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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의 재발견
동남제도개척사 김옥균의 울릉도 개발과 가이 군지
  • 박한민, 재단 독도연구소 연구위원


1880년대 일본에 건너가 찍은 김옥균의 사진

 


김옥균(金玉均)은 갑신정변 이전에 동남제도개척사 겸 관포경사(東南諸島開拓使兼管捕鯨事)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그가 울릉도 자원을 개발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떠한 활동을 전개하였는지는 관련 자료 부족으로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적지 않다. 이를 보완할 자료로, 김옥균을 수행한 가이 군지(甲斐軍治)가 남긴 자료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신조지(眞淨寺) 내 김옥균과 가이 군지의 묘비

1884124일 발발한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막을 내렸다. 청국 병력의 개입으로 인하여 정변의 주역 김옥균은 일본 선박을 타고 망명길에 올랐다. 그의 일본 망명 생활은 10년이나 이어졌다. 18943월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리훙장李鴻章과 만나려 시도했으나, 김옥균은 숙소에서 홍종우洪鍾宇의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시체는 조선 정부로 인계되어 양화진에 도착한 후 대역부도죄인으로 사지와 목을 절단하는 극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시체 일부를 수습하여 일본으로 돌아간 자가 있었다. 가이 군지였다. 그는 1880년대 초반부터 김옥균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나가사키현長崎縣 출신의 일본인이다. 조선에서는 사진업에 종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이는 김옥균의 유발을 도쿄대학東京大學 홍고本鄕 캠퍼스 근처에 위치한 신조지眞淨寺에 안치하고, ‘조선국 김옥균 군의 묘朝鮮國金玉均君之墓라고 새긴 석비를 세웠다. 가이는 19088월 사망하였다. 유언에 따라 그는 신조지 김옥균 묘비 근처에 묻혔다. 가이가 김옥균을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조지 내 김옥균과 가이 군지 묘비

 

 

김옥균의 동남제도개척사 임명과 울릉도 개발

김옥균과 가이의 인연은 김옥균이 1880년대 초반 일본을 왕래하는 가운데 시작되었다. 김옥균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부강해지고 있던 일본을 둘러보며 조선도 일본처럼 개화정책을 추진해야 함을 절감하였다. 부국강병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재원이 필요했다. 1883422일 김옥균은 동남제도개척사에 임명되었다. ‘동남제도란 동해의 울릉도와 독도를 비롯한 연해 지역의 여러 섬을 가리킨다. 도일 당시 김옥균이 휴대한 지도를 저본底本으로 모사하고 1894년에 간행한 조선여지도朝鮮輿地圖는 연해와 섬을 포함한 조선 전역의 모습과 한성에서 각 지역까지의 거리 정보里程를 잘 보여준다. 동남제도개척사 임명은 조선 정부에서 동해 연안의 섬을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관리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개항 이후 무단으로 울릉도에 건너가 목재를 베고, 해산물을 채취하는 일본인이 급증하였다. 조선 정부는 이들의 불법적인 도항과 자원 수탈을 방치할 수 없었다. 예조판서 심순택沈舜澤은 일본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에게 무단으로 울릉도까지 건너와 고기잡이와 벌목을 한 일본인들을 퇴거시키라고 항의하는 공문을 보냈다. 일본 정부는 자국민이 울릉도로 무단 도항하여 벌목을 하지 못하도록 향후 엄히 금지하겠다고 회답하였다. 항의 공문의 발송과 더불어 조선 정부에서 도서 지역의 관리 강화를 위해 내린 결정이 동남제도개척사란 관직의 신설과 운영이었다. 당시 활발하던 고래잡이를 아울러 관리하도록 한 부분은 어업에 대한 관심을 잘 보여준다.


개척사의 수행원으로는 백춘배白春培, 탁정식卓挺埴, 가이 군지가 뽑혔다. 김옥균은 1883년 연말에 가이 군지를 울릉도 개척 업무를 위해서 고용하며, 일본 선박과 인부들의 고용을 편의에 따라 처리하도록 한다는 임명장을 발급하였다. 초창기 개척사의 종사관 업무는 탁정식이 담당하였다. 하지만 그는 급성 폐렴에 걸려 188429일 고베神戶에서 사망하였다. 탁정식이 맡았던 업무는 백춘배가 승계하였다. 백춘배는 울릉도 목재와 관련된 업무를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해 일본 지방 관청과 교섭하는 업무를 가이 군지에게 위탁하여 처리하도록 위임장을 발급해 주었다. 개척사 김옥균, 종사관 백춘배로부터 받은 임명장과 위임장은 가이 군지가 개척사 활동 비용을 청구하기 위해 조선 정부에 제출한 문건 속에 들어 있다.


이 문건을 모아둔 자료는 갑비군치색채안건甲斐軍治索債案件(26295)으로,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그동안 동남제도개척사의 활동을 다룬 연구는 주로 김옥균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하지만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자 김옥균을 비롯한 정변 관계자들은 역적으로 몰려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와 관련된 자료는 조선 정부에서 회수하여 파기하거나, 정변으로 혼란스러운 와중에 사라져버렸다. 동남제도개척사 관련 자료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선행 연구는 조선과 일본에서 공식 간행된 외교문서 안에서 개척사 김옥균이 거론된 문서를 중심으로 제한적으로 다룰 수밖에 없었다. 갑비군치색채안건은 동남제도개척사가 추진한 울릉도 자원 개발 양상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문건을 다수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 볼 사료이다.




「조선여지도(朝鮮輿地圖)」

동북아역사재단 소장

 

 

갑비군치색채안건수록 문서의 내용

갑비군치색채안건은 가이 군지가 개척사 김옥균과 종사관 백춘배의 위임을 받아 벌목을 수행할 일본인 인부와 이를 운반할 선박을 고용하고, 일본에서 울릉도까지 여섯 차례 왕복한 상세 내역을 수록해 놓은 책자이다. 가이 군지는 울릉도 목재의 벌목과 운반 업무와 관련하여 발생한 모든 인건비와 운임, 숙박비 등의 변제 여부를 항목별로 기록하였다. 그는 주어진 일을 수행하며 들어간 비용을 조선 정부에 청구하기 위해 내역을 꼼꼼하게 기재하였다. 종사관 백춘배에게 관련 문건이 사실과 다름이 없다는 확인서까지 받아두었다. 울릉도에 여섯 차례 왕복한 선박 명칭과 일본으로 반출해 간 목재 수량, 선박별 운임, 소비 물품 비용은 울릉도 사무에 관한 계산표목재운반세목, 수용품세목에 상세히 적혀 있다. 가이가 김옥균, 백춘배 등과 만나 울릉도까지 왕복하며 개척사 관련 업무를 맡아 보고, 개척사와 관련된 채무의 정산을 위하여 조선 정부와 여러 차례 교섭한 내역은 시말서에 전말을 적어 두었다. 갑비군치색채안건, 1883조일통상장정체결 이후 동남제도개척사가 고용한 일본 인부가 비개항장이었던 울릉도로 가서 벌목 작업을 한 다음, 목재를 일본으로 운반하여 매각하는 등 재원 마련을 위해 활동한 양상을 잘 보여준다. 다만 갑신정변 실패로 인하여 개척사 김옥균이 구상하고 추진한 울릉도 개발 사업이 중단되고, 개화정책을 추진할 재원으로 활용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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