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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애국주의와 고대사 만들기
두 번째 이야기 중화민족의 기원, 염제
  • 배현준, 재단 북방사연구소 초빙연구위원

두 번째 이야기 중화민족의 기원, 염제


중국 학계에 의하면 염제는 중화문명을 시작하고, 황제는 중국 제왕의 시작이며, 요임금은 중화문명의 핵심을 형성하고, 우임금은 하나라를 건설했다고 한다. 재단 연구팀은 위의 신화상 인물들이 고고 유적과 결합되어 역사적 인물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추적해왔다. 이와 관련한 연구 성과는 다섯 차례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며, 이를 통해 중국의 애국주의와 고대사 만들기가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염황의 자손(炎黃子孫)’ 개념의 출현과 전개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단군의 자손이라고 여기듯 중국인은 스스로를 염황의 자손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청나라 말기까지도 중국은 천자를 중심으로 하는 왕조국가였기에 염황의 자손이라는 인식은 왕조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다가 19세기 중반 이후 두 차례의 아편전쟁(1840, 1956)과 청일전쟁(1894~1895)을 겪으면서 중국은 서구 열강은 물론 일본에 패배하는 상황이 연속된다. 그 과정에서 서구의 민족국가’, ‘민족주의개념이 전해지면서 중국의 민족의식도 형성되기 시작한다. ‘천자의 전유물이었던 황제와 염제는 곧 중화민족의 상징이 되어 염황의 자손인식은 한순간에 민간으로 퍼져 나가게 된다.


한편 염황의 자손개념이 처음부터 모든 중국 민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청나라 말기의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현 왕조 체제를 부정하는 혁명파가 말하는 염황의 자손은 사실 한족漢族에 국한된 것이었다. 그들이 타도의 대상으로 여기는 청나라는 만주족滿州族이 세웠기에 그 대척점에 있는 한족을 강조해야 했던 것이다.


혁명파는 1911년 신해혁명을 통해 정권을 잡고 중화민국을 건립한다. 그런데 이 중화민국의 영토와 구성원은 이전 청나라와 변함이 없었다. 게다가 불안한 국내 정치와 사회 상황 속에서 혁명파는 중국의 소수민족, 특히 변강의 소수민족을 모두 포용할 수 있는 민족 개념이 필요하게 된다. 임시 총통인 쑨중산孫中山·쑨원은 19121한족, 만주족, 몽고족蒙古族, 회족回族, 장족藏族이 모두 중국을 이루는 민족임을 공식적으로 선포한다五族共和. 이제 한족뿐만 아니라 소수민족도 중국을 이루는 구성원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한족의 조상으로 추앙받던 염제와 황제도 소수민족들의 공통 조상이 된 것이다.


이후 계속되는 열강의 제국주의 위협과 항일전쟁을 연이어 겪으면서 중국인은 염황의 자손기치 아래 더욱더 뭉치게 된다. 현재는 혈연 계승 관계보다는 다소 상징적으로 문화·경제적으로 서로 얽히고설킨 중국 56개 민족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으로서 염황의 자손개념이 사용되고 있다.

 

중화민족의 기원과 염제

과거에는 염제炎帝와 황제黃帝가 전설 속의 존재로 여겨졌기에 염황의 자손이라는 개념은 다소 추상적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고고학 자료가 증가하면서 역시 전설 속의 존재로 여겨지던 상나라는 인쉬殷墟 유적 및 갑골문을 통해 그 실체가 밝혀졌다. 나라는 얼리터우二里頭 유적을 근거로 중국 내에서 이미 실존했던 역사적 실체로 인정된다. 최근 중국은 중화문명탐원공정(2001~2015)을 통해 하나라 이전 오제시대가 증명되었고, 중화문명의 역사가 5천 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염제는 오제시대에 속하는 황제와 형제 관계이면서, 삼황시대에 속하는 신농神農과 동일한 인물로 여겨져 염제신농으로 불린다. 따라서 염제의 실체를 밝힐 수 있다면 오제시대보다 앞선 삼황시대의 역사화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 중화민족의 시작을 하나라, 오제시대에서 삼황시대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이다.

 

고고학을 통한 염제의 실체화

중국은 염제를 실체화하기 위해 고고학 자료를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염제 관련 문헌에서 보이는 농업과 수공업 발달 및 집단 간 전쟁이 신석기시대 후기 사회와 어느 정도 연결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 중 양사오 문화 반포 유형을 염제로 대응시키고 먀오디거우 유형을 황제로 대응시킨 후 문헌과 결합하여 이들의 실체화를 시도한다. 신석기시대 후기에 먀오디거우 유형이 반포 유형을 대체하는 양상을, 황제가 신농을 대신하여 주변 제후들을 이끄는 것과 대응시킨다. 토기 표면에 그려진 돌도끼는 전쟁을 의미하고, 새가 물고기를 물고 있는 도안은 황제가 염제와의 전쟁(판천대전) 후 승리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한다(그림 1~6).


그러나 각기 다른 지역에, 또는 각기 다른 시기에 유행하던 문양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고고학적으로 시대를 불문하고 그리 어렵지 않게 관찰되는 현상이며, 전쟁 외에도 평화적인 융합에 의해서 충분히 나타날 수 있다. 그리고 신석기시대 돌도끼는 농업 도구로 널리 사용된다. 무력 충돌이 빈번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실제 무기류가 다량으로 출토되는 것을 제시해야 하지만 양사오 문화 시기로 보고된 무기류는 소량의 석촉을 제외하고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현대사회 속 염제

이렇게 다소 억지스러운 문헌과 고고학 자료의 결합은 중국 각지에 염제 관련 전승과 제사 의식이 성행하는 결과를 만들게 되었다. 샨시陝西 바오지寶鷄지역은 염제의 발원지와 관련이 있는 곳으로, 후베이湖北 쑤이저우隨州지역은 신농의 탄생지로, 후난湖南 주저우株洲지역은 염제신농이 죽은 곳으로, 산시山西 가오핑高平은 신농이 오곡을 접한 곳으로 여겨진다. 이 지역들은 물론 염제신농과 관련된 전설이 내려오는 곳이면 어김없이 염제 관련 기념물이 건설되고 제사 의식이 거행된다. 이 중 일부는 국가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체계적인 관리를 받고 전국애국주의교육기지로 지정되기도 한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염제의 실체화는 중국인에게 민족적 자부심을 부여함과 동시에, 다양한 민족이 얽혀 살아가는 중국 사회를 단합시킬 수 있는 좋은 기제가 된다.중국 학계에 의하면 염제는 중화문명을 시작하고, 황제는 중국 제왕의 시작이며, 요임금은 중화문명의 핵심을 형성하고, 우임금은 하나라를 건설했다고 한다. 재단 연구팀은 위의 신화상 인물들이 고고 유적과 결합되어 역사적 인물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추적해왔다. 이와 관련한 연구 성과는 다섯 차례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며, 이를 통해 중국의 애국주의와 고대사 만들기가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염황의 자손(炎黃子孫)' 개념의 출현과 전개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단군의 자손이라고 여기듯 중국인은 스스로를 염황의 자손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청나라 말기까지도 중국은 천자를 중심으로 하는 왕조국가였기에 염황의 자손이라는 인식은 왕조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다가 19세기 중반 이후 두 차례의 아편전쟁(1840, 1956)과 청일전쟁(1894~1895)을 겪으면서 중국은 서구 열강은 물론 일본에 패배하는 상황이 연속된다. 그 과정에서 서구의 민족국가’, ‘민족주의개념이 전해지면서 중국의 민족의식도 형성되기 시작한다. ‘천자의 전유물이었던 황제와 염제는 곧 중화민족의 상징이 되어 염황의 자손인식은 한순간에 민간으로 퍼져 나가게 된다.


한편 염황의 자손개념이 처음부터 모든 중국 민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청나라 말기의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현 왕조 체제를 부정하는 혁명파가 말하는 염황의 자손은 사실 한족漢族에 국한된 것이었다. 그들이 타도의 대상으로 여기는 청나라는 만주족滿州族이 세웠기에 그 대척점에 있는 한족을 강조해야 했던 것이다.


혁명파는 1911년 신해혁명을 통해 정권을 잡고 중화민국을 건립한다. 그런데 이 중화민국의 영토와 구성원은 이전 청나라와 변함이 없었다. 게다가 불안한 국내 정치와 사회 상황 속에서 혁명파는 중국의 소수민족, 특히 변강의 소수민족을 모두 포용할 수 있는 민족 개념이 필요하게 된다. 임시 총통인 쑨중산孫中山·쑨원은 19121한족, 만주족, 몽고족蒙古族, 회족回族, 장족藏族이 모두 중국을 이루는 민족임을 공식적으로 선포한다五族共和. 이제 한족뿐만 아니라 소수민족도 중국을 이루는 구성원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한족의 조상으로 추앙받던 염제와 황제도 소수민족들의 공통 조상이 된 것이다.


이후 계속되는 열강의 제국주의 위협과 항일전쟁을 연이어 겪으면서 중국인은 염황의 자손기치 아래 더욱더 뭉치게 된다. 현재는 혈연 계승 관계보다는 다소 상징적으로 문화·경제적으로 서로 얽히고설킨 중국 56개 민족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으로서 염황의 자손개념이 사용되고 있다.

 

중화민족의 기원과 염제

과거에는 염제炎帝와 황제黃帝가 전설 속의 존재로 여겨졌기에 염황의 자손이라는 개념은 다소 추상적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고고학 자료가 증가하면서 역시 전설 속의 존재로 여겨지던 상나라는 인쉬殷墟 유적 및 갑골문을 통해 그 실체가 밝혀졌다. 나라는 얼리터우二里頭 유적을 근거로 중국 내에서 이미 실존했던 역사적 실체로 인정된다. 최근 중국은 중화문명탐원공정(2001~2015)을 통해 하나라 이전 오제시대가 증명되었고, 중화문명의 역사가 5천 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염제는 오제시대에 속하는 황제와 형제 관계이면서, 삼황시대에 속하는 신농神農과 동일한 인물로 여겨져 염제신농으로 불린다. 따라서 염제의 실체를 밝힐 수 있다면 오제시대보다 앞선 삼황시대의 역사화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 중화민족의 시작을 하나라, 오제시대에서 삼황시대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이다.

 

반포 유형과 먀오디거우 유형 출토 토기  1, 2: 반포 유형(물고기 도안 유행)  3~6: 먀오디거우 유형(새 도안 유행)  출처: 國家文物局主編, 1995, 『中國文物精華大辭典·陶瓷卷』, 商務印出版社

반포 유형과 먀오디거우 유형 출토 토기

1, 2: 반포 유형(물고기 도안 유행)

3~6: 먀오디거우 유형(새 도안 유행)

출처: 國家文物局主編, 1995, 『中國文物精華大辭典·陶瓷卷』, 商務印出版社

 

고고학을 통한 염제의 실체화

중국은 염제를 실체화하기 위해 고고학 자료를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염제 관련 문헌에서 보이는 농업과 수공업 발달 및 집단 간 전쟁이 신석기시대 후기 사회와 어느 정도 연결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 중 양사오 문화 반포 유형을 염제로 대응시키고 먀오디거우 유형을 황제로 대응시킨 후 문헌과 결합하여 이들의 실체화를 시도한다. 신석기시대 후기에 먀오디거우 유형이 반포 유형을 대체하는 양상을, 황제가 신농을 대신하여 주변 제후들을 이끄는 것과 대응시킨다. 토기 표면에 그려진 돌도끼는 전쟁을 의미하고, 새가 물고기를 물고 있는 도안은 황제가 염제와의 전쟁(판천대전) 후 승리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한다(그림 1~6).


그러나 각기 다른 지역에, 또는 각기 다른 시기에 유행하던 문양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고고학적으로 시대를 불문하고 그리 어렵지 않게 관찰되는 현상이며, 전쟁 외에도 평화적인 융합에 의해서 충분히 나타날 수 있다. 그리고 신석기시대 돌도끼는 농업 도구로 널리 사용된다. 무력 충돌이 빈번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실제 무기류가 다량으로 출토되는 것을 제시해야 하지만 양사오 문화 시기로 보고된 무기류는 소량의 석촉을 제외하고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현대사회 속 염제

이렇게 다소 억지스러운 문헌과 고고학 자료의 결합은 중국 각지에 염제 관련 전승과 제사 의식이 성행하는 결과를 만들게 되었다. 샨시陝西 바오지寶鷄지역은 염제의 발원지와 관련이 있는 곳으로, 후베이湖北 쑤이저우隨州지역은 신농의 탄생지로, 후난湖南 주저우株洲지역은 염제신농이 죽은 곳으로, 산시山西 가오핑高平은 신농이 오곡을 접한 곳으로 여겨진다. 이 지역들은 물론 염제신농과 관련된 전설이 내려오는 곳이면 어김없이 염제 관련 기념물이 건설되고 제사 의식이 거행된다. 이 중 일부는 국가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체계적인 관리를 받고 전국애국주의교육기지로 지정되기도 한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염제의 실체화는 중국인에게 민족적 자부심을 부여함과 동시에, 다양한 민족이 얽혀 살아가는 중국 사회를 단합시킬 수 있는 좋은 기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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