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남 원고의 아버지 동선홍은 1911년 1월 9일 생으로 1943년 해군 공원으로 강제동원되었다가 1944년 10월 25일 북태평양에서 사망했다. 유족에 통보도 없이 1959년 10월 일방적으로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었다.
야스쿠니신사 항의 방문(2015.9.25)
저는 이 재판의 원고인 동정남입니다.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어 있는 동선홍의 아들입니다. 재판장님을 비롯하여 이 자리에 참석하신 원고 측 변호사님들과 피고 측 변호사님들, 그리고 이 재판을 방청하기 위해 모여주신 모든 분께 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저는 1944년 일본 나고야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강제동원되어 집에 안 계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버지는 나고야에 있던 미쓰비시 공장에서 일을 하셨고, 가족도 모두 나고야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1943년 3월 회사에 동원 명령이 내려져 조선 사람들이 강제동원 당하자, 아버지는 안내자로서 그들과 함께 가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고 연락도 끊어졌다고 합니다. 1945년 3월부터 나고야에 폭격이 심해지자 어머니는 어린 저와 누이 두 명을 데리고 전남 고흥군 외가로 돌아왔습니다. 그 때부터 우리 3남매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습니다. 제가 3살일 때의 일입니다.
(…중략…)
결혼을 하고, 자식이 생기고,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의 기록을 찾아야겠다는 마음이 커졌습니다. 자식으로서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흔적을 찾기 위해 혼자 일본어를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1990년 초, 제가 태어나고 우리 가족이 살았던 나고야시 미나토구에 찾아갔습니다. 그곳은 모두 변해서 창고 같은 건물들이 가득 들어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나토구청, 나고야시청, 아이치현청에 아버지의 기록이 있는지를 물어봤습니다. 그러나 공습으로 모든 기록이 불타버렸다는 대답밖에 들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단념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1944년에 미쓰비시 공장에서 근무하다 치시마 훈련소로 동원되었다는 이야기를 이모님께 들어서인지, 아버지가 어딘가에 살아계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997년 5월 블라디보스톡 한국총영사관을 방문했습니다. 고맙게도 영사관에서는 현지 새고려신문사에 광고를 내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오기가 생겼습니다. 흔적을 찾고야 말겠다고 각오했습니다. 아버지의 기록을 추적하기 시작한지 약 10년 만에 해군 사망자 명부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발견했습니다. 명부에는 풍전선홍豊田善洪이라는 창씨명으로 기록되어 있었고, 오미나토 시설부에 배치됐다가 1944년 10월 25일 북태평양에서 전사했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 명부에는 아버지와 같은 고향 사람들이 같은 날짜, 같은 장소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다시 일본 땅을 찾았습니다. 아오모리현 오미나토의 해군 훈련소에도 가봤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곳에 좀 더 가까이 가기 위해 북해도에도 갔고, 사할린에도 갔습니다. 북태평양 바다를 바라보며 사진으로만 기억하는 아버지를 처음으로 소리쳐 불렀습니다.
재판장님, 그리고 이 법정 안에 계시는 모든 분들, 그 때 제 심정이 어땠는지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저는 더 이상 일본 때문에 상처 받거나 괴로워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인 2013년 9월 6일에는 「구해군 군속 신상 조사표」에서 더 자세하고 충격적인 아버지의 흔적을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오미나토에서 치시마 시설부로 배치되어 기타치시마北千島에서 근무하다 1944년 10월 25일 하쿠요마루白陽丸가 침몰되어 행방불명되었으며 1946년 9월에 전사자로 공표되었다고 합니다. 고향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가족들을 그리며 차가운 바다에서 죽어간 아버지를 생각하면 슬픔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가장 충격을 받고 화가 난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1959년 7월 31일 아버지가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었다고 표기된 동그란 도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야스쿠니신사에는 유해는커녕 아버지의 이름이 적힌 명단만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야스쿠니신사에 신으로 합사되어 있다는 것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를 찾기 위해 그 기나긴 세월 동안 얼마나 노력했는데, 아버지께서 어디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도 모른 채, 살아계실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일본 전역을 헤매고 러시아까지 갔는데, 가족들에게는 연락도 하지 않고 합사했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더군다나 유해는 바다에 가라앉았는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야스쿠니신사가 아버지를 신으로 이용하고 있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 아버지를 야스쿠니신사에 합사했는지 묻지 않겠습니다. 따지고 싶지도 않습니다. 당장 야스쿠니신사에서 제 아버지 이름을 빼라고 강력히 요구할 뿐입니다. 제 아버지는 한국 사람이지 일본 사람이 아닙니다. ‘천황’을 위해 죽은 사람이 아닙니다. 일본이 일으킨 전쟁 때문에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도 억울한데,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어 있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멀쩡히 살아있는데 사망 사실도 알려주지 않고, 합사 의사도 묻지 않았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지금도 식민지 시대입니까. 당장 제 아버지의 이름을 야스쿠니신사에서 뺄 것을 다시 한 번 강력히 요구합니다.
(…중략…)
올해는 해방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얼마 전 아베 총리의 전후 70년 담화를 보고 분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한 아베 총리에게 큰 기대를 하지도 않았지만, 담화 내용에도 진실성이 없었습니다. 식민 지배의 고통을 당한 한국 사람들에 대해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으면서 무엇을 반성하고 누구에게 사죄한다는 말입니까. 저와 같은 피해자들이 아직도 고통 속에 살고 있는데 어떻게 모든 문제가 해결된 듯 말하는 것입니까. 평화를 이야기하며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고, 평화헌법을 무시한 채로 일본을 다시금 전쟁이 가능한 나라로 만들려고 하니 전 세계가 웃을 일입니다.
저는 일본 정부가 피해자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고 구체적인 실천으로 책임져야 하며, 야스쿠니신사에서 제 아버지의 이름을 빼야 한다는 사실을 마지막으로 요구합니다. 더 이상 이 핑계 저 핑계 대지 말고 우리에게 고통을 강요하지 마십시오.
동북아역사재단이 창작한 '동선홍의 아들 동정남의 진술서'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