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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코리안 디아스포라
“국속을 복슈허고 지구상 인류에 평등허기를 위허여” - 프랑스의 독립운동가 홍재하 -
  • 이장규 프랑스 파리 디드로 7대학 한중일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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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이후 세계열강을 상대로 펼친 최초의 외교는 1919년 파리강화회의 기간 동안 조국의 독립청원과 일본의 무자비한 비인륜적 만행을 고발했던 파리위원부의 활동이었음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망명정부의 독립운동가를 반겨줄 리 없었던 프랑스에서 김규식, 황기환, 이관용 등 파리위원부 인사들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인물이 있었는데, 홍재하(洪在夏, 1892~1960)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는 프랑스 내 한인 노동자와 유학생들로 구성된 최초의 한인단체 재법한국민회(在法韓國民會)를 이끌었다.

  비록 임시정부의 공식적인 인정을 받은 단체는 아니었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한 그들의 순수한 일념만큼은 누구 못지않았다. 홍재하는 191911월 프랑스 스위프(Suippes)로 이주한 이래 1960년 사망할 때까지 40여 년을 프랑스에 거주했다. 그는 재법한국민회 회장으로 파리위원부에 대한 지원활동을 전개했고, 한국민국제연맹개진회를 결성해 훗날 펼쳐질 파리위원부의 외교에 대비했다. 1923년에는 재법한국민회를 개편해 파리한인친목회를 조직하면서 독립운동과 재불 한인사회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서울에서 무르만스크 그리고 스위프


  홍재하는 1892117일 서울 경운동에서 남양 홍씨 30세손 홍완섭의 3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남양 홍씨의 집성촌인 경기도 양수군 문호리에서 꽤 규모 있는 목재상을 운영한 부친 슬하에서 자란 그는 서울로 유학해 배재학당을 다녔다. 능성 구 씨와 결혼해 두 아이를 둔 홍재하는 독립운동에 가담하다 일제 경찰의 추적을 피해 연해주로 피신했다

  함경북도 경무부에서 발행한 일본제국 해외여권에는 메이지(明治) 43(1910) 1118, 포염사덕항(露領浦塩斯德港, 블라디보스토크항), 이름 인정환(印正煥), 나이 17, 주소 조선 경상남도 부산군 부산진 사좌112-6”으로 적혀 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하려 인적사항을 모두 허위로 기재했음을 알 수 있다. 프랑스 스위프에서 체류 등록할 때에도 인정환의 프랑스식 표기인 ‘In Chiyon Fuan’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는 일본 여권, 러시아 신분증, 중국 여권 신청 시 자필서류, 프랑스 체류증, 1948년 재불 한국공사관에 제출한 재외국민 등록신청서 등 5개국의 신분증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1910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후 일자리를 찾아 시베리아를 횡단해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갔다. 1917년 러시아 내전 당시 러시아 백군 소속 부대원으로 8개월간 참전했으나, 적군의 승리로 인해 러시아 최북단 무르만스크까지 밀려갔다이곳에는 약 500여 명의 한인들이 있었다. 철병하는 영국군의 마지막 선박 산타엘레나호에 200명의 한인들이 승선해 영국 에든버러에 도착했다. 그러나 영국과 동맹관계였던 일본은 한인 노동자들을 모두 중국 칭다오(靑島)로 송환하려 했다. 이때 파리위원부의 황기환은 영국 외무부, 프랑스 노동부와 교섭해 약 37명의 한인들을 구출했다. 이중에는 홍재하도 포함되어 런던을 거쳐 영국 스텝슨 항구를 출발, 도버해협을 건너 프랑스에 들어갔다. 이후 파리 동쪽 200킬로미터 지점의 소도시 스위프에 정착했다. 이곳에 정착한 홍재하를 비롯한 한인 노동자들은 황폐해진 전장을 청소하고 시신안치와 묘지 조성사업에 투입되었다. 이때 등록한 한인들의 명단은 필자가 2018년 마른도 문서보관소에서 발견하여 말로만 전해지던 스위프 한인들의 실체를 규명할 수 있었다. 이들 한인 명부의 국적란에는 한국인(Coreé n)’이라고 명기되어 있었고, 홍재하의 이명인 ‘In Chiyon Fuan’도 찾을 수 있었다. 스위프 한인노동자들은 파리위원부의 황기환과 홍재하의 주도로 당시 후속으로 도착한 한인유학생들을 규합해 프랑스 최초의 한인단체인 재법한국민회를 결성했다. 스위프의 한인들은 근면하고, 예의와 품행이 방정해 현지에서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1921년 프랑스 정부는 이들에게 노동 헌신의 증표로 동메달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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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프 한인명부


3·1 독립선언 1주년 기념 경축식 거행


  재법한국민회가 펼친 첫 행사는 3·1독립선언 1주년 기념 축하식이었다. 이 소식은 독립신문1920511일자에 재법한인(留法韓人)31일 축하란 기사에 소개되어 있다. 행사장은 야영식으로 건조된 임시막사를 짓고 연단 뒤에는 태극기와 프랑스 국기를 교차시켜 걸었고, 연단에는 포탄 껍질에 야생화를 장식했다. 경축식은 오전 10시에 시작되어 일동 애국가를 합창하고 유학생 대표 허정이 식사를 읽었다. 한국사회당 대표 조소앙의 축사와 스위스 대학에 재학 중이던 이관용의 축전 낭독이 있었다. 이어서 유학생 나기호의 독창이 있었고, 김주봉과 박춘화를 시작으로 파리위원부 및 여러 사람들이 연설했다. 파리위원부 서기장 황기환의 선창으로 3·1만세, 국토광복 만세, 재법한인국민회 만세를 삼창했다. 나기호의 회고록 비바람 몰아쳐도에는 ‘3·1절 한 돌 기념식을 마치고 재불 한인 노동자와 스위프(1920)’라는 제목의 흐릿한 사진이 실려 있는데, 당시의 분위기를 느낄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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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스위프에서 거행된 3.1절 1주년 기념식


파리위원부에 재정 지원


  홍재하가 이끈 재법한국민회는 파리위원부의 독립운동에도 재정적으로 적극 동참했다. 파리위원부가 상하이 임시정부에 보고한 구주의 우리 사업에 따르면 광복사업을 돕기 위해 곤란한 사정을 불고하고 6개월간 계속해 합계 6천 프랑의 거액을 파리위원부에 기부했다라고 적혀 있다. 이는 당시 한인노동자 임금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황기환이 19201120일 자 홍재하에게 보낸 서신에는 영국의 한국친우회창립을 위해 1,860프랑을 홍재하에게 부탁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신한민보1920528일에 한인 노동자들은 적십자회를 위해 850프랑을 모아 파리위원부 서기장 황기환에게 위탁했다고 보도했다. 1920년 파리위원부는 김규식, 조소앙, 이관용 등이 모두 떠난 뒤 황기환이 외롭게 지켜나가고 있었다. 이때 홍재하는 황기환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면서 파리위원부의 실질적 구성원으로 참여했다. 그는 임시정부에도 독립운동 자금을 보냈고, 상하이 독립신문을 정기구독할 정도로 조국의 독립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졌다.


한국민국제연맹개진회 창설


  파리위원부는 19201012 ~16일까지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개최된 국제연맹 사회단체연합회 제4차 대회(國際聯盟擁護會聯合大)에 윤해와 이관용을 파견했다. 이들은 한국독립과 국제연맹 가입을 위한 청원서를 만들어 의장인 루피니 상원의원에 전달했다. 이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정식단체 조직의 필요성을 느낀 홍재하는 1030일 재법한국민회가 주축이 된 한국민국제연맹개진회(韓國民國際聯盟改進會)’를 창설했다. 이관용이 1024일 자로 낸 로마(羅馬)에서 보고서를 홍재하 앞으로 보냈다는 점으로 보아 사실상 홍재하가 개진회를 주도 했음을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노력으로 19216월 제네바에서 열린 대회에서 한국문제가 상정되었고, 각국의 지대한 관심과 동정을 얻었다.


재법한국민회를 파리한인친목회로 전환


  그는 미국으로 떠나는 동포와 유학생들도 성심껏 돕고 위로했다. 파리를 192081일 떠나 바사리’(Vasari) 선편으로 92일 뉴욕에 도착한 서해창(徐海昌)당일자로 무사히 본월 2일 뉴욕에 도착하였사오니 도시 선생의 여해(如海)하신 은혜와 여산(如山)하신 덕택이로소이다라고 쓴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1923년 파리위원부의 마지막 멤버 황기환마저 미국으로 떠나자 홍재하는 공백을 메우려고 재법한국민회 인사들과 함께 파리위원부를 유지하겠다는 의지를 워싱턴 구미위원부에 전했다. 그러나 재정관계로 불가하다는 답신을 받았다. 이후 한인노동자들 역시 스위프를 떠나 각지로 흩어졌다. 이때 홍재하는 재법한국민회를 파리한인친목회로 개편해 한인들의 결속에 힘을 쏟았다. 1925년 국내에서 대홍수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재불 한인 노동자 40여 명을 설득해 불화2,000프랑과 일화 160원의 성금을 모아 국내 언론사에 보냈다.

  1934년에는 삼남 수해 의연금을 재법한인회이름으로 동아일보사에 기탁했다. 이때 재법한인회의 주소는 서영해의 고려통신사가 있던 말브랑슈 7번지(7 rue Malebranche, Paris)였다. 이는 파리위원부와 황기환이 떠난 후 프랑스 한인사회가 홍재하와 서영해를 통해 긴밀히 연락하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에는 전쟁의 희생자들을 위해 한국적십자회를 통해 거액의 기부금을 출연했다. 주불 공사에게 19501113일 자로 감사 서한을 받기도 했다. 홍재하의 파리한인친목회는 프랑스 한인사회 정착의 길잡이 혹은 지원부대 같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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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9월 2일자 황기환이 홍재하에게 보낸 서신 


평생 한국을 그리워한 프랑스의 모범적인 아버지 - 사후 62년 만에 고국의 품으로


  홍재하는 중국어, 일본어, 러시아어와 프랑스어에 능숙했다고 한다. 그는 파리에서 상업에 종사하다가 192612월 오와즈(Oise) 출신의 마리 루이즈 듀보아(Marie-Louise Dubois, 1906~1974)와 결혼했다. 당시 홍재하의 나이는 34, 부인은 18세였다. 이들은 23녀를 두었다. 가족의 성은 푸안(Fuan) 이고, 아이들 이름에는 프랑스 이름 외에 을 더 붙였다. 그의 딸들은 모두 한국 남자와 결혼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도 홍재하는 프랑스나 벨기에의 정치인들을 만나 한국 독립에 힘써 달라고 당부했다. 매년 3.1절과 광복절이면 반드시 집에 태극기를 내걸었다. 해방 이후 홍재하가 직접 작성한 대한민국 주불공사관 등록신청서의 체류 목적에는 국속을 복슈허고 지구상 인류에 평등허기를 위허여라 명기한 것을 통해 그의 높은 애국의식을 살필 수 있다. 콜롱브(Colombes)의 홍재하 자택을 찾는 많은 한국인들이 줄을 이었다.

  1948년 파리에 온 바오로 노기남 주교, UN총회 대표단으로 온 장면, 조병옥, 장택상, 정일형 등이 그를 찾아왔다. 홍재하 부부는 정성을 다하여 이들의 조국 재건 노력에 건투를 빌었다고 한다. 특히 1947년 장면을 만났을 당시에 그는 귀국의 뜻을 밝혀 부친 홍완섭옹으로부터 귀국여비 반환보장을 받았다. 하지만 대표단들의 경비에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끝내 그의 귀국은 실현되지 못했다. 얼마 후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귀국길은 더욱 요원해졌다. 그는 콜롱브에서 1960210일 향년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홍재하는 파리위원부 인사들이 모두 떠난 후에도 독립운동을 추진하고, 프랑스 내 초기 한인사회의 형성과 결속에 힘을 쏟았다. 특히 한인 유학생들의 취학과 취업, 재불 한인사회 내 독립운동을 고취하고 안정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2019년 국가보훈처는 그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사후 62년만인 202211월 그의 유해는 콜롱브에서 스위프를 돌아 고국의 품에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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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하 집 앞에서(오른쪽이 홍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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