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재단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로고 동북아역사재단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로고 뉴스레터

현장보고
고종의 영세중립 정책
  • 강종일 한반도중립화연구소장
고종

와다 하루키 교수는 "고종이 한국의 중립화를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했지만 일본군의 위력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발표했다.(동북아역사재단NEWS, 2009.8월호 11p) 고종의 중립화 정책의 역사적 배경, 전개과정, 실패요인, 시사점 등을 간략하게 살펴본다.

고종은 조선주재 독일부영사 허만 부들러(Hermann Budler)가 1885년 3월 영세중립 정책을 조선정부에 제언한 이래, 중국의 내정간섭 배제, 일본의 조선 강제병합 저지, 조선 내 외국군의 전쟁방지와 철군 등을 목적으로 영세중립 정책을 추구했다.

고종은 1891년 6월 일본, 러시아, 미국, 영국 등에 조선의 영세중립을 요청했으나 중국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당시 동북아 정세는 조선에 대한 중국의 내정간섭 증대, 일본의 정한론 고조, 1896년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화되던 시기였다. 고종은 1900년 8월 조병식 특사를 일본에 파견하고 고에이 도구마(近衛篤磨)에게 일본이 조선을 대신해서 열강국가에 조선의 영세중립을 제의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그는 "국방은 일본에 위임하고, 조선은 내치에 전념할 것"을 요구하면서 거절했다.

고종은 1900년 10월 조병식 공사를 통해 동경주재 알프레드 버크(Alfred E. Buck) 미국공사에게 조선의 영세중립을 위해 협력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그는 영세중립과 같은 중요한 정치문제는 조선정부가 워싱턴 주재 공사를 통해 정식으로 제안할 것을 요구하면서 접수를 거부했다. 조선정부는 1901년 1월 동경주재 알렉산더 이스볼스키(Alexander P. Isvolski) 러시아 공사에게 조선의 영세중립을 일본과 협의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스볼스키는 일본으로부터 조선의 영세중립을 논의할 입장이 아니라는 통보를 받았다.

고종은 조병식으로부터 "조선이 군대를 5만 명으로 증원할 경우 일본이 조선의 영세중립을 지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을 보고 받고, 이를 서울주재 호래이스 알렌(Horace N. Allen) 미국공사에게 문의했다. 알렌은 조선의 세입으로는 그러한 규모의 군대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고종에게 답변했으나, 조선의 영세중립이 미국 국익에 반한다고 국무성에 보고했다.

중립화 정책 실패의 원인과 교훈

고종은 1903년 9월 현영운을 일본 정부로 보내 조선의 영세중립을 다시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일본, 미국, 러시아로부터 협력을 받지 못한 고종은 1904년 1월20일 조선이 영세중립국임을 일방적으로 선포하고, 이를 각국정부에 통보하면서 외국의 군대는 조선에서 전쟁을 하지 말고 즉시 철수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조선에서 발발함으로써 영세중립 정책은 실패한다.

조선의 영세중립 정책이 실패하게 된 요인은 조선의 국력과 군사력의 열세, 19세기 말엽부터 시작된 중국, 일본, 러시아 간의 헤게모니 경쟁, 미국 맥킨리(William Mckinley) 정부의 엄정중립과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의 친일정책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고종의 영세중립 정책은 실패했으나,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수성과 남북통일에 대한 주변국의 국가이익이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100여년이 경과한 오늘날에도 계속 유효함을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북한은 현재 한일병합의 무효화를 위한 근거로 고종의 영세중립 정책을 제시했다. 한국도 고종의 영세중립정책에서 중도외교의 실용주의가 태동하기를 기대해 본다.

※ 재단 뉴스레터 '동북아역사재단뉴스' 에서는 독자투고를 기다립니다.
게재된 글에는 소정의 원고료를 드립니다. 많은 참여 바랍니다.
주제_ 역사 관련 자유 주제 분량_ 200자 원고지 8매 보내실곳_ jmik@historyfoundadion.or.kr