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재단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로고 동북아역사재단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로고 뉴스레터

동북아포커스
신미양요를 통해 살펴보는 19세기 후반 조청 관계
  • 이동욱,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조교수


미군에 점령당한 덕진진

 


전근대 한중관계에 대한 오해

2017,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중국 국가 주석 시진핑習近平에게서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일부분(a part of China)’이었다는 설명을 들었다고 발언하여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당시 시진핑이 정확히 어떠한 발언을 했는지는 공개되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십여 년 사이 중국에서는 천하체계天下體系나 종번체제宗藩體制 등 전근대 아시아 질서를 천조天朝이자 종주국인 중국과 번속藩屬인 주변국 사이의 위계적이고 중국 중심적인 국제질서로 설명하는 이론이 성행해왔다. 이를 염두에 둔다면, 위의 발언 역시 역사적으로 한반도가 중국 왕조의 번속藩屬 내지는 속방屬邦이었다는 시진핑의 인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사실, 전근대 중국 왕조, 특히 명나라와 청나라는 조선을 조공국朝貢國, 외번外藩, 번속藩屬, 번봉藩封, 속국屬國 등으로 불렀고, 조선 역시 이를 인정하고 있었다. 이는 한중 양측의 당시 사료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호칭이 곧 한반도의 국가들이 중국의 일부였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명나라나 청나라에게 있어 조공국또는 속국은 중국의 황제와 군신君臣 관계를 맺고 있는 외국의 군주가 자율적으로 지배하는 나라를 의미했다. 이념적으로는 황제의 덕이 미치는 곳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지배의 대상이 아니었다. 현대적으로 표현하자면 중국 황제의 주권이 미치는 곳이 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중국 황제는 속국국왕의 사대事大(큰 나라를 섬김)’의 대가로 자소字小(작은 나라를 아끼고 보호해줌)’의 도덕적 의무를 진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이러한 자소가 서양의 강대국이 보호국protectorate에 대해 가지는 것과 같은 분명한 보호의 권리와 의무, 그에 수반한 피보호국의 주권 제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흥멸계절興滅繼絶(멸망한 나라를 일으켜주고 끊어진 대를 이어줌)’배난해분排難解紛(제후국이 처한 어려움과 분쟁을 해소해줌)’을 골자로 하는 자소의 실천은 반드시 군사적 보호를 수반하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중국 왕조는 자국의 이익과 안위를 우선시하는 소극적 태도를 취하면서도 속국에 대해 외교적 수단으로 식사영인息事寧人(분쟁을 그치게 하여 평온하게 함)’을 통해서 자소를 실천하고 있다고 스스로 합리화할 수 있었다.


150년 전에 일어난 신미양요辛未洋擾를 전후하여 조선과 서양 열강 사이의 갈등에 대처하는 청 정부의 모습은 이를 잘 보여준다. 청 정부는 자소를 실천하고 있었으나, 그것은 속국을 보호하려는 종주국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조선을 청 왕조의 일부분으로 인식하는 것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었다.

 


청 도광제

(재위 1820~1850년)

 

 

아편전쟁(1840~1842) 이후 청의 조청 관계 해석

청 왕조는 19세기 후반까지도 스스로를 천조天朝라 부르며 자국과 외교관계를 맺은 국가들을 속국 또는 조공국이라 불렀다. 청조의 시각에서는 네덜란드, 포르투갈 같은 유럽 국가들 역시 조공국의 범주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배한 이후부터 청조는 영국, 미국, 프랑스 등 서양 국가들이 자국과 평등한 주권국가임을 인정하고 이들 국가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조는 조선과 류큐琉球 등 오랜 조공국들이 번신무외교藩臣無外交(천자의 외번을 지키는 신하는 외국과 사사로이 교제하지 않는다)’를 주장하며 서양과의 통상을 거부하고 청조에 도움을 요청했을 때 이들 국가에 대해 천조로서의 권위를 유지하고자 노력하였다.


서양 선박들이 자국에 찾아와서 통상과 선교를 요구하는 것을 금지해달라는 이들의 요구에 호응하여, 청의 도광제道光帝는 청나라가 서양 국가들과 체결한 난징조약南京條約, 황푸조약黃埔條約, 왕샤조약望廈條約등에서 광저우廣州 등 다섯 통상항구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 서양인들의 상업 및 선교 활동을 금지하고 있으므로, 서양인들은 청의 속국인 조선과 류큐에서도 통상과 선교를 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도광제는 서양과의 교섭을 담당한 치잉耆英에게 명령하여 천조속국에 가서 소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그들을 설득하게 하였다. 이러한 일방적 주장이 효과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무시되었다. 서양인들에 대한 권고와 설득이 소용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청 정부는 서양인들에게 무시당하게 될 요구를 반복하는 대신 속국측에 서양인들을 예로써 후대하여 분쟁의 발생을 피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리고 점차 속국과 서양 사이의 문제에 간여하지 않는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제2차 아편전쟁의 결과 서양인의 내지 여행과 선교 활동을 허가하는 톈진조약天津條約(1858)과 이를 재확인하는 베이징조약北京條約(1860)이 체결되자, 청조는 난감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과거 도광제 시절 청조는 조선이 천조속국이기 때문에 난징조약등에 따라 서양인들이 통상과 선교를 시행할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 기존의 논리대로라면 조선 역시 톈진조약에 따라 서양인들의 여행과 선교가 허용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청조는 조선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을 요구함으로써 스스로 '천조'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서양과의 외교를 전담하기 위해 베이징에 새로 설치된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이하 총리아문으로 약칭)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 갈 수 있도록 통행증을 발급하고 조선에 공문을 보내어 협조하도록 해달라는 주청 프랑스 공사의 요청을 받자, 이를 거절하기 위해 조선은 청에 조공을 바치는 나라이지만 정교금령政敎禁令은 자주적으로 행하기 때문에 청조에서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제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조선은 청의 주권이 행사되지 않는 별개의 국가이기 때문에 청과 서양 열강이 체결한 톈진조약의 적용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설명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공교롭게도 중국 최초의 체계적인 국제법 번역서인 만국공법萬國公法(1864)이 출판된 직후에 등장하였다. 만국공법에서는 타국과 봉건적 관계를 맺고 있는 조공국(tribute state)이나 속국(feudal vassal)도 그 관계가 주권의 행사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 독립된 주권국가로 간주된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총리아문은 조선은 청조의 속국이면서도 자주국이기 때문에 청조가 조선의 국정에 간섭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반복적으로 천명하였다. 총리아문에 따르면, 이러한 주장은 서양인과의 접촉을 거부하고 있던 조선을 위해 서양 세력의 조선 진출을 막아주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청조의 속국자주주장은 1866년 프랑스의 조선 침략(병인양요) 당시 청조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한 용도로 역이용되었다. 프랑스의 주청공사 벨로네H. D. Bellonett는 조선의 천주교도 박해와 프랑스인 선교사 살해에 대한 보복으로 조선을 침공한다고 선언하면서 청조는 기존에 조선이 자주국이라며 조선에 대한 책임을 회피해왔으므로, 프랑스와 조선의 전쟁에 개입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총리아문은 청조가 제2차 아편전쟁의 패배와 태평천국, 염군, 회민 반란 등 내우외환에 허덕이던 상황에서 다시 조선 문제로 인한 새로운 분쟁에 말려드는 것을 경계하여 프랑스 측의 주장에 강하게 반박하지 못하였다. 단지 인도적 차원에서 프랑스와 조선의 분쟁을 중재하겠다고 제안했다가 프랑스 측에 무시당했을 뿐이었다. 청조는 사실 조선 측에 프랑스의 침공 소식을 전해주어 미리 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조선 측에서 청조에 군사적 도움을 요청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또한 청이 몰래 조선을 돕는다는 벨로네의 비난을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청 정부는 조공과 책봉 등 형식적인 의례의 진행 외에는 조선 문제에 전혀 간섭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총리아문의 주장이었다.

 


총리각국사무아문

 


총리각국사무아문의 수장, 공친왕

 

 

신미양요를 전후한 청조의 조선 문제에 대한 태도

신미양요의 원인인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고, 서양인들의 조선에 대한 교역 요구를 막아달라고 요구하는 조선 국왕의 공문이 베이징에 도착한 것은 186611월이었다. 이때 마침 청 측은 프랑스 함대가 조선 해안을 봉쇄하였으며 며칠 안에 전쟁을 개시하겠다는 프랑스 측의 통지를 전달받았다. 또한 제너럴셔먼호 사건 때 자국민이 살해당한 영국과 미국이 프랑스와 연합하여 조선을 침공할 것이라는 풍문이 돌고 있었다.


총리아문은 이러한 정보들을 조선에 알려줄 것을 황제에게 상주하며 청조가 조선이 원하는 것처럼 서양인들의 조선 통상 요구를 대신 막아주는 것은 불가능하며, 오히려 조선 측이 스스로 이해득실을 따져 사태가 더욱 악화되기 전에 서양 열강과 타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만 모든 것은 조선이 스스로 결정할 일이지 청조가 강요할 수는 없다면서 책임을 회피하였다.


청조는 이후 신미양요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의 조선 재침공설, 영국 및 미국의 조선 침략 가능성에 대한 풍문, 그리고 일본인 야도 준수쿠八戶順叔의 정한론征韓論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이 수집한 각종 풍문을 조선에 전달하고, 제너럴셔먼호 사건 생존자 수색과 송환을 요구하는 영미 측과 조선의 사이를 중재하는 등 사태의 악화를 막기 위해 나름 적극적인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는 병인양요 이후 조선이 다시 영국과 미국의 공격을 받게 될 것을 우려한 청조 측이 나름의 자소를 실천한 것이었다.


그러나 청조는 서양 국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조선이 자주국이기 때문에 그 국정에 간섭할 수 없음을 강조하며 국외자局外者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태도는 결국 미국 측이 청을 통한 교섭보다는 조선에 대한 직접행동을 선택하게 하였다. 그리고 187012, 주청 미국 공사 로F. F. Low가 본국에서 파견한 함대를 이끌고 조선으로 출발한다고 통보했을 때, 총리아문은 이를 저지하지 못하고 단지 조선에 알려 미리 방비할 수 있도록 해주는데 그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871년 신미양요가 일어난 이후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미국과의 교전 이후, 조선 정부는 베이징에 공문을 보내어 신미양요의 경과를 상세히 설명하였다. 아울러 조선은 미국과 통상할 생각이 없음을 다시금 강조하며, 청 황제가 미국 사신에게 명령을 내려 조선과의 교섭을 단념하고 분쟁을 일으키지 말도록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반면, 조선에서 돌아온 미국 공사로는 조선이 청의 속국으로서 종주국인 청의 도움을 요청해왔다는 증거를 제시하면서 총리아문이 그동안 조선 문제에 간섭할 수 없다고 주장해온 것을 반박하고, 청 측에 미국과 조선의 교섭을 중재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조선과 미국의 요구가 엇갈리는 상황에서 총리아문의 수장 공친왕恭親王은 미국이 속국이라는 두 글자를 빌려 중국에게 조선을 압박하여 미국의 뜻대로 따르게 하려 하고, 조선 역시 속국이라는 두 글자를 빌려 중국이 미국을 억제하여 자신을 비호해줄 것을 바라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양자 모두 중국에 책임을 떠넘기려는 의도가 의심되므로 중국은 양자의 분쟁을 적당히 중재해주면서 미국에게 다시 조선으로 가지 말라고 권고하기만 해야지, 더 이상 개입하여 두 나라에게 이용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청조가 천조로서 자소의 의무를 실천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인식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지만, ‘속국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기보다는 속국과 타국 사이의 분쟁에 휘말려 들기를 원치 않는 의도가 더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중국 최초의 체계적인 국제법 번역서

『만국공법(萬國公法)』(1864)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중국과 주변국 사이에서 형성된 역사적 관계는 동아시아와 상이한 문화적 배경에서 형성된 서양식 주권국가체제와는 상당히 달랐다. 이 이질적인 동아시아의 전근대 질서를 임기응변식으로 서양식 국제질서의 틀에 맞추어 설명하는 과정에서 1840년대에 도광제는 조선이 천조속국으로서 서양과 체결한 조약의 적용 대상이 된다고 주장하였지만, 신미양요를 전후한 시기의 청 왕조는 조선을 중국의 일부분으로 간주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에 대해서 철저한 거리두기를 시도하고, 조선은 청 왕조와는 별개의 자주국(주권국가)’라고 선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듯, 1880년대가 되면 청조는 다시 조선의 속방屬邦지위를 강조하면서 조선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였다.


이렇듯 전통적인 사대자소事大字小의 조공 관계는 근대 국제법 질서 속에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처럼 필요에 따라 자의적으로 재해석되어 왔다. 이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정치가들이나 중국 학계의 논의를 살펴보면 이러한 현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듯하다. 다시 말해, 소위 종번宗藩관계를 근거로 한반도를 역사적으로 중국의 일부분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기보다는 그들의 현실적인 의도에서 비롯된 자의적인 해석일 뿐이다.

 

 

 

OPEN 공공누리 - 공공저작물 자유이용 허락(출처표시 - 상업적이용금지 - 변경금지)

동북아역사재단이 창작한 '신미양요를 통해 살펴보는 19세기 후반 조청 관계'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