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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크라스키노성 발굴, 숨겨진 발해사를 푸는 열쇠
  • 대담 김은국 재단 한국고중세사연구소 연구위원 / 정리 윤현주 작가 / 겔만 E.I. 러시아과학원 극동 역사학·고고학·민족학 연구소 선임연구원

대담 김은국 재단 한국고중세사연구소 연구위원


정리 윤현주 작가


겔만 E.I.

러시아과학원 극동 역사학·고고학·민족학 연구소 선임연구원     

1996유약 바른 자기 및 중세 연해주 지역 도자기라는 주제로 박사학위 취득후 연해주 극동기술대학교 및 연해주 국립극동대학교에서 고고학 관련 강의를 하고 있다. 이후 러시아과학원 극동 역사학·고고학·민족학 연구소 중세 초기 고고조사실 선임연구원으로 재직하면서, 크라스키노성, 고르바트카 성 등 연해주 내 다수의 발해유적 발굴과 연구를 하고있다. 뿐만아니라 2011년부터 현재까지 크라스키노성 한·러 공동발굴단 러시아측 발굴단장을 역임중이다. 저서로 연해주 크라스키노 발해성 발굴조사, 발해 염주성 이야기외 다수가 있다.

     


 


발해는 7세기부터 10세기까지 신라와 더불어 남북국사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발해인이 직접 남긴 기록이 없고 그 영역 또한 중국, 러시아, 북한 등에 널리 분포되어 있어 발해사 연구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발해 유적과 유물의 발굴은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묻힌 역사적 진실을 밝혀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매우 크다. 그래서 동북아역사재단은 재단 출범 이후 줄곧 러시아과학원 극동 역사학·고고학·민족학 연구소와 함께 러시아 연해주의 발해 크라스키노성 발굴조사를 진행해 왔다. 그리고 지난 118일에는 그동안의 발해성 발굴 성과를 종합하는 학술회의를 열기도 했다. 이번 학술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겔만 E.I.’ 크라스키노성 러시아 측 발굴 단장을 만나, 크라스키노성 발굴을 통해 밝혀진 학술 성과와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보기로 했다.

     


겔만



Q

러시아과학원 극동 역사학·고고학·민족학 연구소에 대한 소개를 먼저 부탁드립니다.


A

러시아과학원 극동 역사학·고고학·민족학 연구소는 1954년 극동 지역에 러시아과학원 시베리아부 극동분과가 설립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곳에서 소규모 역사 고고학부서가 업무를 시작하게 되는데요. 역사학자 A.I. 크루샤노프, 고고학자인 E.V. 사프쿠노프와 Z.V. 안드레예바, 동양학자인 F.V. 솔로비예프 등 유명한 러시아 학자들이 이 부서에서 연구를 담당했습니다. 이를 근간으로 48년 전 설립된 우리 연구소는 러시아 극동 역사학의 중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연구소에서는 지속적으로 학술 연구가 진행되고 있고, 극동지역 대학들을 위한 학문-교육학 인재들을 육성하는데도 힘을 쏟고 있습니다. 이것 외에도 저희 연구소에는 주요한 과제들이 많습니다. 역사에 대한 지식을 널리 대중화하고, 동아시아 지역 및 전체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민족과 문화, 그리고 러시아 사회의 효율적인 상호작용 및 협력을 증진하는 데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Q

러시아과학원에서는 1980년대부터 염주성을 발굴하고, 조사해왔습니다. 오랜 시간 크라스키노성에 대한 발굴 조사한 것은 크라스키노성이 그만큼 가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러시아 역사에서 크라스키노성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요?


A

러시아에서 고고학적 유적은 러시아 연방 역사 문화유산의 일부입니다. 유적지는 러시아 법으로 보호되고 있으며, 크라스키노성 또한 러시아의 중요한 국가유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크라스키노성을 연구하는 것은 러시아 영토에 살았던 민족의 역사를 규명하고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헌자료로 보전된 크라스키노성에 대한 정보는 발해라는 국가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러시아 고고학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죠. 크라스키노성의 발굴은 거의 40년 전부터 시작되었지만 그 면적이 방대한데다 약 2미터가 넘는 두꺼운 문화층 위로 인해서 성의 10구역도 채 규명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크라스키노성이 높은 역사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크라스키노성의 고고학적 연구는 앞으로도 계속 진행될 예정입니다.



Q

단장님께서는 크라스키노성 발굴에 언제부터 참여하셨나요? 그리고 발굴에 직접 참여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발굴 성과가 무엇인지도 궁금합니다.


A

제가 크라스키노성의 발굴에 참여한 것은 1994년부터였습니다. 저는 크라스키노성에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을 제게 찾아온 커다란 행운이라 생각합니다. 오랜 시간 발굴에 참여하면서 보람과 긍지를 느낄 때가 참 많았습니다. 그중 더욱 특별히 기억나는 건, 크라스키노성 유적지에 대한 네 번째 원정입니다. 네 번째 원정은 대한민국 정부의 지원하에 한국의 학자들과 공동으로 진행되었는데요. 이 기간 동안 정말 많은 발굴이 이뤄졌고 이는 고고학적 연구의 성과를 냈습니다. 대표적인 것을 이야기하자면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불교사원의 건물 양식, 우물, 기와를 굽는 가마, 주거지 및 난방 시스템, 별채 및 공공건물 등이 있었습니다. 성벽과 성문을 어떻게 건설, 수리, 재건했는지에 대해 처음으로 규명되기도 했고요. 문화유적과 함께 5개의 장방 축조층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마치 연대기처럼 순차적으로 도시 주민들의 생활을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실존했던 도시의 연대기적 기틀이 더 확실하게 규명할 수 있었죠. 고구려와 발해 문화 간의 계승에 대해 몇 마디 말로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건축물의 축성학적 특성부터 전면 기와 장식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한 물질적 증거를 가지고 계승에 관해 연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후로 유적지 발굴이 매년 이루어지게 된 것도 하나의 성과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인터뷰

     

     

Q

발굴 성과 중 축성 형태 연구는 건축방식뿐 아니라 당시의 환경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부분입니다. 크라스키노성의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진 발해 성의 축성 방법 중 흥미 있는 부분이 있을까요?


크라스키노성의 성벽과 탑, 성문의 방어 설비에 다듬어진 돌이 사용되었는데요. 이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축조된 것으로 축성 형태 연구를 통해 밝혀졌습니다. 고구려와 비교한다면 설비의 위력은 상당히 떨어지지만, 발해의 도시 건설에 고구려의 기본적인 원리가 일정 부분 계승되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Q

발해 유적 중 유독 주거지에 대한 조사는 활발히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크라스키노성 발굴 조사에서 보존 상태가 서로 다른 28기의 주거지가 발굴되었습니다. 발굴된 주거지는 어떤 형태이며,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지요?


A

크라스키노성에서 28기의 발해 주거지가 발굴됐는데요. 아래쪽 장방 축조층에서 주거지는 대부분 아궁이 방식의 난방 구조를 갖춘 사각형 움막이었습니다. 성의 나머지 4개의 장방 축조층에서는 주거지가 지상에 위치했으며, 사각형 형태였고, 2개의 고래로 난방이 이뤄졌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아궁이 근처에 저장용 구덩이가 위치했을 수 있고, 굴뚝은 주택 외부에 있었습니다. 면적이 50m2가 넘는 위쪽 축조층의 주거지에서는 입구 앞에 개방형 베란다였을 수도 있는 시설이 발견되었는데요. 식품과 물을 보관하기 위한 커다란 용기가 구덩이에 묻혀 있는 노지가 거주지 앞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전통적인 한국의 주거지를 연상시킵니다. 다만 이때 용기는 주거지 뒤편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Q

크라스키노성은 발해의 동경용원부에 속한 주의 중심지로서,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던 곳입니다. 발굴조사를 통해 이곳이 육로와 해로를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였다는 것이 밝혀졌는데요. 이를 뒷받침해 주는 유물과 유구를 소개해 주시고, 이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는 사실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A

문헌에 따르면 크라스키노성은 일본으로 가는 해로의 기능을 했습니다. 성은 만의 기슭에 자리하고 있었고, 원정대와 그 주민들은 뛰어난 뱃사람이자 어부이며 선박 건조 기술자였습니다. 건설을 하는데 필요한 재료는 바다나 강을 통해 배로 실어 왔으며, 일부 바다에서 나는 제품이 (예를 들면 도시의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는 고래 뼈) 연근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공급되기도 했습니다. 배나 선박을 건조하기 위해 필요한 목재를 확보해 강뿐 아니라 육로로 이를 운반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상품은 가까운 동방의 수도로부터 육로로만 이 도시로 운반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요. 여기서 발견된 낙타의 뼈와 동물 형태의 청동 유물이 대상이 상품을 가지고 크라스키노성에 도착했다는 간접적인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나라에서 들어온 진귀한 상품 (몇몇 유리구슬, , 유약을 바른 그릇, 도자기, 청동으로 만들어진 물건, 뿔 모양의 도자기 그릇) 등은 육로뿐 아니라 해로로도 운반되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Q

재단과 함께 발해 염주성 이야기(2017, 청아출판사)를 집필하셨는데요. 집필진으로서 참여하며 가진 소회가 궁금합니다.


A

저에게 발해 염주성 이야기출판은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우리가 처음으로 오랜 기간의 고고학적 연구 성과를 한 권의 책으로 풀어냈기 때문이죠. 이 책은 효율적으로 구성되어 손에 들기도 편리한 형태로 출판되었습니다. 우리는 전문가뿐 아니라 넓은 독자층이 흥미를 가질 수 있게 책을 써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잘 해냈는지는 독자들만이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Q

오랜 시간 크라스키노성 발굴 조사와 연구를 해 왔지만 아직 완전히 끝내지 못한 상황입니다. 발굴 책임자로서 어떤 부분에 대해 더 발굴과 연구를 하고 싶은지도 궁금하고요.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크라스키노성에 대한 보존과 관리 방향에 대한 구상이 있다면 그 또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A

유적지 발굴을 위해서는 앞으로도 수십 년의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작업을 위해서는 특별한 전략 수립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 도시가 존재했던 여러 시기의 도시 내부 배치를 계속 연구해 나갈 것입니다. 예를 들면, 도시를 관리하는 행정 건물처럼 일부 지역은 특별한 기능의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아직 우리를 이를 찾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도시에는 고위 관리의 대저택, 군대 주둔지가 있었을 겁니다. 사절단, 일반 상인 및 여행객들이 머물던 도시 구역을 반드시 찾아내고 싶습니다. 도시의 수공업 구역도 아직 발굴되지 않은 상태인데요. 가장 잘 보존되었던 도시의 서쪽 문들을 발굴하고, 발해의 매장지를 계속해서 발굴하고 싶은 열망이 큽니다. 발해인의 물질문화, 인구통계학 과정, 가계, 종교적 신념 등을 계속 연구하고, 주민의 삶의 영위를 보장했던 시스템을 가능한 정확하게 재구성하는 일을 우리가 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발굴 보존 및 관리와 관련해서는 크라스키노에 고고학자들과 다른 전문가들이 영구직으로 일하며 거주할 수 있는 고고학 센터를 설립할 필요성을 이미 제기한 상황입니다. 이 마을에 박물관을 건설하고자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조금 더 먼 미래에는 이 유적지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키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될 것입니다. 크라스키노성을 중심으로 한 우리의 계획은 원대하고, 이는 수년에 걸쳐 진행될 것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