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조선의 수도 ‘아사달’, 위만조선의 수도 ‘왕검성’
평양은 남·북한 학계가 모두 고조선의 수도로 지목하고 있는 곳이다. 남한학계는 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이, 북한 학계는 단군조선의 도읍 ‘아사달’이 평양에 있었다고 본다.
문헌에 고조선의 수도로 기록된 곳은 아사달阿斯達, 무엽산無葉山, 백악白岳, 백악궁白岳宮, 평양성平壤城, 궁홀산弓忽山, 금미달今旀達, 장단경藏唐京, 험독險瀆, 왕검성王儉城, 왕험성王險城 등이다. 얼핏 수도가 많아 보이나 사실 무엽산과 백악(혹은 백악궁)은 아사달에 대한 당대의 인식을 적어 놓은 것이다. 왕험은 왕검과 같은 지명의 이칭異稱으로 해석된다. 결국 고조선의 수도는 아사달과 왕검성으로 정리된다.
아사달이라는 지명은 단군과 관련해서만 나온다. 일연은 『삼국유사』 기이편 고조선조에서 제목을 고조선과 왕검조선으로 병기하고 「위서」를 인용해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하였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아사달을 평양이라고 했다. 조선시대 권제權踶(1387~1445)가 지은 『역대세년가歷代世年歌』(1436년 간행)에는 아사달을 산 이름이라고 하면서 황해도 문화현(현재의 황해도 신천군)의 구월산이라고 했다. 이러한 인식은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로 이어진다.
왕검성은 『사기』 조선열전에 나온다. 위만이 망명하여 진번·조선 및 여러 오랑캐와 연燕·제齊의 망명인들을 규합해 왕험王險에 도읍했다고 나와 있다. 신찬臣瓚(중국 남북조시대)과 같은 중국의 후대 역사가들은 『사기』를 주석註釋하면서 ‘왕검성이 낙랑군 패수 동쪽에 있다’고 덧붙여놓았다. 『삼국유사』 위만조선조에는 왕검王儉으로 기록됐고 후대에는 왕검성이 평양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게 된다.
1946년 촬영된 단군릉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규모의 왕성이 없는 평양보다 요령성에서 수도를 찾기도
현대 역사가와 고고학자들은 아사달과 왕검성의 위치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모두 평양을 지목하고 있지만 명확하지는 않다. 단군조선의 아사달이든 위만조선의 왕검성이든 한 국가의 도성이 될 만한 성곽 같은 유적이 없기 때문이다.
북한 학계는 청암리토성이나 낙랑토성을 ‘아사달’로 내세우고 있지만 이들 토성의 규모가 크지 않고 왕성으로 볼만한 유물도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문헌에 기록된 방위와도 맞지 않는다. 남한 학계는 특정 성곽을 지목하지는 않지만 ‘왕검성=평양’을 지지한다. 고조선 멸망 후에 한漢나라 계통의 무덤과 유물이 평양 지역에 집중적으로 들어서는데 이를 낙랑군으로 보고 낙랑군 수현首縣으로 나오는 조선현으로 추정한다. 왕검성이 있었던 곳에 가장 중요한 수현을 설치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에 문제 제기를 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이들은 왕검성을 평양이 아닌 중국 요령성 본계本溪나 요동반도 등에서 찾는다. 일부는 하북성 난하灤河유역에서 찾기도 한다. 이들에게 아사달은 평양이다.
1994년 복원된 단군릉(2002년 촬영)
북한은 1993년 단군릉을 발굴하고 단군과 그 아내의 뼈를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이듬해 평양시 강동군 대박산 기슭에 단군릉을 복원했다. 릉의 면적은 1.8㎢, 높이 22m다.
(출처: 서영수 전 단국대 교수 제공)
중국에 이용당하는 조선족의 역사,
국가 이데올로기로 전락한 북한의 고조선사
평양은 고조선사에서 매우 중요한 곳임에 분명하다. 비단 고조선사뿐만 아니라, 한반도 남부 지역과의 교류에서 핵심 지역이었다. 평양 지역 고인돌의 존재나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오늘날 북한 정권에도 평양은 매우 중요하다. 북한은 1960년대까지 중국 요령성의 요하遼河 서쪽이나 평양 등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 들어 평양으로 정리했다. 대규모의 단군릉을 조성했고 대동강문화론을 내세워 평양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평양은 이제 단군조선의 근원지이자 민족 발흥지인 신성한 곳이 됐다.
북한의 이러한 변화는 중국과 무관하지 않다. 중국은 1978년 개혁개방을 선언한 이후 무섭게 변화하고 성장했다. 여기에는 소수민족 정책이 포함됐다. 1949년 400여의 민족 명칭이 존재했던 것이 민족식별사업을 통해 한족을 포함한 56개 민족으로 강제 정리됐다. 이것은 중국의 역사 인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1980년대 들어 중국사 관련 각종 좌담회가 소집되고 역사 관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고 발굴도 활발히 진행했다. 그 결과는 현대 중국의 역사상 최대 영토 안에서 일어난 모든 역사를 중국사로 규정짓게 한 것이다. 고고학은 이를 고증하는 학문으로 간주됐다.
북한도 주체사상을 강조하면서 결속을 다졌다.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 인식을 강화했다. 대동강문화론과 단군릉 조성은 그 결과물이다. 대동강문화론은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 유역에 구석기 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해 고대 문명을 창조했다는 이론이다. 이것이 곧 단군조선을 건국한 조선 민족이라고 강조한다. 단군릉은 평양 지역에 있었던 단군묘를 발굴해 복원한 것이다. 모두 북한정권의 정통성과 연결시킨다.
역사를 현대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국가 운영의 이데올로기로 이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북한과 중국의 역사 인식은 많이 닮아있다. 이웃 국가들과 마찰을 빚는 양상도 유사하다. 역사를 현대적 필요에 의해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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