에 초대해 크게 환대했다.

거듭 12년 방문 기한 준수를 요구하던 일본 조정의 강경한 입장도 양국 승려의 돈독한 우정과 신뢰 앞에서는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는 물론 견당 유학승에 대한 지원과 그것을 통한 대륙 문물이나 정보를 입수하려는 일본 내부의 절실한 필요도 영향을 미쳤을 테지만 스승에 대한 공경과 학문적 신뢰에 의지해 기나긴 험로를 뚫고 온 이국 승려의 열정은 명분적 의례도, 균형감 없는 현실 판단도 모두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양국의 갈라진 틈을 메꾸기에 충분했다. 이를 뒤집어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본다면 발해는 승려 간의 교류 채널을 십분 활용해 일본 조정의 절실한 지점을 찾았고 이를 통해 교류의 유리한 위치를 선점했다. 그리고 일본의 의례상 요구를 무력화했던 것이다.

 

 

지도

발해승 정소의 여정

 

 

 

     

당면한 한일 갈등,

발해와 일본 관계로부터 시사점을 찾을 수 있을까


이 밖에도 발해와 일본 간의 교류에서 확인되는 문사들 간의 애틋한 사연은 더 많이 존재한다. 당에서 만난 인연을 결국 잇지 못한 채 이별로 마감한 왕효렴(王孝廉)과 구카이(空海), 2세대에 걸쳐 부자간의 인연을 이어간 배정(裵頲배구(裵璆)와 스가하라 미치자네(管原道眞스가하라 아츠시게(菅原淳茂) 등의 사례가 바로 그것이다. 인사 간의 교감과 신뢰는 상호의 득실을 가리는 정치 외교적 판단을 능가하고, 잘못된 판단을 바로잡는 강력한 동력이 된다는 것을 8~9세기 양국의 교류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당 중심의 국제 관계 질서를 무시하고 일왕 중심의 국제 질서를 구현하려는 헤이안 조정의 대외관은 당시의 동아시아 사회에 대한 현실 감각을 상실한 인식이다. 이는 마치 20세기 제국적 침탈의 역사를 반성할 줄 모르는 현재의 일본 인식과 닮았다. 그뿐만 아니라 이러한 비현실적 인식이 초래한 갈등을, 평화와 공존을 지향하는 양국 지식인의 우호와 실천으로 풀어나가는 형세 또한 9세기와 현재가 유사해 보인다. 부쩍 깊어가는 한일 갈등, 양국의 갈라진 틈을 메꾸려는 노력이 모아지고 있는 이때, 발해와 일본 교류에 등장한 양국 지식인의 교감과 신뢰라는 귀중한 자산을 되돌아본다면 새로운 지향을 모색해볼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