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각 자기나라에서 영웅시되고 있는 두 사람이 있다. 안용복과 아이즈야 하치에몬(會津屋 八右衛門).
1693년 4월, 안용복은 울릉도에서 만난 일본인 어민들과 함께 일본으로 가 약 7개월을 일본에서 보냈다. 당시 행적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근년에 내가 이곳에 들어와서 울릉도·자산도(독도) 등을 조선의 지경으로 정하고 관백의 서계를 받았다"며,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한 기록이 『숙종실록』에 남아있다. 1696년 5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돗토리 번주로부터 다시는 일본인이 두 섬을 침범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확약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8월, 일본을 떠나 강원도 양양현에 도착한 그는 강원감사 심평에게 체포되어 취조를 받는다. 그리고 국법을 어긴 죄로 사형에 처해질 뻔하다가 영중추부사 남구만과 영돈녕 윤지완의 구명으로 사형을 면하고 유배당했다. 그 후의 기록은 없다.
아이즈야 하치에몬은 1824년 처음으로 울릉도에 도해했다. 그의 아버지 세스케(靑助)는 풍랑을 만나 표류하던 중에 네덜란드 배에 구조된 뒤 여러 이국을 떠돌다가 3년 만에 나가사키로 돌아왔다. 부친의 이국 이야기를 들은 하치에몬은 먼 나라로 항해하여 무역을 하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자금을 모으기 위한 명분이 죽도(울릉도) 도해였다. "죽도에 가서 대나무와 나무를 베고 해산물을 가지고 오면 하마다 번의 이익이 되고, 아버지가 번에 끼친 손해를 보상하여 명예회복이 된다"는 명분하에 하마다번 가로 등을 설득하여 죽도에 도해하였다. 그리고 막부에 발각되어 1836년 사형 당했고 관련자 모두 엄벌에 처해졌다.
이후 일본의 방방곡곡에 다음과 같은 팻말이 세워졌다. "위의 섬(울릉도)은 예전에는 호키(의) 요나고 주민들이 도해하여 어업 등을 행한 곳이었으나, 겐로쿠 시대에 (막부가) 조선국에게 건네주셨다. 그 이후 도해를 금하는 명령이 내려진 곳이다. 모든 외국으로 도해는 엄히 금하셨으므로 향후 위의 섬에 대해서도 똑같이 명심하여 도해하지 않아야 한다."
두 사람 운명이 독도 귀속문제에 끼친 영향
안용복도 하치에몬도 비천한 신분으로서는 감히 꿈꿀 수 없었던 대담한 일을 했다. 한 사람은 영토문제에 개입하였고 한 사람은 금지된 이국 도항과 무역에 대한 꿈을 꾸었다. 당시로서는 사형을 당해 마땅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조선 왕조의 권력은 조금 허술(?)했던 것 같다. 남구만, 윤지완은 안용복을 변호할 수 있었으며, 이익은 그를 '영웅'으로 칭송하였다. 또 일본인 연구자의 주장에 의하면, 유향원 신경준 같은 이가 현재 한국 측이 독도영유권 주장의 역사적 근거로 삼고 있는 『여지도』 『강계고』 『동국문헌비고』 『만기요람』등에 "울릉도와 자산도 모두 조선땅"이라고 한 안용복의 주장을 그대로 반영했다고 하니 안용복이 뿌린 씨는 조선이라는 텃밭에서 나름대로 싹을 틔운 것이다.
그러나 하치에몬은 달랐다. 칼의 위력이 만들어 낸 촘촘한 권력의 그물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민중은 없었다. 막부의 엄한 도해금지명령만이 번복할 수 없는 유일한 기록으로 남아 새로 태어난 메이지 정부로 계승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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