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츠이 야요리 제공: 액티브뮤지엄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wam)
20년 전인 2000년 12월, 일본 도쿄(東京)에서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히로히토 일왕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2000년 성노예전범여성국제법정(이하, ‘여성국제법정’)’이 열렸다. 이 법정은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다루지 않았던 전시 성폭력 문제를 다시 재판하고자 일본군‘위안부’였던 아시아의 피해 여성들과 세계의 페미니스트들이 초국적으로 연대하여 이루어낸 민간 법정이다. 저널리스트이자 여성운동가인 마쓰이 야요리(松井やより, 1934~2002)는 이 법정 개최를 제안하고 법정을 여는 데 중심 역할을 한 인물이다.
‘여성국제법정’ 개정 인사를 하고 있는 국제실행위원회 공동대표 3인 중 1인 마쓰이 야요리 ⓒVAWW RAC
마쓰이 야요리, 다양한 차별을 경험하다
마쓰이 야요리는 1934년 4월 12일, 일본 교토京都의 이와쿠라岩倉에서 4남 2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야요리’라는 이름은 한자로 ‘耶依(야의)’라고 쓰며 ‘예수로 귀의한다’ 즉, 기독교 신앙 안에서 산다는 의미이다. 마쓰이 야요리는 기독교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랐고, 기독교를 ‘국경에 사로잡히지 않은 사상’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훗날 그의 다양한 초국적 행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아시아태평양전쟁이 시작된 1942년 소학교에 입학한 마쓰이 야요리는 도쿄 공습을 피해 도치기현栃木県 야이타矢板라는 곳에서 생활했다. 그는 이곳에서 다양한 차별을 경험했다. 기독교를 용인하지 않았던 당시 일본에서 기독교인으로서, 근대화 이후 자신들을 수탈해가는 도시에 대한 분노로 가득한 농촌에서 도시 이주자로서, 다쳐서 다리가 불편했을 때 몸이 불편한 자로서 겪은 차별이 있었다. 군인들의 폭력도 목격했다. 이때의 경험은 일본군대가 외국에서 얼마나 잔혹한 행위들을 했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했다.
도쿄외국어대학 영미과英美科에 재학 중이던 1957년, 마쓰이 야요리는 여성 억압이 팽배한 일본을 벗어나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자 미국과 프랑스에 교환학생으로 갔다. 하지만 두 나라에서 인종차별을 당한 것은 물론, 아시아인으로서 멸시를 받았다. 그는 서구가 비서구를 얼마나 냉혹하고 비정하게 지배하고 수탈하고 학살했는지를 확인했다. 그런 서구를 모델로 삼은 일본의 어리석음, 그리고 그런 서구를 뒤쫓기 위해 아시아권 국가를 식민지 지배하고, 나아가 군사 침략하여 잔학무도한 행위를 일삼은 자국에 혐오감을 느꼈다.
젠더 관점으로 기사를 쓰다
마쓰이 야요리는 1961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아사히朝日신문사 사회부 기자로 입사해 싱가포르 특파원, 편집위원 등을 거쳐 1994년 정년 퇴임했다. 1960년대 정치·경제 관련 취재는 주로 남성 기자가 담당했기 때문에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관점을 달리하기로 했다. 경제 대국의 길을 달리던 1960년대 일본 성장의 이면을 집중적으로 취재하며, 소비자·공해·복지·환경·인권 문제 등을 남성 기자들과는 다른 관점에서 취재했다.
70년대 들어 미국 등지의 취재 경험을 통해 서구의 페미니즘을 접한 후 신문사뿐 아니라 일본 사회 전체가 얼마나 남성 중심적으로 움직이는지를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젠더 관점으로 기사를 쓰기로 했다. 장애인, 어린이, 여성, 이주노동자와 서구의 경제 그늘에 사는 제3세계 사람들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억압과 차별을 다루었다. 전쟁과 폭력 문제에도 천착했다. 싱가포르 특파원을 지내며 아시아에서의 전쟁 책임 문제에 몰두했다. 그때까지의 일본의 평화운동은 피해자 의식에 치우쳐 있어 가해자의 책임을 생각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마쓰이 야요리는 가해자로서의 인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 저널리스트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한국 여성을 상대로 한 70년대 일본 남성들의 기생관광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취재했다. 이 과정에서 남성 중심적인 언론에서 성을 둘러싼 인권 문제를 다루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절감했다. 이는 일본이 군사력으로 짓밟았던 나라들을 경제력으로 다시 유린하는 것이며, 만약 일본 여성들이 이를 모른 체할 경우 침략전쟁을 저지하기는커녕 도리어 가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본 여성을 억압하고 있는 자국의 체제가 아시아의 여성들까지도 억압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노수복과 마쓰이 야요리 ⓒWAM
‘여성국제법정’으로 초국적 연대를 이끌다
마쓰이 야요리는 기생관광 문제를 접하며 ‘위안부’ 문제와 만났다. 80년대 초, 싱가포르 특파원으로 태국 하쟈이의 노수복과 오키나와의 배봉기를 취재하며 ‘위안부’ 문제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1988년 ‘위안부’ 문제 조사 차 일본을 방문한 윤정옥 교수와도 인연을 맺었다. 그는 한국뿐만 아니라 필리핀, 중국 등 아시아 각국의 ‘위안부’들을 취재했다.
마쓰이 야요리는 1993년 비엔나 세계인권회의 이후, 1997년에는 필리핀 여성인권아시아센터ASCENT와 함께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을 주제로 국제회의를 개최하고 전시 성폭력 처벌에 대해 논의했다. 이후 각국 여성과 함께 초국적 네트워크 VAWW-NET을 만들었고, 그는 VAWW-NET Japan의 대표가 되었다.
결국 마쓰이 야요리는 ‘처벌 문제’를 마지막 과제로 생각하고, 유엔 인권위원회가 개최한 NGO포럼(1998)과 제5차 아시아연대회의에서 1966년의 ‘러셀법정’과 같은 민중 법정 형식으로 ‘여성국제법정’을 열자고 제안했다. 물론 제안이 받아들여지고 법정이 개정될 때까지의 준비는 쉽지 않았다. 이 ‘여성국제법정’에는 8개국 64명의 ‘위안부’ 피해자가 참가했고, 매일 천여 명이 방청했다. ‘여성국제법정’은 여성에 대한 전시 성폭력 종식을 위해 여성·인권운동이 초국적으로 연대하여 일군 의미 있는 법정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위안부’ 문제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피해자들은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책임자를 처벌하는 법정 현장에서 함께하며 상처와 억울함을 치유받기도 했다.
마쓰이 야요리는 2002년 전쟁으로 고통받는 여성들을 만나러 간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와 암 판정을 받고 짧은 투병 생활 끝에 사망했다. 전쟁·다양한 차별·유학·신문기자로서의 경험과 기독교· 여성주의 등의 사상이 삶의 바탕이 된 마쓰이 야요리. 그는 차별과 억압의 현장으로 달려가 피해자에 공감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초국적 네트워크를 맺으며, 작은 자들의 편에 서서 리더십을 발휘한 페미니스트 리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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