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그 특사 이위종(李瑋鍾) (출처: 독립기념관)
이위종과의 만남
우연이었다.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던 10여 년 전 존경하는 교수님으로부터 한 뭉치의 자료를 건네받았다. 러시아 하바롭스크 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되어 있던 한인 관련 문서로 당신이 직접 하바롭스크에 가서 수집해 온 자료들이었다. 역사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잘 안다. 자신이 수집한 자료를 다른 이에게 건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하지만 교수님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흔쾌히 자료를 건네주셨다. 1,000매에 가까운 분량이었다. 간간이 한글이 보이기는 했지만, 대부분 러시아어로 된 문서들이었다. 읽기 힘든 육필 문서도 있었다. 대부분 우리 역사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자료들이었다.
고마운 마음에 의지가 불타올랐다. 목록작업부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한 문서가 눈에 들어왔다. 〈АВТОБИОГРАФИЯ Владимира Сергеевича И Члена Р.К.П(б) с 1918 г.〉라는 제목을 가진 3장짜리 러시아어 타자본 문서였다. ‘블라디미르 세르게예비치 이’ 즉 ‘이 씨 성을 가진 세르게이의 아들 블라디미르’라는 사람의 이력서였다. 1918년부터 러시아공산당(볼세비키) 당원이었다는 부분이 눈길을 끌었다. 지금까지 최초의 한인 러시아공산당원으로 알려진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가 입당한 시점이 1918년이었다.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지?” 호기심이 발동했다. 노한사전을 가져와 번역을 시작했다.
이력서는 ‘1884년 1월 9일 서울에서 조선의 전통 양반가문에서 태어났다’로 시작했다. 번역하면서 “어! 어!”하는 감탄사가 계속 튀어 나왔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미국으로 갔다가, 이후 프랑스 파리로 가서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프랑스 육군소위로 임관했다는 것이다. 놀라운 이력이었다. 첫 번째 페이지 중간 부분을 지나면서 이 사람이 누구인지 명확해졌다. 이렇게 쓰여 있었다. ‘1907년 조선 정부와 조선의 단체들에 의해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전권위원이 되었다.’
그렇다. ‘블라디미르 세르게예비치 이’는 이위종이었다. 고등학교까지 정규 교육과정에서 역사를 배운 한국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헤이그 특사’ 중 한 사람인 그 이위종이었다. 조금 더 한국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가 마지막 주러공사 이범진의 아들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왜 갑자기 여기에서 이위종의 이력서가 나오는 거지?” “왜 이위종의 이름이 블라디미르 세르게예비치라는 거지?” “그럼 이범진의 러시아 이름이 세르게이라는 건가?” 숱한 궁금증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이위종에 대해 다시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미 2002년에 러시아에서 출간된 『ЛИБОМДЖИН(이범진)』이라는 책에 이위종에 관한 자료들과 그의 외증손녀인 러시아 역사학자 율랴 피스쿨로바의 논문이 실려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여기에 왜 이위종이 ‘블라디미르 세르게예비치 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가를 짐작하게 하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율랴 피스쿨로바는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때까지 이위종의 러시아 생활을 정리하였다. 그런데 이위종의 이력서는 1924년 10월까지 기록되어 있다. 그때까지 이위종의 생애를 따라가 보자.
미국과 프랑스를 지나 러시아로
1895년 일본 낭인들에게 중전을 잃은 고종은 이듬해 2월 러시아공사관으로 몸을 피한다. 아관파천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친위쿠데타였다. 비록 성공은 했지만, 누군가는 정치적 책임을 져야 했다. 최측근 중 한 명이었던 이범진이 총대를 멨다. 고종이 환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범진은 미국공사로 임명되었다. 좌천성 인사였다. 1896년 7월 미국으로 떠나는 아버지를 따라 10살이 조금 넘은 이위종도 고국을 떠났다. 그가 둘째 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장남인 그의 형 이기종은 서울에 남았다. 이미 성인으로 조선 정부의 관리이기도 했지만, 아마 고국에 남은 가족들을 돌보고 제사를 지내야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이위종은 자신이 다시는 고국 땅을 밟지 못하리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미국에서 소학교를 다닌 이위종은 1900년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삼국의 전권공사로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 파리로 옮겨간다. 파리에서 귀족학교인 리쎄를 졸업한 그는 1902년 생시르사관학교에 입학한다. 프랑스국립육군사관학교인 생시르사관학교는 1800년대 초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세운 학교로, 이후 프랑스의 대통령이 되는 샤를 드골이 졸업한 명문학교였다. 1904년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한 이위종은 파리의 151연대 소대장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곧 아버지가 있는 러시아제국의 수도 페테르부르크로 가서 주러시아공사관의 참서관으로 근무하게 된다. 이위종의 외교관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헤이그 특사 이위종
1905년 을사늑약의 체결로 조선은 외교권을 상실하고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조선에 상주하던 외국의 공사관들은 철수했으며, 해외 각국에 설치되었던 대한제국의 공관들도 폐쇄되었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주러시아공사관은 폐쇄를 거부했다. 국제법적으로 불법이었지만 러시아 정부의 묵인 아래 대한제국의 외교업무를 계속 수행했다. 이런 상황은 공사인 이범진이 자결 순국한 1911년까지 계속되었다.
1907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었다. 고종으로부터 특사로 임명된 이상설과 이준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나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페테르부르크로 왔다. 이들은 곧 이위종과 함께 회의가 개최되는 네덜란드 헤이그로 갔다. 이상설이 정사로, 이준이 부사로 왔지만, 회의 기간 내내 곳곳에서 실제적인 외교활동을 편 사람은 이위종이었다. 그가 영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이위종은 언론을 상대로 외교활동을 펼쳤다. 7월 9일 그는 국제협회에서 세계 각국의 기자들을 대상으로 「한국을 위해 호소함(A Plea for Korea)」이라는 주제의 연설을 했다. 일본의 ‘동양평화’ 주장이 허구임을 드러내고 조선 민중이 일본의 지배에 저항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음을 역설했다. 하지만 일본의 방해로 헤이그에서 활동은 결국 실패했다.
이후 미국을 거쳐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이위종은 러시아 원동 연해주에서 벌어지고 있던 의병운동을 지도, 지원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1908년 4월경 최재형, 이범윤, 안중근 등과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였다. 동의회는 곧 의병부대를 조직했다. 그해 7월 국내로 진격하여 1개월여 동안 국경지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연해주의병 뒤에는 이위종이 있었다. 그러나 연해주의병이 실패로 돌아간 후, 이범윤과 갈등을 겪고 있던 이위종은 부친의 전보를 받고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고 만다.
결혼
러시아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하면서 이위종은 미모의 러시아 여성과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스웨덴 외교관의 혈통을 이어받은 남작의 딸 엘리자베타 발레리야노브나 놀켄이었다. 그들은 외교관 가족들이 모이는 어느 파티에서 만나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져들었고 결혼을 약속했다. 하지만 이들의 결혼에는 수많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었다.
먼저 양가 부모의 허락을 얻어야 했다. 비록 망해가는 나라의 공사였지만, 그래도 이범진은 조선의 양반이었다. 이위종이 차남이기는 하지만 푸른 눈의 며느리를 맞이한다는 사실을 쉽게 용납하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아들을 이길 수는 없었다. 또한 어차피 조선으로 돌아가기 어렵다면, 러시아 귀족과 사돈을 맺어두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타산도 작용했으리라. 결국 이범진은 러시아 외무장관에게 편지를 보내 아들이 결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달라고 요청했다.
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졌지만 해결해야 할 문제가 또 있었다. 종교였다. 러시아 귀족의 딸과 결혼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정교로 개종해야만 했다. 역시 이범진이 나섰다. 그는 러시아 외무장관에게 개종의 절차를 묻고 그 절차를 간소히 해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필요한 수속이 이루어진 후 이위종은 페테르부르크의 한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세례명으로 ‘블라디미르 세르게예비치 이’라는 러시아 이름을 받았다.
준비는 끝났다. 1905년 11월 11일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이위종은 21살, 엘리자베타는 17살이었다.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행복했다. 아버지로부터 생활비를 받았기 때문에 경제 사정도 풍족했다. 둘 사이에 어여쁜 두 딸이 태어났다. 이위종은 이제 어엿한 한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힘든 러시아살이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신혼의 단꿈이 깨기도 전인 1907년부터 이들 부부는 함께 있는 날보다 헤어져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이위종이 헤이그로, 미국으로 그리고 시베리아를 건너 연해주로 돌아다니면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그가 가족이 있는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직후 아버지는 자결을 했다. 이범진이 가진 재산은 모두 항일운동에 써버렸기 때문에 남겨진 유산도 없었다. 그때까지 이위종은 오직 아버지로부터 받는 생활비에 의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직접 가정의 경제를 꾸려나가야 했다.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노브고로드주에서 양계업에 종사하기도 하고, 서북철도의 세관에서 사무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집안의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게다가 1912년에는 셋째 딸까지 태어났다. 이위종은 러시아 정부에 재정 지원을 지속적으로 청원하는 한편, 살던 집을 계속 줄여나갔다. 고육지책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결혼생활이 원만히 유지되기는 힘들었다. 젊은 시절 무섭게 타올랐던 사랑의 불꽃은 생활고 앞에서 서서히 꺼져갔다. 1913년부터 별거가 시작되었다. 엘리자베타는 이위종이 양육비를 주지 않는다면서 그를 비난했다. 그녀에게 이위종은 무책임한 가장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결혼생활은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끝나고 말았다.
러시아혁명 이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과거 프랑스육군의 소위였던 이위종은 다시 한번 군인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1916년 1월 블라디미르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은 그는 러시아군 소위로 독일군과의 전쟁에 참가했다. 하지만 그의 러시아군 장교 경력은 짧게 끝나고 만다. 러시아가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독일과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던 것이다.
이위종을 다시 군대로 불러들인 것은 러시아내전의 발발이었다. 혁명 이후 러시아 전역에서 내전이 일어났다. 1918년 5월 이위종은 라쟌주에서 제3국제연대에 입대하여 소비에트적군으로 내전에 참가했다. 그해 12월에는 러시아공산당의 당원이 되었다. 1919년 4월 이위종은 소비에트적군 제15연대 기관총부대 부대장으로 우파 함락 전투에 참가했다. 당시 우파는 백군의 시베리아정부가 있는 옴스크로 가는 중요 요충지였다. 결국 그해 12월 우파가 점령되고 이위종은 적기훈장을 수여받았다.
왜 적군 편에 섰을까? 러시아혁명은 반제국주의 혁명이었다. 레닌이 선포한 민족자결의 원칙은 식민지가 된 조선에서도 민족해방운동을 재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위종에게 러시아혁명과 조선혁명, 즉 조선의 독립은 분리되지 않는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1920년 4월 시베리아에 완충국인 원동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러시아내전은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된다. 이때 이위종은 군대를 나와 당사업과 대중사업에 뛰어들었다. 1920년 우랄지역 한인 노동대중 사이에서 선전선동사업을 펼치기 위해 페름시에 파견된 것을 시작으로 세미팔라틴스크, 크라스노야르스크, 치타로 옮겨가며 시베리아 일대에서 당사업과 대중조직 사업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활동이 많아지는 만큼 직위도 점점 올라갔다. 처음에는 주로 한인부를 조직하여 현지의 한인들을 교육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점차 당과 행정부의 주요 업무를 처리하는 위치를 맡게 되었다. 확인 가능한 이위종의 마지막 업무와 직위는 1924년 10월 주식회사 ‘흘레보프로둑트(빵제품)’치타지국의 부사장이었다.
망명자 또는 디아스포라
외교관으로 해외에 체재하던 중 자신을 파견한 나라가 망했다. 의도치 않은 망명자가 되어야 했다. 결국 다시는 고국 땅을 밟지 못했지만, 언제나 조국을 그리워했다.
한때 빛나던 시절도 있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세계 각국의 기자들 앞에 섰다. 분주히 뛰어다니다 보니 지구를 온전히 한 바퀴 돈 셈이 되었다. 결혼을 하고 가정도 꾸렸다. 어여쁜 딸도 셋이나 얻었다. 망명자에게도 생활이 있다. 생활인이 되었다. 녹록지 않은 현실 속에 그는 생활인으로서 실패하였다. 절망할 법도 했다. 하지만 다시 일어섰다. 혁명을 수호하는 군인으로, 이후에는 혁명을 이어가는 당원으로. 그리고 생활인으로, 이곳저곳을 떠도는 디아스포라로.
흥미로운 점은 이위종의 이동 경로다. 라쟌주에서 적군에 가담하여 치타까지 이위종은 계속 동쪽으로 이동해 왔다.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10대 초반에 떠나와서 다시는 밟아보지 못한 고국의 땅에 대한 그리움이 그를 인도한 것일까? 물론 1924년 이후 이위종의 행적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는 억측일 뿐이다.
이위종의 러시아어 이력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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