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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소식
안용복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노래하다
  • 홍성근 | 연구위원(제3연구실)

2006년 독도역사기행을 시작한지 올해로 세번째다. 이번에는 바다 건너 일본으로 갔다. 안용복의 도일활동 행적을 답사하기 위해서다. 안용복은 17세기 일본 어부들이 몰래 울릉도에 와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을 때, 이를 중단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안용복은 1693년과 1696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에 갔다. 그가 두 번째 일본으로 건너가 오키섬에 도착했던 날이 5월 18일이다. 비록 300여년이라는 시차가 있지만, 우리는 안용복이 오키섬에 도착한 그 다음날인 5월 19일 부관훼리를 타고 시모노세키로 향하였다.

이번 기행에는 경향 각지에서 온 15명의 독도 시민활동가들과 울릉군, 경상북도 등 독도관련 담당자를 합쳐서 모두 24명이 참가하였다. 일본으로 가는 날 아침, 일본 문부과학성이 중학교 사회과 교과서의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를 명기할 방침이라는 뉴스가 나왔다. 한ㆍ일 양국의 여론도 좋지 않고, 독도와 관련된 다수의 사람들이 참가하다보니, 무슨 사고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자못 걱정도 되었다.

우리의 주요한 답사장소는 돗토리현 지역이었다. 시모노세키에서 돗토리현으로 가는 예닐곱 시간의 버스길에 우리는 안용복과 일본의 역사에 대해 열띤 강의와 토론을 이어갔다. 안용복이 들렀던 요나고(米子), 아카자키(赤崎)를 거쳐서 아오야의 전념사(專念寺), 가로의 동선사(東善寺), 돗토리의 정회소(町會所), 고야마(湖山) 호수의 아오시마(靑島) 등을 답사했다. 300여년이 지난 지금 안용복의 채취가 남아 있을리 만무하지만, 전념사의 90세 된 주지 스님은 "옛날에 한 조선인이 돗토리 번주를 만나러 가는 길에 이곳에 들렀다"고 하면서 자신이 60여년전 들었다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외로이 계신 주지 스님을 보니 그곳에서 안용복과 함께 묵었던 이인성의 시가가 떠올랐다. "가을이 와서 달을 바라보니 돌아갈 생각뿐이다." 먼 이국 땅에서 얼마나 고향이 그리웠을까?

고야마 호수 가운데 있는 아오시마에 들렀을 때에는 그 작은 섬에서 안용복 일행이 한달여 동안 갇혀 살았다는 생각을 하니 측은하기도 했다. 그 섬의 어디에다가 집을 지었을까? 11명이나 되는 청장년들이 한달여 동안 무엇을 하며 지냈을까? 우리는 아오시마의 전망대에서 조선의 고향을 바라보았을 안용복과 그 일행들을 생각하며 조촐하게나마 그들을 추모하는 의식을 드렸다.

우리는 안용복 일행이 묵었던 곳만이 아니라, 안용복 당시의 역사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곳에도 갔다. 돗토리번주가 살았던 돗토리 성터와 그 번주의 힘을 입어 울릉도에서 고기를 잡았던 오오야ㆍ무라카와 집안의 주거지, 그리고 새로운 섬(울릉도)을 발견했다며 울릉도에서 어로작업을 시작했던 오오야 신기치 등 오오야가의 무덤이 있는 총천사(總泉寺)도 들렀다. 이제는 돗토리 번주도, 오오야 신기치도 볼 수 없다. 다만 생명 없는 성터와 비석뿐이다. 우리는 일본 내륙에서 오키섬이 보인다는 미호노세키(美保關) 등대에도 갔었지만, 저 멀리 오키섬으로 들어가는 여객선만 보였다. 맑은 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인다고 하는 오키섬도, 그 길을 노 저어 왔던 안용복도 온데 간데 없다.

그가 없어서 일까? 한ㆍ일 양측의 안용복에 대한 평가는 180도 다르다.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는 일본인들은 안용복을 완전 거짓말쟁이라고 몰아붙인다. "그가 에도(지금의 동경)에 갔다거나, 울릉도가 일본땅이 아니라는 막부의 서계를 받았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그는 독도가 어느 곳에 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의 말은 허구와 과장으로 가득차 있다"고 힐난한다.

물론 방향이 다르긴 하지만 내게도 의문이 있다. 그는 자기를 왜 '삼품 당상관'이라고 했을까? 또 왜 '푸른 철릭'의 관복을 입고 가죽신을 신었어야 했을까? 어떤 일본인이 주장하는 것처럼 진정 허세를 부리기 위함이었을까? 안용복의 행적을 답사하면서 나는 '진실의 종'이 울리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밝히지 않아도 안용복 행적의 진실은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지난 2005년에 오키섬의 무라카미라는 집에서 발견된 안용복 관련 조사보고서가 일부 일본인들이 제기 했던 안용복에 대한 의문을 상당부분 풀어주고 있다.

내가 바랬던 것은 그 먼바다를 두 차례나 건너다닌 안용복과 그를 따라 일본으로 왔던 일행들을 이해하고 싶었다. 또 안용복과 그 동료들을 어느 때는 외교사절처럼 응대를 하더니 어느 때는 불청객처럼 대했던 일본인들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싶었다.

4박 5일의 일정이 계획한 대로 아무런 사고 없이 끝이 났다. 한국에서 출발 당일 방문하려 했던 부산 좌천동의 안용복 생가터는 시간이 없어서 돌아오는 길에 찾아갔다. 안용복의 생가터는 안용복장군기념사업회에서 안용복의 호패에 기록된 주소를 기초로 찾아냈다고 한다. 그런데 안용복이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는 모른다. 안용복은 일본에서 돌아와 '범경죄'로 사형을 당할 지경이었으나, 영의정 남구만 같은 이들의 도움으로 감형이 되어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런데 300여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색다른 역사의 현장을 목격하였다. 안용복은 좌수영 소속의 능로군, 이른바 노를 젓는 수졸이었다고 한다. 부산의 수강사(守彊祠)는 안용복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사당인데, 그 뒤편에는 경상도 지역을 관할했던 진짜 장군들의 송덕비가 도열해 있다. 마치 능로군이 장군들을 거느리고 있는 형세다. 장군 이상의 큰 공적을 세운 안용복을 기리기 위함을 것이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 독도뿐만 아니라 울릉도마저 일본과의 논쟁에 휘말려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답사 기간 중 일본 마츠에를 비롯하여 시마네현 지역 곳곳의 "다케시마, 돌아오라 섬과 바다여"라고 하는 문구들을 보았다. 삶의 현장뿐만 아니라 미래를 교육하는 교과서에까지 독도를 자기네 영토로 주장하는 우울한 소식도 들었다.

하지만 안용복의 도일활동 행적답사를 통해 독도와 동해문제의 해법을 찾아보고자 했던 이번 독도역사기행은 새로운 희망을 안겨준다. 이번에 가지 못한 오끼섬, 나가사키, 대마도를 포함하여 안용복이 1, 2차 도일했던 행로를 한ㆍ일 양국의 젊은이들이 함께 배 타고 가는 것을 꿈꾸어 본다. 부산에서 출발하여 울릉도와 독도를 돌아 오키섬으로 가면서 미래의 주역인 젊은 세대들이 어긋나고 뒤틀린 역사와 동해의 높은 파도를 함께 가르며 나아가는 것이다. 300여년전 노를 저어 갔던 안용복의 뱃길이 오늘날 갈등하는 독도와 동해문제의 해법을 우리에게 던져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