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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코리안 디아스포라
우리말로 공연해요, 고려극장
  • 홍웅호 동국대학교 대외교류연구원 연구교수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만난 고려극장


고려극장을 알게 된 것은 1937년 강제 이주 이후 19385월부터 고려인들이 발간해온 한글 신문 레닌기치를 통해서였다. 레닌기치신문에 따르면, 고려극장은 러시아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한 고려인들의 집단농장을 순회했다. 그곳에는 무대도 없었다. 트럭 짐칸을 간이 무대로 삼아 공연했다. 그렇게 고려인들의 아픔과 슬픔, 그리고 울분을 함께했다.

보고 싶었다. 지금도 고려극장이 있고, 공연을 할까? 2014년 겨울 알마티에 가서 고려극장을 찾았다. 비록 알마티 외곽에 있었지만 있었다. 그리고 공연도 하고 있었다. 20227월 다시 고려극장을 찾았다. 이제는 알마티 시내 중심가에 좋은 건물로 옮겨 여전히 공연하고 있었다. 그것도 카자흐스탄 국립 아카데미 고려극장이라는 간판을 달고.

 


알마티 시내 고려극장 건물

 

고려극장의 탄생


고려극장은 언제 어떻게 생겨났을까?

1920년대 말, 러시아혁명 이후 소련이 생겨나고 사회주의가 건설되자 연해주의 한인, 즉 고려인들도 사회주의 건설에적극 참여하기 시작했다. 고려인들은 집단농장을 건설하고, 한글 신문 선봉을 발간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한글 교육을 위해 원동고려사범대학을 만들었다.

문화 예술 분야에서도 발전이 있었다. 당시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구락부, 스탈린구락부, 9년제학교 등에서는 연예부, 관현악단, 노동청년극단 등을 만들어 활동했다. 이들은 전문가가 아닌 아마추어들로 당시에 이들을 소인예술단이라 불렀다.

소인예술단원들 중에는 뛰어난 인물들도 있었다. 그들 중에서 일부는 보다 전문 지식을 배우기 위해 1930년에 모스크바로 유학을 갔다. 이들 유학생들은 1932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김태를 초대 극장장으로 한 원동변강조선극장이라는 이름의 고려극장이 창립되자 블라디보스토크로 되돌아와 극단에 참여했다. 연성용, 김진, 태장춘, 이길수, 이함덕, 최봉도, 정후겸, 이경희 등이 그들이다. 이들 대부분은 연출가, 극작가, 배우 등으로 활동하면서 고려극장의 심장이자 산 증인이었다.

초기에 고려극장은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점을 두고 고려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의 집단농장을 순회하는 이동극장의 형태를 띠었다. 극동에서 초기의 주요 작품은 <장평동의 횃불>(연성용, 1934), <밭두렁>(태장춘, 1934), <종들>(태장춘, 1937), <춘향전>(이정림, 1934), <심청전>(채영, 1936) 등이었다. 이 작품들은 당연히 우리말, 즉 고려말로 공연이 이루어졌다.



    1960년대 크즐오르다 고려극장 건물

 


중앙아시아 고려인 집단농장에서 순회공연하는 고려극장 배우

 

강제 이주를 이겨내고 카자흐스탄 국립극장이 되다


고려극장도 고려인들의 강제 이주의 아픈 역사를 함께 했다. 스탈린의 결정에 따라 1937925일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로 이주했다

초기에 크즐오르다시 단위의 고려극장은 1940년 제3급 크즐오르다주 고려 희극극장으로 바뀌었다. 1942년 제2차 세계대전 와중에 탈티-쿠르간주 우슈토베로 이주하여 탈티-쿠르간주 고려극장이 되었다가 1959년에 다시 크즐오르다로 이주하여 크즐오르다주 조선극장이 되었으며, 1962년에 조선음악연극극장으로 개명했다.

고려극장은 1968년 당시 수도였던 알마티시로 이주하고 카자흐스탄공화국 국립 고려극장 지위를 획득했다. 정식명칭은 카자흐스탄공화국 음악 희곡 고려극장(Государстве нный Республиканский Корейский Театр Музыкал ьной Комедии)’으로, 알마티 외곽에 있다가 최근에 시내 중심지로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고려극장은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공연의 형태는 세 가지였다. 연극, 노래, 그리고 무용. 이 형식은 지금도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알마티 외곽 고려극장 건물

 

강제 이주의 아픔을 달래주는 순회극장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고려극장은 콜호즈 솝호즈 고려극장 순회공연이란 명칭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첫 번째 공연이 1938520일에 있었다. 크즐오르다시 공원에서의 공연이 그것이다. 이 공연이 의미 있는 것은 고려인만이 아니라 러시아 사람들과 카자흐스탄 사람들 및 기타 민족들에게 우리의 전통노래인 꾀꾀꼴’, ‘화초단가, ‘사랑가’ ‘만일 전쟁이 난다면등을 부름으로써, 앞으로 공연대상이 소련 전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임을 암시하였다는 것이다.

전후 시기 고려극장은 고전 작품들을 주로 무대에 많이 올렸다. 이는 고려극장의 주 공연 대상이 중앙아시아에 이주해와 삶의 터전을 만들어가던 고려인이었고, 주로 공연한 작품들도 그들의 애환을 달래줄 고전극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려극장 단원들은 1년에 3~4개월 연습하고, 6~8개월은 중앙아시아의 여러 고려인 콜호즈를 정기적으로 순회공연을 실시했다. 순회공연을 하면서 이들은 각지에 흩어져 있던 고려인들의 소식을 전해주는 메신저 역할을 했다. 당시 고려극장의 주요 공연 프로그램은 <심청전>, <행복한 사람들>, <숨은 원쑤>, <량반과 종>, <농민유희> 등이었다. 고려극장의 순회공연 프로그램은 고려인의 애환과 향수를 달래줄 고전극, 선전극, 노동극 등으로 다양했다. 또한 러시아어를 모르는 고려인들과, 우리말의 묘미를 살리기 위해 모든 극들이 고려말, 즉 우리말로 이루어졌다.

고려극장은 문화 예술 활동의 일환으로 소인예술단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소통을 해왔다. 고려극장의 정기적인 순회공연은 이 소인예술단과의 교류이기도 했다. 소인예술단에게 모범을 보이고, 새로운 각본을 전해주고, 소질이 있는 배우들이나 작가들을 발굴하는 것이 이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고려극장의 연출가들과 배우들


먼저, 연성용을 꼽을 수 있다. 그는 극작가이자 연출가이며 시인이자 작곡가였다. 그는 연해주의 수이푼 구역 하마탕에서 1909년 출생하여 신한촌의 9년제 학교 연예부에서 연극을 시작하면서 고려극장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1930노동청년극장 트람을 염사일과 함께 조직하고 1932년 신한촌에서 조선극장을 창립할 때 창립 멤버로 참가했다. 같은 극장의 배우이자 춘향전의 춘향 역할을 가장 오랫동안 맡았던 이경희와 결혼한 그는 1932년 모스크바 루나차르스키 극장대학 연출부에 입학하여 러시아의 유명한 연출가 유리 자와드스키의 제자가 되었다. 강제 이주 이후 그는 고려극장 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평생을 고려극장과 함께 했다. 그가 쓴 희곡은 <장평동의 횃불>(1933), <춘향전 각색>(1940), <지옥의 종소리>, <자식들> 등 총 17편에 달한다.

태장춘도 고려극장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1931년 노동청년극장이 올린 연극 황무지에서 주연을 맡으며 이후 고려극장과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그는 배우라기보다는 희곡과 시인으로 더 많이 활동했다. 그가 쓴 희곡은 <밭지경>, <우승기>, <행복한 사람들>, <종들>, <38선 남에서>, <홍범도>, <해방된 땅>에서 등 10편에 달하며, 고려극장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채영은 고려극장의 가장 대표적인 연출가였다. 본명이 채계도인 그는 70여 편의 작품들을 연출하면서 젊은 배우들과 연출가들에게 모스크바 영화대학 연출학부에서 배운 지식을 전수했다. 그의 교육은 고려극장이 전문극장으로 살아남을 수 있게 한 기초가 되었다.

이길수도 고려극장과 생을 같이 했다. 그는 배우, 연출가, 극작가, 시인 번역가 등으로 활동했다. 그는 1930년 모스크바 영화대학 배우학부에 입학하여 1935년 졸업했다.

1960년대 들어와 고려극장의 우리말 공연은 질적인 측면에서나 양적인 측면에서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다. 새로운 극작가들이 합류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인물은 한진이었다. 1950년대 말 북한에서 김일성 주체사상이 나타나자 소련에 유학하던 유학생들 중에서 이를 비판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북한 당국이 이들을 소환하자 이를 거부하고 망명한 학생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지를 다지는 의미에서 모두 이름을 으로 통일했다. 그래서 소위 ‘8이생겨났다. 한진이 바로 그들중의 한 명이었다. 한진은 이후 카자흐스탄으로 와서 고려극장의 작가로, 레닌기치신문의 기자로 활동했다. 한글로 쓴 한진의 작품, <량반전>, <의붓어머니>, <산 부처>, <폭발> 등은 고려극장의 수준을 한 단계 올려놓았다.

 


1937년 모스크바 공연을 마친 원동변강 조선극장 배우들

 


고려극장 연극 포스터

 


고려극장 연극 한 장면

 

고려인들 공동체의 구심점, 고려극장

    

1932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원동변강조선극장으로 출발한 고려극장은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를 거쳐 현재 알마티에서 카자흐스탄 국립 아카데미 고려극장에 이르기까지 9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고려극장의 역사는 고려인들의 역사이기도 하다. 고려극장은 고려인들의 역사와 삶을 함께하면서 고려인들의 정체성과 전통문화를 유지하고, 세대를 아우르는 공동체의 구심점으로 기여하고 있다.

고려극장은 민족문화의 발원지 역할을 하면서 고려인들의 우리말과 문학, 예술을 발전시켜왔다. 현재도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고려극장은 우리 민족의 문화를 지키고 계승해나가는 담지자이자 우리 문화를 세계로 널리 전파시키고 있는 우리 한인 디아스포라의 소중한 문화 자산이다.

 


1992년 알마티 고려극장 60주년 제1세대 배우들 첫줄 왼쪽부터 이함덕 최봉도 연성용 이경희 둘째줄 조정구 이길수 박준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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