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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포커스
과거사를 둘러싼 한국과 일본의 두 얼굴
  • 조 건, 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과거사를 둘러싼  한국과 일본의 두 얼굴


일본의 얼굴: 강제동원 피해자를 기억하는 사람들

20199월 일본 나가노현中野縣 마쓰시로松代에서 마쓰시로 대본영 평화기념관(이하 마쓰시로 기념관) 관계자들을 만난 적이 있다. 이미 20~30년을 훌쩍 넘기며 오랫동안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70세 전후가 되었지만 의지만큼은 변함없이 굳건한 분들이었다. 초면이었던 한국의 연구자를 반갑게 맞이하던 그들의 얼굴을 지금도 기억한다.


마쓰시로 기념관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이 연합군의 상륙에 대비해 구축했던 거대한 지하 시설을 보존하고 교육하는 곳이다. 무엇보다 지하 시설 건설에 동원되었던 수천 명의 조선인피해자들을 기억하고, 관련 자료를 발굴·정리하며, 이를 바탕으로 연구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한국의 시민들에게는 이름조차 생소한 곳에서 피해의 현장을 지키고 가르치기 위해 헌신하는 이들, 그리고 이들을 지지하는 지역사회의 존재는 고마운 만큼 부끄럽고 애달픈 느낌이 들게 한다.


마쓰시로 지하호의 모습마쓰시로

마쓰시로 지하호의 모습마쓰시로


그러나 마쓰시로 기념관의 활동가들에게 항상 따뜻한 시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본 정부의 방침에 따라 이들의 활동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때가 있었다. 마쓰시로 마이즈루산舞鶴山 지하호 앞에는 나가노시 당국에서 세운 마쓰시로 대본영 지하호를 설명하는 알림판이 있는데, 그 내용 중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이 건설에는 (중략) 노동자로서 많은 조선과 일본 사람들이 강제적으로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관계 자료가 남아있지 않을 수도 있어 반드시 모두가 강제적이지는 않았다는 등 여러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원래 지하호 앞 알림판에는 강제적으로 동원되었다.”라는 문구가 명시적으로 쓰여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제1차 아베 신조 내각 당시에 알림판의 문구가 위와 같이 변경되었다고 한다. , 강제동원을 명시한 문구가 동원되었다고 합니다라는 식으로 분명하지 않게 바뀌었고, 이어서 근거 자료가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모두가 강제적이지는 않았다등의 문구가 추가되었다.


마쓰시로 기념관의 활동가들은 이 문구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기념관을 방문하는 많은 사람에게 이러한 문구의 변화를 포함해서 마쓰시로의 과거와 현재를 설명하고 있다. 마쓰시로 뿐만 아니라 일본 각 지역의 구석구석에는 지금도 과거 역사의 부정적인 모습을 성찰하고 그로 인한 피해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마쓰시로 지하호 구조를 설명하는 마쓰시로 기념관의 기타하라 다카코(北原高子)

마쓰시로 지하호 구조를 설명하는 마쓰시로 기념관의 기타하라 다카코(北原高子)

 

우리의 얼굴: ‘강제로 막 내린 강제동원위원회

한국에서 강제동원이라는 주제가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것은 30여 년 전부터이다. 피해자의 증언집이 출간되고, 관심 있는 연구자나 시민들의 활동이 있었지만 우리 사회는 1990년대 이후가 되어서야 이에 응답했다. 그리고 학계의 연구가 어느 정도 진척되었을 때 정부 역시 그에 대응한 조처를 마련하였다.


200411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하였다. 위원회는 강제동원 피해자 및 유족의 신청을 받아 피해 여부를 심사하는 한편, 강제동원 피해의 진상을 학술적으로 규명하기 위한 조사 활동을 펼쳤다. 이후 2008년에는 태평양전쟁전후 국외강제동원희생자지원위원회를 만들어 피해가 인정된 이들에 대한 지원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2010년 두 위원회를 합쳐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이하 위원회)를 발족하였다.


위원회는 통합되기까지 5년 남짓한 기간에만 세 개의 이름을 가졌다. 애초에 관련 특별법에 따라 그 존속이 한시적으로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마치 해진 옷을 기워 입듯 위원회 유지의 필요성을 국회에 설명해 가며 시한을 연장해 갔다. 이후에도 위원회는 관련 시민단체와 학계 전문가의 의견과 지원에 힘입어 6개월, 또는 16개월씩 연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힘겹게 활동을 연장해 가던 위원회는 2016630일 공식 해산되었다. 226,583건의 피해 신청을 처리하고, 34만 명 분량의 강제동원 기록물을 발굴했으며, 32건의 진상 조사를 진행했지만 과제는 여전히 산적해 있었다. 그런데도 정부와 국회는 위원회의 필요성을 더이상 인정하지 않았다.


피해자 단체는 반발했다. 국회에 위원회의 존속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위원회를 폐지하기 위해 당시 행자부가 문서를 날조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런 와중에 위원회 폐지를 앞두고 있던 201511, 일본의 시민단체와 연구자들이 위원회를 존속 시켜 달라는 청원서를 청와대와 국회에 제출하였다. 이들은 위원회의 활동 덕분에 많은 피해자가 보상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 위원회가 최근까지 30명이 넘는 간토關東 학살 희생자를 확인하여 유족을 찾은 만큼 이에 관한 진상 조사가 시급한 상황이라고 존속 청원 이유를 밝혔다. 한국은 폐지하고 일본은 존속을 요구하는 형국이었다.


우리는 일본의 우경화를 우려한다. 일본 정부의 과거사에 대한 자세를 비판한다. 일본이 과거 제국주의 시대에 저지른 식민 지배와 침략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인정하고 반성하기를 요구한다. 그러면 과연 우리는 그동안 그에 합당한 자세로 이 문제에 직면直面하였는가를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위원회 폐지 결정에 항의하는 유족회(2015. 12. 27.) ⓒ연합뉴스그리고

위원회 폐지 결정에 항의하는 유족회(2015. 12. 27.) ⓒ연합뉴스그리고

 

일본의 얼굴: “일본에 의해 인생을 망쳐버린 사람들이 남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지난 328일 강제동원 피해자 이학래 씨가 96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일제 강점 말기 연합군 포로를 감시한다는 명목으로 동원되었던 일본군 군속이었다. 동남아시아 열대의 연합군 포로 수용소에서 일본군의 명령을 받아 포로들을 노역시키는 일을 담당했었다. 그에게 일본군의 명령은 매우 절대적이었던 반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는 제네바협약 등 포로 취급에 대한 국제 규정은 배운 적이 없었다. 결국 전쟁이 끝난 후 연합군은 이학래 씨를 가해자로 지목했다. 그는 1947318일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다행히도 이학래 씨는 감형되어 1956년 출감했지만 전범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고향에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가 감옥에 있으면서 동지들과 함께 만든 모임이 있었다. 향수회鄕愁會. 몸은 갈 수 없지만 그들의 마음은 늘 고향을 떠나던 그 날 그곳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향수회는 한인회로, 그리고 다시 동진회東進會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기나긴 투쟁이 시작되었다.


이학래 씨는 죽기 전까지 일본 정부의 사과와 보상을 요구했다. 끌고 갈 때는 일본인 신분으로 끌고 가서 형벌도 일본인처럼 받았는데, 이제 와서 너는 한국인이라 우리는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다라고 하는 일본의 처사에 분노했다. 그러던 중 동지들이 하나둘씩 유명을 달리했다. 그는 동지들을 차례로 보내면서 반드시 그들의 원한을 풀어주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 의지로 60년을 넘게 버티다, 결국 그마저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언론은 이학래 씨의 삶과 죽음을 조명하며 애도의 뜻을 표했다. 그리고 일본에서도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이 나라의 정의나 양식이란 무엇인가. 정치의 그리고 그 정치의 부작위를 간과해 온 국민의 책임이 묻는다. 재일교포 이학래 씨가 지난달 세상을 떠났다. 96세였다. (중략)

지난 대전大戰에서는 조선·대만에서 많은 사람이 일본인으로 동원되었다. 그러나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표 당시 일본 정부는 한 건의 법무부 국장 통달로 구 식민지 출신자로부터 일본 국적을 일률적으로 빼앗아 원호 행정의 테두리 밖에 두었다.

불합리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전범들을 괴롭힌 것은 고국의 따가운 시선이다. 귀국해서도 대일 협력자로 주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도 있다. (중략)

이 나라를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일본에 의해 인생을 망쳐버린 사람들이 남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우리 언론에 게재되었을 법한 내용이지만 놀랍게도 윗글은 지난 47일 일본 아사히신문이 남긴 기사였다. 일본 정부도 국회도 여전히 이학래 씨 등의 피해에 대한 사과와 보상에는 무관심하다. 일부 의원들이 관련 법안을 준비했지만 법제화는 요원하다. 그런데도 일본에는 아사히신문과 같은 의견이 있다. 한국과 일본을 통틀어 가장 마음을 움직이는 송사送辭였다고 생각한다.

 

한국인 전범 피해자, 동진회 회장 故 이학래(2021. 4. 7.) ⓒ연합뉴스와

한국인 전범 피해자, 동진회 회장 故 이학래(2021. 4. 7.) ⓒ연합뉴스

 

한일 양국의 야누스적 두 얼굴, 그리고 보편적 가치의 과거사

하나의 인격체처럼 국가도 시대와 상황, 구성원에 따라 여러 얼굴을 갖는다. 지금 일본 정부가 강제동원과 일본군위안부피해를 부정하는 불의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 안에는 정의와 양심을, 평화와 인권을 붙잡고 놓지 않는 수많은 얼굴들이 존재한다.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일본에게 과거사를 반성하고 인권을 지키라고 요구하면서도 반면 그와는 상반된 표정을 짓는 경우가 적지 않다. ‘반일종족주의집필자들을 들먹일 것까지도 없이 우리 정부가 강제동원 등 과거사 문제를 처리해 온 과정이 그러하다.


1965년 한일협정 이후 일본 정부의 과거사에 대한 입장 표명과 변화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대안을 마련하는 것은 중요하다. 다만, 우리가 일본 총리나 정부 고위 관계자의 발언 하나하나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일본의 수많은 시민단체와 연구자들이 자국 정부의 입장과는 거리를 둔 채 보편적 가치 중심의 과거사를 지켜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한일 양국 정부가 지난 세기 일어났던 불행한 역사를 현실 정치 그 이상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정치는 정치적 습성을 가질 뿐이다. 그리하여 교육은 교육의 사명을, 역사는 역사의 책무를 다하는 것이 필요하다. 서로 더 귀한 가치를 공유하는 얼굴끼리의 대면을 더 넓게 더 잦게 가져야 한다. 우리 재단이 그러한 일의 맨 앞에 설 수 있으면 좋겠다.

야누스Janus는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이다. 앞뒤가 다른 두 얼굴을 가진 탓에 주로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가리키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곤 한다. 한일 양국 모두에는 야누스적인 측면이 있다. 국제사회에서 항상 상대방의 선의만을 기대할 수 없듯, 우리도 상대 국가의 상황에 따라 다른 얼굴을 가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국내 정치와 국제 정치의 흐름에 따라 두 얼굴 중 하나의 모습을 띠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미 해답을 알고 있다. 지난 20세기 전반 두 번의 큰 전쟁을 거치며 인류가 절대 훼손해서는 안 될 보편적 가치를 정립해 왔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이 후반에 접어들던 1944년 가을 미국 워싱턴 D.C. 덤바턴 오크스Dumbaton Oaks에서 미···4개국 대표들이 모여 국제기구 설립에 합의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UN은 결국 인류가 스스로를 파국에서 구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평화와 인권, 그리고 최근 환경에 이르기까지 꼭 지켜져야 할 보편의 가치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과연 우리는 일본의 어떤 얼굴과 마주할 것인가. 그리고 일본에게 어떤 얼굴을 보여줄 것인가. 상극相剋의 얼굴을 서로 대응하며 살기에는 두 나라의 역사가 너무 깊고, 땅은 그 누구보다 가깝다. 다행스럽게도 야누스는 시작의 신으로 불리기도 한다. 두루 알다시피 1January의 어원 역시 야누스에서 왔다. 어떤 얼굴을 상응하느냐에 따라 언제나 새로운 출발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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