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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한러수교 30주년과 역사적 기원
  • 최덕규, 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한러수교 30주년과 역사적 기원

한·소 정상 공동선언문 서명(1990)

소련(러시아)을 공식 방문 중인 노태우 대통령이 소련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한·소 정상회담 공동선언문에 서명하는 모습 ⓒ대통령기록관



1990930, 한국과 소련은 국교를 수립했다. 한러 양국은 1884년 조러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최초로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나,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을사늑약(1905)에 의해 공식적인 관계가 중단되었다. 따라서 한소수교는 85년만의 관계 복원을 의미했다. 이후 미소 냉전 체제에서도 한국과 소련은 적대 관계에 있었다. 이렇게 단절과 대립으로 점철된 관계를 정상화 한 계기가 19906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한국 노태우 대통령과 소련 미하일 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의 정상회담이었다.

    

한소수교의 역사적 의미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연방이 수립됨에 따라 한소관계는 한러관계로 승계되었다. 한국과 러시아는 2014년 비자 면제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2019년 양국 방문자 수가 77만 명에 이를 정도로 관계를 발전시키고 있다. 그 결과 한국은 러시아의 8위 교역국이 되었으며 러시아는 한국의 10위 교역 파트너가 되었다.


한러 양국은 1860년 두만강을 경계로 접경한 이래 역사적 경험을 공유해온 특징이 있다. 이는 중국 대륙의 역사적 변화가 인접국 조선의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왔던 이치와 유사하다. 러시아 제국과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정책이 대한제국의 운명을 결정하였듯이,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진영 간의 경쟁은 한반도 분단으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의 국왕 고종이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무기력했던 중국적 세계 질서의 대안으로 러시아를 중시했던 것처럼, 냉전 해체와 더불어 붕괴되어가던 공산 정권의 급변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소련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한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도 고종 정부의 북방외교를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소수교의 기원: 고종정부의 북방외교

고종 정부의 북방정책에 관한 연구는 그것이 오늘날 신북방정책의 원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근대 한국 외교는 전통적인 중화 질서의 틀을 깨고 나오는 동시에, 유교적 이념에서 실용주의적 다변多邊외교로 전환하는 과정을 통해 성립되었다. 화이론華夷論에 근거한 방아론防俄論은 청국淸國이 조선 국왕 고종高宗에게 고취시킨 한국 외교의 지침이었다. 따라서 고종이 공러의식恐露意識을 극복하고 러시아를 전략적 파트너로 받아들인 조러수교(1884)는 사대교린事大交隣의 전통 외교에서 근대 외교로 전환하는 분수령이었으며, 나아가 자주 독립국가 건설의 출발점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조러수교 이전까지 근대 한국의 외교 지침서는 조선책략朝鮮策略이었다. 이 책은 김홍집金弘集이 수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1880718일 청나라 공서참찬公署參贊 황준센黃遵憲을 만나, 그가 쓴 朝鮮策略1책을 받아 가지고 돌아와 고종이 열람하도록 올림으로써 국내에 알려지게 되었다. 주일청국공사 허루장何如章과 참찬관 황준센은 일리伊犁분쟁을 계기로 야기된 러·청 간의 전쟁 위기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파견된 김홍집에게 조선의 외교정책에 대해 조언하고 권고한 바 있었다. 러시아의 남침을 막기 위해 친중국親中國, 결일본結日本, 연미국聯美國하여 자강自强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 그 요체였다. 환언하면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침략은 조선으로부터 시작될 것인바, 러시아의 남하를 두려워하는 청국, 일본, 미국과 협력하여 이를 저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고종 정부는 조선책략과 달리 왜 러시아와 수교를 모색했는가? 이는 새롭게 생각한 인물은 누구인가?’와 연결된다. 한소수교가 공산국가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여 이루어진 것과 같은 맥락이기 때문이다. 조선책략에서 러시아의 침략에 대비한 방아론을 설파했음에도, 공러의식恐露意識을 극복하고 러시아를 근대 한국의 국제관계사에 포섭한 인물은 조선의 국왕 고종이었다. 그가 러시아와 새로운 관계 맺기를 시도했던 이유도, 쇠락하는 중국을 대체할 새로운 세계 질서를 전망했기 때문이었다.

 

문재인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정상회담(2018) ⓒ청와대

문재인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정상회담(2018) ⓒ청와대

 

조러수교의 토대: 공러의식의 극복

한소수교가 공산국가 소련에 대한 공포를 해소하는 계기가 되었듯, 조선과 러시아 접근의 토대는 공러의식의 극복이었다. 조선책략은 러시아의 팽창에 대한 청국의 우려일 뿐 조선과는 무관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청국의 쇠락은 청에 대한 조선의 전통적인 신뢰를 약화시켰기 때문이었다. 이는 조선이 자주와 독립을 강화하기 위해 청의 동요를 기회로 삼을 수 있음을 의미했다. 고종은 청에 기대어 독립을 유지하기도 힘들거니와, 3국이 조선을 침략할 경우 청의 원조를 기대하기 난망하다는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고종의 이런 입장은 1880102일 수신사 김홍집의 복명을 듣는 자리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이 이르기를, 우리나라가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혹시 우리를 꼬이고 놀라게 하려는 단서가 아닌가?”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일본 사람이 말하기를 이것은 조선을 위하여 대신 도모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저희 나라를 위하여 그러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承政院日記, 高宗 17828) 이에 고종은 방아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정리했다. “이것은 조선을 위하여 대신 도모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청국을 위하여 그러한 것이다.” 조선책략은 사실상 청나라의 생존전략이었다.

 

한러관계 연구의 과제

러시아는 한국 근현대사의 전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도 한러관계사 연구는 다음의 이유들로 인해 미진한 상태에 있다. 첫째, 자료의 한계이다. 러시아국립문서관 소장 한국 관련 자료들은 접근과 수집에 제약이 따르며, 오래된 사료들은 해독상의 어려움이 있다. 이 문제는 양국의 관련 기관 차원의 협력이 요구된다. 둘째, 한러관계사는 자기 완결성을 지닌 학문이라기보다는 인접 학문과 소통을 통해 완성되는 특징이 있다. 왜냐하면 한러관계사가 제국주의 국제관계사의 일부이자 냉전사의 일각을 이루고 있기 때문인바, 이들과의 대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러관계사를 제대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한국과 러시아 양국의 관계에 그치지 않고 보다 거시적이고 글로벌 히스토리적 접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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