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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의 현장을 가다
한인의 만주 이주와 독립운동 기지 개척
  • 장세윤 재단 명예연구위원

국망의 위기 상황에서 중국 동북의 서간도·북간도 지역을 주목


20세기 전반 중국 동북지역(만주)에서 전개한 한민족의 독립운동은 과거에 그친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이 지역 현안과 관련하여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이에 한인들의 이주와 독립운동기지 개척운동, 그 의미 등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신민회(新民會) 등 비밀결사와 애국지사들이 국망(國亡)의 위기에 즈음하여 국외 독립운동기지로 먼저 주목한 곳은 북간도 지역이었다. 북간도는 대체로 지금의 중국 지린성(吉林省)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 일대를 말한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의 체결로 대한제국의 멸망을 예견한 이상설·이동녕·이회영·정순만·여준 등의 민족운동가들은 19064월 무렵부터 북간도의 중심지인 옌지현(延吉縣) 용절촌(龍井村)을 독립운동 기지의 대상지로 삼고 작업에 착수했다. 이들은 그 해 가을 그곳에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 등 각종 민족학교를 설립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중국 동북지역 독립운동은 주로 항일무장투쟁과 교육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북간도 지역 무장투쟁의 상징이 봉오동·청산리전투라면, 민족교육운동의 현장은 명동촌(明東村)이라고 할 수 있다. 명동촌은 동쪽을 밝힌다는 뜻으로 민족교육운동의 이상을 담고 있었다. 명동촌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김약연·김하규·문치정·남위언 등 가족이 중심이 되어 임야를 사들이고 학전(學田)을 개간하며, 규암재(奎巖齋)라는 서당을 열어 민족교육을 실시한 데서 출발하였다.

이후 규암재가 명동서숙, 명동학교로 발전하고, 신민회의 정재면과 이동휘 등의 독립운동가들이 합류하면서 북간도 민족교육운동의 중추로 발전했다. 이후 명동촌은 북간도 독립운동기지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특히, 1919313일의 룽징(龍井) 3·13 만세시위 운동이후 명동학교는 사실상 북간도 국민회 본부가 되고, 이 학교 졸업생들은 안무의 국민회군,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부대 등에 가담하여 항일 무장투쟁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국인들이 가장 애송하는 시 서시를 쓴 저항시인 윤동주가 명동촌과 명동학교 출신인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신빈현에 세워진 양세봉 독립군 사령관 석상

 

서간도 북간도 지역, 독립운동 근거지 역할 충실히 수행


일제가 대한제국의 군대 해산을 감행한 직후인 19078월 해외의 독립군 기지 개척과 독립군 창건 문제가 최초로 검토되었다. 이후 신민회가 이러한 방침을 본격적으로 논의한 시기는 의병전쟁이 퇴조기에 접어든 1909년 봄이었다. 이 때 신민회는 양기탁의 집에서 전국 간부회의를 열고 국외에 적당한 후보지를 골라 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군 기지를 창건하여 강력한 독립군을 양성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사업이 실천되기 전에 일제의 통감부는 안창호·이동휘·유동열·이종호·김희선 등 다수의 신민회 간부들을 구속하였다가 이듬해 2월에야 석방하였다. 이에 신민회는 19103월 긴급 간부회의를 열어 독립전쟁 전략을 채택하고,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 기지 창건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독립전쟁론은 대한제국기 구국계몽운동 및 항일 의병 전쟁의 이념과 논리가 합일적으로 발전한 새로운 논리였다. 일본 침략세력을 몰아내고 민족해방과 조국독립을 달성키 위한 가장 효과적 방법은 적당한 때에 일제와 독립전쟁을 결행하는 것이라는 독립운동 이론 체계였다. 독립전쟁론의 첫 실천방안이 바로 국외에 독립군 기지를 설치하는 일이었다. 집단적 이주도 구상하였다.

신민회의 이러한 구상에 따라 19104월 안창호·이갑·유동열·신채호·김희선·이종호 등이 출국했다. 이 해 가을에는 이동녕·주진수 등도 남만주 일대를 비밀리에 답사하여 후보지를 선정했다. 9월부터 12월 사이에 선발대인 이동녕·이회영 등은 독립군 기지 건설을 위한 단체이주를 추진했는데, 남만주의 펑톈성(奉天省) 류허현(柳河縣) 산위안푸(三源浦)에서 기지 개척사업에 착수했다.

우여곡절 끝에 신민회 계열 인사들은 1911년 봄 산위안푸에 자치조직인 경학사(耕學社)와 신한민촌을 건설하고 6월에 신흥강습소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 이곳에서 이석영·이시영· 이회영 일가와 이동녕·양기탁, 이상룡·허위·김대락·김동삼 일가 등이 가산을 정리하고 집단으로 이주하여 한인 마을과 독립군 기지를 개척하였다. 신흥강습소는 뒤에 신흥무관학교로 널리 알려졌다. 이 학교는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19201930년대 독립운동의 초석을 다졌다. 아래와 같은 신흥무관학교 교가(3) 가사는 우리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칼춤 추고 말을 달려 몸을 단련코 새론 지식 높은

인격 정신을 길러

썩어지는 우리 민족 이끌어 내어 새 나라 세울 이 뉘뇨

우리 우리 배달나라의 우리 우리 청년들이라

두 팔 들고 고함쳐서 노래하여라 자유의 깃발이 떴다

 

  

<(좌)1910년대 서간도 지역에 이주 망명한 유인석(柳麟錫) 의병장> <(우)신흥학교 졸업생들이 발간한 『신흥교우보』 제2호(1912.9.15)>


오늘의 시사점과 그 의미


지난 93일은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70주년이 되는 의미 있는 날이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우리 국민들은 물론, 한국에 나와 있는 많은 중국 동포들도 생업에 바빠 미처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195293중화인민공화국 민족구역자치 실시요강에 근거하여 창립된 연변조선민족자치구에서 출발하였다. 이후 1956년에 '연변조선족자치주'로 바뀌면서, 중국에 거주하던 우리 동포들이 '조선족'이라는 명칭의 중국 내 '소수민족', 즉 중국 국적을 취득한 공민으로서의 법적 개념이 성립하게 되었다. 조선족 자치주의 성립은 중국 동북지역에서 전개한 한민족의 항일무장투쟁, 그리고 관련 인물과 단체들의 기여가 매우 컸다.

현재 중국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외에도 백두산 서남쪽에 있는 장백(長白)조선족자치현과 다수의 조선족 자치향()이 있어 나름대로 민족자치를 실현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최근 전해진 바로는 한글 우선 표기 원칙을 고수하던 옌볜조선족자치주에서 중국어 우선 표기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러한 정책은 조선족 인구의 유동과 국외유출로 인구가 줄어드는 등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 지역 해체와 중화민족주의가 가속화할 것으로 우려된다.

최근 중국 당국은 19301940년대 항일전쟁이나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관련 연구를 강화하고 있다. 특히, 20세기 전반기 중국에서 활동한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중국 내 소수민족의 활동’, 나아가 중국 조선족의 활동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중국 동북지역에서 전개한 한민족의 독립운동은 중국 조선족의 반일투쟁’, 또는 중국 조선족의 혁명투쟁으로 분류될 수 있다. 이 시기 중국 동북지역에서 전개한 우리의 독립운동사와 파란만장한 이주사 등에 대한 연구와 교육을 소홀히 한다면, 한국 근현대사, 독립운동사, ‘한인 디아스포라(Diaspora)’가 아닌 중국 조선족의 반일투쟁사나 이주사, 중국혁명사로 변형될 우려가 있다. 따라서, 중국 동북지역과 조선족 문제, 독립운동사의 의미와 그 연관성, 지정학적·전략적 중요성을 재인식하고, 앞으로도 지속적 조사·연구·교육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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