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말 전시 총동원과 물자 통제』도서
식민지와 전쟁, ‘수탈과 고통’은 당연한 것인가?
한국의 ‘비틀어진’ 근대의 근원을 찾아보겠다며 일제 식민지기 사회경제사 연구를 시작했고, 식민지 수탈의 대명사 ‘공출’로 논문주제를 설정했다. 징용과 공출은 식민지의 수탈과 고통을 상징하는 당연한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이것으로 논문을 쓸 수 있을까’ 우려했었다. 이후 30년이란 시간 속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전쟁과 전시체제에 대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 책은 그간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전쟁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 전시 총동원의 실상, 이 과정에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민(民)의 삶을 정리하고자 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삶을 파괴하는 수탈과 고통이 당연할 수는 없다. 그 원인과 책임을 규명해야 반복의 오류를 막을 수 있다.
20세기 제국주의와 전쟁
20세기 한반도는 제국주의 식민지배와 전쟁, 냉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일본제국주의는 동아시아의 맹주를 꿈꾸며 감당할 수 없는 침략전쟁을 도발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아시아태평양전쟁 – 1945년 패전으로 일본제국주의는 막을 내렸다. 근대 세계전쟁은 군대만의 전쟁이 아닌 전장과 후방의 구분이 없는 총력전 형태였다. 서구 열강에 비해 공업생산력 수준과 물자 수급에서 상당한 핸디캡이 있는 일본제국주의는 이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아시아 지역에 대한 침략전쟁을 시작했다.
일본제국주의는 무리한 대규모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자체 생산력의 한계로 생존마저 위협할 정도의 인적·물적 총동원체제로 전쟁을 이어갔다. 이를 위해 군부와 관료를 중심으로 ‘천황제’를 앞세워 강력한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한 파시즘 체제를 형성했다. 이것은 근대 국민국가가 지향하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 국가권력의 민주적 집행이라는 기본적 요구를 일축한 폭력적·억압적인 체제였다.
애국기 1444호(출처: 민족문제연구소)
생산력 파탄과 강제적 물자 동원 –일본제국주의의 본질
일제의 식민지 조선에서의 전시 물자동원은 식량, 공업생산품, 광물자원, 자금이 그 대상이었다. 일제의 식민지배를 통해 식민지 조선에서 어느 정도의 개발과 물적 성장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의 전시 동원과 수탈은 그 모든 것을 철저히 빼앗아 써버리는 약탈적인 소비행위였다. 이것은 일본제국주의의 일시적 일탈이나 오류가 아닌 본질이었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총력전’이라는 근대 전쟁의 양상을 체득했다. 일본제국주의는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아시아태평양전쟁으로 전선을 확대하면서 생산력 확충과 물자동원을 축으로 전시 총동원체제를 형성했다. 식민지 조선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병참기지’가 되면서 적극적인 군수물자 동원과 생산력 확충에 투입되었다. 1940년대 들어 전쟁이 확대되면서 주요 군수자원의 수입이 막히자 일제는 제국 세력권 내의 자급자족체제 구축에 나섰고 조선에서 산출되는 광물자원에 대한 수탈을 강화했다. 또한 전쟁자금 동원을 위해 일본 본국과 식민지 전역의 모든 ‘국민’들을 대상으로 강제저축을 실시했다.
전쟁 중에도 식량 공급은 절대적 필요 요소이다. 1939년 한반도와 일본 중서부의 대가뭄으로 생산량이 급감하자 일제는 조선에서 다시 적극적으로 식량증산 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증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서 전시 일본제국의 식량 사정은 계속 악화되어 갔다. 식량 증산이 한계를 보이자 결국 유통과 소비에 대한 강력한 통제와 동원을 실시했다. 강제적 유통 통제인 공출은 농민들의 생산비 보전이 어려울 정도의 가격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농민들이 자가소비도 어려울 정도로 과대한 양을 강제로 공출했다. 이와 함께 생필품의 민간 소비를 극도로 제한하기 위해 주요 생필품의 배급이 이루어졌다.
일제의 전시 총동원은 ‘내선일체’ ‘황국신민’의 통합 이데올로기를 내세웠지만 실제는 제국주의의 차별과 억압의 메커니즘이 그대로 작동했다. 따라서 식민지민들은 민족의식·저항의식을 내면화하며 일제에 대한 저항을 멈출 수 없었다.
양곡공출명령서(출처: 민족문제연구소)
다시 전쟁의 시대를 살아야 하나
20세기 말 냉전의 해체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흐름 속에서 세계 대다수 지역에서는 상대적 평화의 시기를 지냈다. 그러나 2019년 말부터의 코로나19 팬데믹, 미국과 중국의 패권 충돌, 2022년 본격화된 러시아 - 우크라이나 전쟁은 국제관계를 대립의 지형으로 바꿔놓았고, 세계적으로 에너지·식량의 공급 불안정과 가격 폭등을 초래하면서 일상의 삶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책에서 다루었던 식민지 시기처럼 다시 전쟁의 시대를 살아야 하는 것일까? 남북관계의 불안정과 대립마저 격화되는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평화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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