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기말~10세기초 신라와 함께 남북국을 이루어 200년간 존속했던 고대국가 발해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발해와 관련된 1차 사료와 새로 발견된 자료를 중심으로 역사 여행을 떠나 보자. 해석의 다양성, 사료의 중요성과 함께 발해사의 감춰진 이야기들을 들춰보는 재미를 선사할 것이다.
고구려 유민을 중심으로 건국된 발해는 한때 해동성국이라 불릴 만큼 번성했다. 하지만 9세기 후반 시작된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격랑을 발해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결국 925년 거란의 공격으로 시작된 전쟁에 패하며 926년 1월 발해는 멸망했다. 그렇다면 발해가 다른 나라보다 짧은 기간에 멸망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라가 망한 후 그 유민은 어디로 갔을까?
발해 멸망 당시 수도 ‘홀한성’(오늘날 중국 흑룡강성 영안시 동경성진 소재)의 서로 다른 궁성 조감도
위: 중국의 발해 궁성 조감도 - 발해 상경용천부 유적지
아래: 북한의 발해 궁성 조감도 - 조선중앙역사박물관
발해 멸망 관련 자료
천현 원년(926) 봄 정월 기미(2일), 흰 기운이 해를 관통하였다. 경신(3일), 부여성을 함락하고 성을 지키는 장수를 주살했다. 병인(9일), 척은 안단(安端)과 전북부 재상 소아고지(蕭阿古只) 등에게 명하여 1만기를 거느리고 선봉을 삼았는데, 대인선(大諲譔)의 노상 병사(老相兵)를 만나 격파하였다. 황태자, 대원수 요골(堯骨), 남부재상 소(蘇), 북원 이리근 사날적(斜涅赤), 남원 이리근 질리(迭里)가 이날 밤 홀한성(忽汗城)을 에워 쌓다. 기사(12일), 인선이 항복을 청하였다. 경오(13일), 군사를 홀한성 남쪽에 주둔시켰다. 신미(14일), 인선이 소복에 새끼로 몸을 묶고 양을 끌고 관료 3백여 명을 거느리고 나와 항복하였다. 주상은 예를 두텁게 하여 그를 놓아주었다. 갑술(17일), 조서로 발해 군현(郡縣)에 알렸다. 병자(19일), 근시 강말달(康末怛) 등 13명을 보내 성에 들어가 병기를 수색하게 했는데 나졸들에게 살해되었다. 정축(20일), 인선이 다시 배반하자, 그 성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어가가 성안으로 들어가니, 인선이 말 앞에서 죄를 청하였다. 군사들로 하여금 인선 및 족속들을 호위해 나오도록 하고, 천지에 제사를 지내고 다시 군중으로 돌아왔다.
天顯元年春正月己未, 白氣貫日. 庚申, 拔扶餘城, 誅其守將. 丙寅, 命惕隱安端、前北府宰相蕭阿古只等將萬騎為先鋒, 遇諲譔老相兵, 破之. 皇太子、大元帥堯骨、南府宰相蘇、北院夷離菫斜涅赤, 南院夷離菫迭里是夜圍忽汗城. 己巳, 諲譔請降. 庚午, 駐軍于忽汗城南. 辛未, 諲譔素服, 稾索牽羊, 率僚屬三百餘人出降. 上優禮而釋之. 甲戌, 詔諭渤海郡縣. 丙子, 遣近侍康末怛等十三人入城索兵器, 為邏卒所害. 丁丑, 諲譔復叛, 攻其城, 破之. 駕幸城中. 諲譔請罪馬前. 詔以兵衞諲譔及族屬以出 祭告天地. 復還軍中.
『요사遼史』권2, 본기2, 태조(하)
발해 멸망의 전말
거란을 건국한 태조 야율아보기가 발해 공격에 나선 건 925년 12월 6일이었다. 다음 달인 윤12월 29일 밤에 발해의 부여부를 포위하고, 3일 만인 다음해 1월 3일 부여성을 함락하였다. 부여부는 발해와 거란의 교통로이면서, 늘 강한 군사가 주둔해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던 요충지였는데 이곳이 함락된 것이다. 거란 태조는 부여부를 함락한 후 발해 공격을 계속할 것인지 망설이다 9일, 발해 수도 공략에 나선다. 발해는 노상이 이끄는 주력군이 패배하였고, 발해 왕 대인선은 흰 옷을 입고 새끼로 몸을 묶은 채 양을 끌고 태조의 말 앞에서 죄를 청하였다. 거란 태조는 항복한 대인선에게 오로고(烏魯古), 그 왕후에게 아리지(阿里只)라는 이름을 내렸는데 이는 항복을 받을 때 탔던 태조 부부의 말 이름이었다. 발해국은 이렇게 굴욕스럽게 망하였다.
발해 멸망 원인 ① 9세기 말 10세기 초 동아시아 정세의 오판
발해 멸망의 원인은 발해가 거란을 비롯한 국제 정세를 오판한 것이 주원인이었다. 조공과 책봉이라는 정치적 관계로 맺어져 있던 동아시아는 8세기 후반부터 무역이 활발해지며 경제적 관계가 중요시됐다. 이와 함께 9세기 후반에는 군사력을 배경으로 기존 체제를 부정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었다. 동아시아의 맹주이며 질서의 축인 당이 907년 멸망하고, 한반도에서도 후삼국 시대로 접어들었다. 거란족도 야율아보기가 부족을 통일하고 중원(中原)지역으로 본격 진출하기 전에 후방의 잠재적 위협인 발해 제거를 노리고 있었다. 이 시기 국제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정치적 요소가 아닌 군사력이었지만 발해는 이에 대비한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발해 멸망 원인 ②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거란의 공격
발해가 멸망한 직접적인 계기는 바로 거란의 공격이었다. 야율아보기 스스로 발해 공격에 나선 이유를 “발해는 대대로 원수인데 설욕하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안주할 수 있겠는가?”라 하였듯이 원수를 갚으려는 행위였다. 발해는 부여부에 항상 강한 군대를 주둔시켜 거란을 방어하고 있었지만, 부여부가 대외 교통로의 하나인 ‘거란도(契丹道)’인 점으로 미루어 봤을 때 양국의 교류는 지속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거란의 교류 요청을 거절하며 “거란이 일찍이 발해와 화목하게 지내는 맹서를 어기고 멸망시켰다(契丹嘗與渤海連和 忽生疑貳背盟殄滅 『高麗史』2 太祖 25년 冬10월조)”라고 말한 것은 발해와 거란이 상호 친선동맹관계가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야율아보기가 거란국을 세운 907년 전후부터 발해에 대한 적극적 공세로 양국이 원수지간이 된 것으로 짐작된다. 거란은 굳센 의지만큼 군사력도 막강했고, 발해는 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발해 수도 공격에 나선 거란군 기병 5백이 발해 노상(老相)의 병사 3만을 무찔렀다(獨將騎兵五百,敗老相軍三萬 『遼史』73 阿古只傳).
멸망 원인 ③ 발해 내부의 이완
가장 일반적으로 꼽는 발해 멸망의 원인은 발해 내부의 분열이다. 이는 거란의 말에서 짐작 가능하다. “이심(離心: 마음이 흩어짐)을 계기로 틈을 타 움직였으므로, 싸우지도 않고 이겼다(因彼離心, 乘釁而動, 故不戰而克 『遼史』75 耶律羽之傳).” 지배층이 소수의 고구려인, 피지배층은 다수의 말갈인이라는 이원적 사회구성 때문에 이심한 상태였다거나, 혹은 멸망 전 다수의 발해인이 남쪽의 고려로 넘어온 것이 발해가 이심한 결과라는 주장도 있다. 발해 존속 시기나 멸망 이후에 발해인이 고구려계라거나 말갈계라는 구별이 없었고, 또한 『고려사』의 다른 부분에서 발해인이 멸망 이후에 온 것이라고도 하므로, 이 또한 절대적인 설명은 아니다. 926년 1월 멸망 직후부터 발해 각 부와 주에서 반란이 끊이지 않았고, 그 이후 2백여 년간 부흥운동이 전개된 점에서 발해 내분설은 재고되어야 할 듯하다. 아마도 이심이란 군사력 중심으로 재편되는 동아시아 국제 정세나 점증하는 거란의 군사적 위협을 발해가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던 내부 분위기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나라잃은 백성, 잊혀진 나라
거란은 전쟁에 나설 때 늘 상대의 틈을 노렸다. 송나라를 공격할 때와 마찬가지로 발해의 틈을 알아 채고, 공격에 나섰다. 약육강식의 국제 정세도 모르고 적도 모르고 자신의 틈도 몰랐던 발해국이 멸망하자, 발해인은 나라 잃은 백성이 되었다. 일부 발해인은 거란에 순응하였고, 다수의 발해인은 끌려가 피지배민이 되었다. 발해인은 이에 저항하며 2백여 년간 발해 부흥운동을 벌였다. 남쪽으로 달아나 고려의 주민이 된 발해인도 수만에 이르렀다. 발해인과 발해국은 그들이 있었던 땅이나 교류했던 나라에서 점차 잊혀져 갔다. 이들이 다시 새삼 주목을 받아 기록에 등장하기까지는 8백여 년이 흐른 18세기가 되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